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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1.17 18:25 수정 : 2016.11.17 20:49

길윤형
도쿄 특파원

참담한 마음으로 글을 쓴다.

지난 14일 국방부와 외교부 당국자들이 도쿄에 와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협정문에 ‘가서명’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 한켠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저들이 해를 넘기기 전에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말 것임은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다. 마음속으로 12월 도쿄에서 열리는 한·중·일 정상회의에 맞춰 협정이 체결될 것이라고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뜻밖의 사태가 발생했다. 우리가 알았던 대통령은 최순실의 꼭두각시이자, 한국 사회가 오랜 시간 피땀 흘려 쌓아온 헌법적 가치를 부정하고 온갖 부정과 협잡을 주도한 인물임이 확인되고 있다. ‘국민 탄핵’을 당한 저 허수아비가 해방 이후 71년 만에 처음 체결되는 한-일 간 군사협정에 손을 대는 게 정당하냐는 분노의 목소리가 쏟아지는 중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매몰되면 협정에 대한 문제의식은 “왜 지금?”이라는 ‘타이밍론’에 머무르고 만다. 우리의 고민은 그보다 좀더 깊은 지점에 있다.

한국에게 일본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한국 사회 내의 명확한 ‘사회적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일본은 여전히 가깝고도 멀며, 친근하면서도 조금은 두려운 알 수 없는 국가다. 그러나 일본에겐 한국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존재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15년 이후 한국을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 나라”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개념 속엔 1998년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선언 이후 역대 일본 정부들이 언급해왔던 “기본적인 가치를 공유하는 이웃”이라는 표현은 삭제돼 있다. 이는 한-일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또는 중국의 부상에 공동 대처해야 하는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 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의 지배 등 공통의 가치를 공유하는 ‘친구’는 아니라는 의미다.

근대 이후 일본은 대륙의 위협에 맞서 일본을 지키려면 반도를 자신들의 영향 아래 둬야 한다는 일관된 대한반도 정책을 추진해왔다.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야마가타 아리토모(3대·9대 총리)의 ‘이익선’ 개념이다. 일본은 그에 따라 처음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직접 지배’했고, 패전 이후엔 한일협정(1965년)을 통해 경제발전을 지원하는 ‘간접 지배’ 방식을 활용해왔다. 이런 도식 속에서 한국은 지난 냉전 시기 공산권과 마주한 최전선에서 일본을 방어하는 방파제 역할을 수행해왔다.

이윽고 냉전이 끝났다. 그와 함께 한국은 국력을 키워 서서히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2000년대 초 ‘한류 붐’에서 드러나듯 처음엔 한국의 발전을 경탄과 축하의 눈으로 바라보던 일본의 시각은 중국의 급격한 성장과 함께 차갑게 식어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지난 5년간의 한-일 대립의 심연엔 이러한 양국 관계의 구조적 변화가 도사리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이번 군사협정 체결은 지난 수년 동안 사나운 망아지처럼 일본(그리고 그 뒤의 미국)의 애를 먹이던 한국이 다시 한번 미·일의 하위 파트너로 코가 꿰이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는 일본엔 커다란 전략적 승리가 된다.

협정은 한국에도 국익이 될까. 한국과 일본의 대중·대북관엔 도무지 양립 불가능한 결정적 차이가 존재한다. 한국에게 중국은 미래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함께해야 할 동반자이고, 북한은 좋든 싫든 평화통일을 이뤄내야 할 형제이자 반쪽이다. 일본인들에겐 미안하지만, 한-일은 전략적 이해를 공유하지 않는다. 우린 ‘기본적 가치’를 공유한다. 우린 당신들의 방파제가 아닌, 선량한 이웃이자 친구이다. 협정은 우리에게 필요가 없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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