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특파원 27일(현지시각) 오후 이뤄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진주만 방문을 보며 여러 생각을 했다. 이번 방문에서 아베 총리가 ‘사죄’의 말을 입에 담지 않으리라는 것은 예상됐던 일이었기에 지난해 8월 나온 ‘아베 담화’를 볼 때만큼의 긴장감은 없었다. 아베 총리는 지난 담화에서 “우리 아이들과 손자들에게 계속 사죄의 숙명을 짊어지게 해선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앞으로 그는 미국은 물론 다른 어떤 나라에도 사죄하진 않을 것이다. 이번 연설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다 후사타(1913~41)라는 일본 해군의 제로센 조종사에 대한 언급이었다. 그는 1941년 12월7일 진주만 공격에 참여했지만, 총알이 연료 탱크를 뚫고 지나가 귀환을 포기하고 전투기 기체로 미 해군 격납고를 들이받는 자살공격을 감행하고 숨졌다. 이후 미군이 그의 용기를 평가해 추락한 자리에 기념비를 세우게 된다. 아베 총리는 이 같은 역사적 경위를 짧게 소개한 뒤 “그의 추락 지점에 비를 세운 것은 일본인이 아니었다. 공격을 받은 쪽에 있었던 미국 사람들이었다. 죽은 이의 용기를 찬양해 석비를 세워줬다. 비에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에 대한 경의를 넣어 ‘일본제국해군대위’라고 당시의 계급을 새겼다”고 말했다. 이다는 용감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머리도 좋았던 것 같다. 위키피디아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당시 일본의 수재들만 갈 수 있었던 해군병학교(해군사관학교)에 1931년 입학해 34년에 5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아마 전쟁으로 숨지지 않았다면 이후 해군대학에 진학해 별을 달고 편안한 여생을 살았을지 모른다. 이다의 사연을 들으면서 한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이름은 조선인 노용우다. 노는 1922년 12월23일 경기도 수원군 송산면 지화리 245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는지 고모가 인천으로 그를 불러 공부를 시켰다. 노는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지금의 서울대 법대가 되는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노용우가 경성법전에 입학할 무렵은 전쟁의 시대였다. 1943년 10월 속성으로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하는 특별조종견습사관 1기로 입대해 1945년 4월 아이치현 기요스에 배치된 비행 제5전대로 배치됐다. 이 부대는 당시 마리아나제도에서 일본 본토를 노리던 미국의 대형 폭격기 B-29의 공습을 견제하는 부대였다. 1945년 5월29일 출격한 노용우는 기체로 B-29를 들이받는 자살공격을 감행하고 숨졌다. 숨진 노용우를 소속 부대에선 군신으로 떠받들었던 모양이다. 그의 유골을 일부 분리해 부대장이 패전 때까지 부대장실에 안치했기 때문이다. 두달 반 뒤 전쟁이 끝났고, 노의 유골은 부대의 귀감에서 처치 곤란한 천덕꾸러기가 됐다. 이후 일본 정부가 유족들에게 노용우의 죽음에 대해 공식 통지를 해온 것은 죽음으로부터 60년이 지난 2005년 6월이었다. 몇년 전 만났던 여동생 노경자씨는 “오빠가 돌아와 살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용우는 조국이 아닌 일본을 지키다 숨졌고 그래서 친일파가 되고 말았다. 아베 총리는 그의 죽음에 대해선 어떤 평가를 내리게 될까. 아베 총리의 연설을 들으며 용감하고 머리도 좋았을 청년들이 부질없는 자살공격을 하기보단, 살아남아 전후 한국과 일본 사회를 위해 더 많은 기여를 할 순 없었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자살공격자를 칭송하고 이를 소재로 삼아 ‘동맹의 화해’를 말하는 것에 대해선 저항감이 있다. 연료 탱크에 총탄을 맞았으면 어딘가에 불시착을 하거나 낙하산을 타고 탈출해야 한다. 그리고 살아남아야 한다. charisma@hani.co.kr
칼럼 |
[특파원 칼럼] 이다와 노용우 / 길윤형 |
도쿄 특파원 27일(현지시각) 오후 이뤄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진주만 방문을 보며 여러 생각을 했다. 이번 방문에서 아베 총리가 ‘사죄’의 말을 입에 담지 않으리라는 것은 예상됐던 일이었기에 지난해 8월 나온 ‘아베 담화’를 볼 때만큼의 긴장감은 없었다. 아베 총리는 지난 담화에서 “우리 아이들과 손자들에게 계속 사죄의 숙명을 짊어지게 해선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앞으로 그는 미국은 물론 다른 어떤 나라에도 사죄하진 않을 것이다. 이번 연설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다 후사타(1913~41)라는 일본 해군의 제로센 조종사에 대한 언급이었다. 그는 1941년 12월7일 진주만 공격에 참여했지만, 총알이 연료 탱크를 뚫고 지나가 귀환을 포기하고 전투기 기체로 미 해군 격납고를 들이받는 자살공격을 감행하고 숨졌다. 이후 미군이 그의 용기를 평가해 추락한 자리에 기념비를 세우게 된다. 아베 총리는 이 같은 역사적 경위를 짧게 소개한 뒤 “그의 추락 지점에 비를 세운 것은 일본인이 아니었다. 공격을 받은 쪽에 있었던 미국 사람들이었다. 죽은 이의 용기를 찬양해 석비를 세워줬다. 비에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에 대한 경의를 넣어 ‘일본제국해군대위’라고 당시의 계급을 새겼다”고 말했다. 이다는 용감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머리도 좋았던 것 같다. 위키피디아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당시 일본의 수재들만 갈 수 있었던 해군병학교(해군사관학교)에 1931년 입학해 34년에 5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아마 전쟁으로 숨지지 않았다면 이후 해군대학에 진학해 별을 달고 편안한 여생을 살았을지 모른다. 이다의 사연을 들으면서 한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이름은 조선인 노용우다. 노는 1922년 12월23일 경기도 수원군 송산면 지화리 245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는지 고모가 인천으로 그를 불러 공부를 시켰다. 노는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지금의 서울대 법대가 되는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노용우가 경성법전에 입학할 무렵은 전쟁의 시대였다. 1943년 10월 속성으로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하는 특별조종견습사관 1기로 입대해 1945년 4월 아이치현 기요스에 배치된 비행 제5전대로 배치됐다. 이 부대는 당시 마리아나제도에서 일본 본토를 노리던 미국의 대형 폭격기 B-29의 공습을 견제하는 부대였다. 1945년 5월29일 출격한 노용우는 기체로 B-29를 들이받는 자살공격을 감행하고 숨졌다. 숨진 노용우를 소속 부대에선 군신으로 떠받들었던 모양이다. 그의 유골을 일부 분리해 부대장이 패전 때까지 부대장실에 안치했기 때문이다. 두달 반 뒤 전쟁이 끝났고, 노의 유골은 부대의 귀감에서 처치 곤란한 천덕꾸러기가 됐다. 이후 일본 정부가 유족들에게 노용우의 죽음에 대해 공식 통지를 해온 것은 죽음으로부터 60년이 지난 2005년 6월이었다. 몇년 전 만났던 여동생 노경자씨는 “오빠가 돌아와 살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용우는 조국이 아닌 일본을 지키다 숨졌고 그래서 친일파가 되고 말았다. 아베 총리는 그의 죽음에 대해선 어떤 평가를 내리게 될까. 아베 총리의 연설을 들으며 용감하고 머리도 좋았을 청년들이 부질없는 자살공격을 하기보단, 살아남아 전후 한국과 일본 사회를 위해 더 많은 기여를 할 순 없었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자살공격자를 칭송하고 이를 소재로 삼아 ‘동맹의 화해’를 말하는 것에 대해선 저항감이 있다. 연료 탱크에 총탄을 맞았으면 어딘가에 불시착을 하거나 낙하산을 타고 탈출해야 한다. 그리고 살아남아야 한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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