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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13 18:02 수정 : 2019.06.14 13:54

조기원
도쿄특파원

1990년 9월24일 가네마루 신 일본 자민당 의원과 다나베 마코토 사회당 부위원장이 북한을 전격 방문했다. 1986~87년 부총리를 지냈으며 일본 정계의 실력자로 군림하던 가네마루는 9월26일 묘향산에서 김일성 주석과 회담했다. 방북 마지막 날인 9월28일 자민당과 사회당 그리고 북한 조선노동당은 ‘3당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공동선언에는 “3당은 과거 일본이 36년간 조선 인민에 가한 큰 불행과 재난, 전후 45년간 조선 인민이 입은 손실에 대해서 공식적 사죄를 하고 충분히 보상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양국 간 존재하고 있는 비정상적 상태를 해소하고 되도록 빨리 국교를 수립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재일조선인이 차별받지 않고 그 인권과 민족적 모든 권리, 법적 지위가 존중되어야 하며, 일본 정부는 이를 법적으로 보증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선언했다.

29년 전 가네마루의 전격 방북 배경에는 냉전의 해체라는 시대 흐름이 있었다. 3당 공동선언 이틀 뒤인 9월30일 한국은 소련과 수교했다. 한해 뒤인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됐다. 그러나 국교 수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3당 공동선언에 명시된 공식적 사죄와 보상에 대해서 일본 내에서 ‘굴욕 외교’라는 비난이 일었다. 1992년에는 우익 단체 회원이 강연회에 참석한 가네마루를 향해서 총을 쏜 일도 있었다. 다행히 총탄은 빗나갔지만 충격적인 정치인 습격 사건으로 지금도 기억된다. 일본인 납북자 문제도 북-일 국교 정상화가 되지 않은 원인이었다.

북한과 일본은 2002년 다시 한번 국교 정상화를 위해서 크게 움직였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회담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일본인 납북자 문제에 대해서 인정하고 사과했다. 2002년 북한과 일본이 발표한 ‘북-일 평양선언’에 “(북한은) 두 나라의 비정상적인 관계 속에서 발생한 이러한 유감스러운 문제가 앞으로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적절한 조처를 할 것을 확인하였다”는 표현을 넣어, 간접적으로 일본인 납북자 문제에 대해서 언급했다. 2002년 평양 공동선언 배경에는 조지 부시 미국 정부의 대북 강경 정책이 있었다. 부시 대통령은 그해 1월29일 이라크와 이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칭했다. 고이즈미 방북과 ‘평양선언’을 주도한 다나카 히토시 일본총합연구소 산하 국제전략연구소 이사장은 “당시 북한은 미국이 공격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북한이 당시 일본과 교섭한 이유에는 안전 보장 문제도 걸려 있었다”고 회고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달부터 “조건을 붙이지 않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과거 북한에 대해 “최대한의 압력”만을 외쳤으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3월 한국의 중재로 북-미 정상회담을 결단한 뒤 재빨리 태도를 바꿨다.

지난해 6월 1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1년은 그런 의미에서 국제정치의 냉정함을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북한과 일본은 시대가 크게 변화할 때 만나왔지만 국교 정상화라는 열매를 맺지는 못했다. 아베 총리의 이번 제안이 받아들여질지도 미지수다. 지난 7일 도쿄 히비야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일본 시민들이 ‘한반도와 일본에 비핵·평화의 확립을’이라는 이름의 집회를 열었다. 집회 참석자들은 일본 정부와 북한의 대화를 촉구하면서도 “아베 총리는 발밑부터 봐야 한다. 조선학교 고교 무상화 교육 제외 같은 재일조선인 차별이 없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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