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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16 17:07 수정 : 2019.05.17 14:17

조기원
도쿄 특파원

“여러분 레이와(令和·나루히토 일왕의 연호) 시대 첫 수업입니다. 힘내세요.”

최근 집 근처 구립 스포츠센터 수영장에 들렀을 때 일이다. 강사가 수강생들을 앞에 놓고 인사말을 하면서 연호 변경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 들른 일본식 술집인 이자카야에서도 종업원이 손님들 앞에서 소규모 공연을 하면서 “레이와 시대 개막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전통적 서민 상점가인 도쿄 닌교초 거리에는 ‘레이와’라고 쓴 깃발과 일장기가 줄지어 걸려 있다. 관광객도 많이 찾는 도쿄 우에노 아메야요코초 시장에서는 레이와라는 글자를 커다랗게 쓴 티셔츠가 팔리고 있다. 레이와로 연호가 바뀐 5월1일에는 연호 변경에 맞춰 혼인신고서를 내려는 사람들이 구청에 줄을 섰다. 군주의 재위 시기에 맞추어서 시간을 구분하는 연호 제도가 현대 민주주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간혹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오지만, ‘새 시대 개막’이라는 축하 분위기에 묻혀버렸다. 일본 신문과 방송에서는 연초부터 연호 변경에 맞추어 이런저런 일에 의미 부여를 해왔다. 4월 벚꽃놀이 시즌에는 ‘헤이세이(平成·아키히토 일왕 시대 연호) 마지막 벚꽃놀이’, 봄 스모 경기 우승자에게는 ‘헤이세이 마지막 스모 우승자’라고 묘사하는 식이었다.

연호를 역사책에서나 봤던 외국인 눈에는 이런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일본인들의 일상생활을 보면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운전면허증을 비롯한 공문서는 연호로 연도를 표기한다. 은행 창구에서 계좌를 개설할 때도 연호로 자신의 생년을 적게 되어 있다. 물론 ‘서력 몇 년’이라고 따로 적어도 되지만, 양식 자체에는 서기 표시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공산당 기관지인 <아카하타>도 서기 표기와 연호 표기를 병행한다.

아베 신조 총리는 몇십년 만에 한번 오는 연호 변경과 새 일왕 즉위라는 이벤트를 자신의 보수적 정치 행보에 최대한 활용하려 애썼다. 아베 총리는 4월1일 새 연호 발표 때 직접 기자회견을 했다. 1989년 헤이세이 연호 발표 때 다케시타 노보루 당시 총리는 따로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다. 일본 시민단체에서는 연호 변경과 새 일왕 즉위라는 축하 분위기를 이용해서 아베 총리가 전쟁 포기를 규정한 현행 ‘평화헌법’의 개정 움직임을 본격화할 수 있다며 긴장한다. 3일 헌법기념일에 도쿄 아리아케 방재공원에서 열린 ‘허용하지 마! 아베 정권 헌법 발의’ 집회에서는 시민들이 “연호 대신 서력으로 연도를 말하겠다”는 사회자 발언에 박수를 쳤다.

연호 제도를 떠받치는 일왕 제도 자체로 들어가면 일본인들의 생각은 복잡해진다. 아키히토 상왕이 재위 시기에 국민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평화를 강조하는 행보를 보인 점에서 대부분은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그러나 과거 일본이 군국주의와 침략전쟁으로 내달릴 수 있었던 제도적 장치였던 일왕 제도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는 이전보다 오히려 어려워졌다. 현행 일본 헌법에 따라 일왕은 정치적 행위를 할 수 없지만 정치적 중요성 자체는 낮지 않다. 일왕 제도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하라 다케시 방송대 교수는 일왕이 “재해 피해 지역에 사적으로 가도 모두가 신경쓰지 않는 상황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일왕이 정치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되는 상황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다. 한국에서도 일왕이 방한하면 한-일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러나 일본 현행 헌법은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규정한다. 한-일 관계에 일왕보다는 양국 시민들의 교류와 생각이 중요하다.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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