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1.05 18:12
수정 : 2017.01.06 00:33
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대한민국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제 한 몸을 불살라서라도 그걸로 갈 용의가 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달 20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한국 특파원들과의 간담회 도중에 한 말이다. “몸을 불사르겠다”는 것은 어떠한 위험도, 어떠한 불이익도 감수하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뜻이다. 대권 출사표에 어울리는 말이다.
정교하게 기획된 말이라면 의도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카리스마와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의식해 일부러 강한 어휘를 구사했을 것이다. 요즘 들어 반 전 총장의 발언 수위가 전례없이 높아지는 것을 보면 ‘기름장어’ 이미지를 덮고 싶어하는 전략이 감지된다.
그런데 간담회 현장에서 이상하게도 그의 말과 표정, 눈빛에서 몰입감과 무게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당시 발언 상황을 여러차례 다시 보았지만, 느낌은 달라지지 않았다.
천근만근의 무게를 가져야 할 “불사르겠다”는 말이 공허하게 들렸던 것은, 그의 메시지 전달 능력 부족 때문은 아닐 것이다. ‘구름 관중’을 몰고 다녔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현장에서 들어보면 ‘연설 기술’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 그래도 유세 현장은 늘 열기와 설렘으로 가득 찼다. 노동계층과 소득불평등 해소, 환경보호를 위해 ‘불살라온’ 그의 삶 자체가 공명을 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반 전 총장이 외교관으로서도 유엔 사무총장으로서도 몸을 던져 결단을 내렸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한국 외교관으로서의 삶은 공무원이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도덕적 권위를 부여받은 유엔 사무총장으로서의 직무도 방기해 시민단체와 유엔 내부 감시기구의 비판을 적지 않게 받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이티 콜레라 사태였다. 2010년 대지진 지원을 위해 파견된 유엔평화유지군이 콜레라를 전염시켜 최소한 1만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고 수십만명이 질병을 앓았다.(<뉴욕 타임스>) 아이티는 그동안 콜레라가 없었던 나라이기 때문에 콜레라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인근 도미니카공화국까지 확산됐다. 반기문 전 총장은 사과를 6년 뒤에 했다.
발병 이듬해인 2011년 유엔 전문가 패널들은 역학조사를 통해 네팔에서 파견된 평화유지군이 질병의 진원지임을 밝혀냈다. 피해자들이 유엔에 보상을 요구하고, 시민단체들이 유엔을 대상으로 소송까지 제기했다. 유엔 내부 조사기구나 인권 담당자들도 유엔의 무능력을 비판했다. 하지만 ‘반기문의 유엔’은 인도주의 지원 대신에, 평화유지군의 ‘면책특권’을 내세우며 법의 뒤로 숨었다.
반 전 총장이 직접 뒤늦게 사과를 한 것은 사무총장 임기 종료 한달을 남겨둔 지난달 1일이었다. 그는 “아이티에서의 콜레라 발병과 확산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 아이티 국민에게도 사과한다”며 ‘도덕적 책임’만 인정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한국 대선 출마론이 무르익던 시기다.
그가 대선 출마를 앞두고 ‘악재’가 될 만한 것을 털기 위해 막판에 사과를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힘없고 가난하며, 유엔 상대 소송에서도 패한 아이티의 콜레라 피해자들이 6년 동안 ‘가만있어야’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사건도 아니었는데, 그가 왜 유엔의 대의를 위해 소매 걷고 나서지 않았는지 의아하다.
그는 소통과 통합을 자신의 리더십으로 제시했다. 외국 지도자를 많이 만났다고 ‘소통의 달인’으로 쳐주지는 않는다. 진정한 소통과 통합은 지도자가 피해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비판을 인정하며, 잘못을 사과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결단에서 출발한다. 그가 특파원 간담회에서 “불사르겠다”고 했을 때, 말이 겉돌았던 이유를 좀 알 것 같다.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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