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09.27 18:15 수정 : 2018.09.28 14:05

김외현
베이징 특파원

언젠가 어느 한국 기업의 중국 내 생산시설을 참관하고 나왔을 때의 일이다. 일행과 함께 차에 올라탔더니, 배웅 나온 중국 직원들이 차창 밖에서 손을 흔들었다. 다들 마주 인사하는 사이, 한국인 참가자가 못마땅한 듯 툭 내뱉었다. “인사는 않고 손만 흔드네.”

중국인은 허리를 숙이는 인사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 몸(躬)을 구부린다(鞠)는 뜻의 ‘쥐궁’(鞠躬·국궁)이란 예법은 존재한다. 그러나 현대 중국에선 결혼식, 축하 행사, 장례식, 추도식, 공개 사과 등이 아니면 ‘쥐궁’을 보기 힘들다. 일상에선 서로 숙이기보다는 인사말과 함께 ‘쿨하게’ 손을 흔든다.

이런 풍경은 같은 문화권인 한반도나 일본과는 사뭇 다르다. 서양에서 만난 황인종이 고개 숙여 인사하지 않으면 필경 중국인일 거란 우스개도 있다. 거꾸로 베이징·상하이에서 허리 굽혀 인사하는 사람은 중국인이 아니란 가정도 가능하다. 한국어·일본어와 달리 높임말이 희미하게 존재하는 중국어의 특징까지 결합하면, 위아래를 따지지 않는 듯한 오늘의 중국은 문화적 격차가 꽤 커 보이기도 한다.

중국에서 쥐궁이 사라지다시피 한 것은 20세기에 접어들어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의 목소리가 커진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0세기 초만 해도 사진·동영상에서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중국인들 모습이 확인된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가 1949년 옮겨간 대만에서도 쥐궁의 풍경은 찾기 힘들다. 이미 그 전에 ‘소멸’된 셈이다. 역사학자 장리판은 “민국(공화국)이 됐으니 예전처럼 누가 누구에게 절할 필요가 없다는 문화가 생겼던 것 같다”며 “서양 문화를 익히겠다는 의식도 강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쥐궁을 대체한 것은 두 손을 모아 들어 보이는 ‘공수’(拱手)와 서양에서 들어온 악수다. 이 시기를 산 작가 린위탕(임어당·1895~1976)의 <생활의 발견>은 공수와 악수를 비교하며 전자의 ‘우수함’을 주장했다. 남의 손을 잡는 악수를 할 땐 얼마나 깨끗할지, 얼마나 세게 잡을지, 어떻게 흔들지, 다른 손은 어찌할지 등을 고민하지만, 자기 손을 맞잡는 공수는 이런 번뇌를 덜어준다는 것이다. 중국 전통 인사법인 공수의 보편화에 대한 기대였을 수도 있겠다.

린위탕의 뜻과는 달리, 오늘날 중국에선 악수가 공수를 압도했다. 공수는 전통복 차림의 인사 또는 부탁의 인사 등에서나 본다. 인터넷 이모티콘처럼 상징적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한 누리꾼은 “일본은 기존 전통 위에 서양 습관을 보태어 악수와 동시에 허리를 숙이지만, 중국은 서양 관습으로 전통을 완전히 대체시켜 악수만 한다”고 평한다. 전통을 격렬하게 끊어냈던 문화대혁명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근래엔 중국에서도 쥐궁을 되살리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존경과 존중을 표현하는 중국의 전통 예법이라는 관점에서다. 그러다 지난 3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중국 방문 때 쥐궁이 화제가 됐다. 시진핑 주석의 측근인 차이치 베이징시 서기가 김 위원장을 향해 90도 인사를 하는 모습이 북한 방송 화면에 나왔다. 지난해 겨울 베이징 교외의 저소득층을 대거 몰아낸 장본인으로 지목되는 인물이자, “기층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진짜 총칼을 들고 피를 본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는 발언의 주인공이다. 누리꾼들 사이에서 ‘권력자에게 굽신거리고 백성은 위협하는 관료’라는 비판이 나왔다.

지난주 평양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환영 나온 시민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장면이 중국 언론에서도 보도가 됐다. 우리가 동포, 통일, 평화 등을 떠올리며 감동하는 사이, 중국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중국 지도자들에게도 기대할 수 있는 모습일까?

oscar@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특파원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