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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9.07 17:48 수정 : 2017.09.07 20:56

조기원
도쿄특파원

“(죽임을 당할 뻔한 일은) 천재(天災)라고 생각하고 포기해라.”

1923년 10월말 간토(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때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경남 거창 출신 신창범씨에게 찾아온 조선총독부 관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23살이었던 신씨는 그해 9월1일 도쿄 우에노에서 점심을 먹다가 지진을 만났다. 먹을 것도 구하기 어려웠던 신씨는 도쿄에 사는 재일동포 지인의 집으로 피난을 갔다. 9월3일 사람들이 “쓰나미(지진해일)가 온다”고 소리쳤다. 그는 고지대에 있는 도쿄 아라카와강 제방으로 다시 피난했다.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9월4일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잡아라” “조선인을 죽이자”고 소리쳤다. 간토대지진 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방화를 했다” 같은 헛소문이 퍼지면서, 군경과 일본 민간인들로 구성된 ‘자경단’이 조선인을 학살하던 때였다. 일본도와 ‘도비쿠치’(소방용 도구로 긴 막대에 칼날이 달린 도구)로 무장한 일본인들이 인파 속에서 조선인을 찾기 시작했다. 자경단은 아라카와제방 공사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 임선일씨에게 가장 먼저 다가가 일본어로 무언가 말을 걸었다. 일본어를 몰랐던 임씨는 일본어를 할 줄 알았던 신씨에게 “통역을 해달라”고 외쳤다. 외침과 거의 동시에 자경단이 일본도로 임씨를 내리쳐 살해했다.

그는 그대로 있다가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 생각해 아라카와강으로 뛰어들었다. 다른 조선인들도 뛰어들었다. 총성이 들렸고 헤엄을 치던 조선인들이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동생과 함께 갈대밭에 몸을 숨겼지만, 배를 타고 찾아온 자경단에 붙잡혔다. 자경단은 그를 일본도로 내리쳤다. 그는 일본도를 왼손으로 막았다. 왼손 새끼손가락이 잘려나갔다. 일본도를 빼앗아 저항했으나 소용없었다. 다른 자경단원들까지 합세한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었고, 기절했다. 왼쪽 어깨에는 일본도에 베인 큰 상처가 남았고, 머리와 몸 이곳저곳에도 상처가 났다.

일본인들은 조선인 주검을 데라지마 경찰서로 옮겼다. 주검은, 어시장에서 큰 생선을 갈고리로 찍어서 옮기듯이, 도비쿠치로 옮겼다. 그도 데라지마 경찰서로 옮겨졌다. 왼발에는 도비쿠치에 찍힌 상처가 남았다. 의식을 잃은 그를 구한 이는 같이 경찰서로 끌려온 동생 훈범씨였다. 조금 덜 중한 상처를 입은 동생은 생선 쌓아놓듯이 쌓아놓은 시체들 틈바구니에서 형이 “물을 달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동생이 준 물을 먹고 일주일 정도를 버틴 끝에 눈을 떴다. 의식을 찾은 그에게 총독부 관리가 찾아와 병원에 데려다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치료는 ‘빨간약’이라고 불리는 소독약을 발라주는 정도였다. 간호사들은 간호보다는 조선인들의 동태 감시에 더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그가 퇴원했을 때 같은 병실에 있던 16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9명이었다.

이 이야기는 지난 2일 도쿄 스미다구 아라카와제방에서 시민단체 봉선화가 연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94주기 추도식에서 소개된 신창범씨의 증언이다. 1963년 일본 조선대학교가 수집해 기록한 증언을 다시 소개했다.

이날 도쿄 스미다구 아라카와제방 근처 봉숭아꽃이 핀 조선인학살 추도비 앞에서 시민들이 헌화를 했다. 추도식에는 창범씨 막내아우의 손자인 창우씨가 참석했다. 창우씨는 “조선인학살에 대한 은폐가 계속되고 있다. 총독부 관리가 ‘천재라고 생각해 포기하라’고 한 말을 듣고 있으면,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최근에 한 말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고이케 지사는 올해부터 조선인학살 희생자에 대한 추도문을 보내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지진 피해자 모두에게 추도문을 보내고 따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추도문을 보내지 않겠다”고 말했다.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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