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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1986) - 1집 Too Fast Too Loud Too Heavy - 앞(수정).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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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팝의 사건·사고 60년 (92) 유현상과 백두산
유현상이란 음악인을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1990년대 이후 <여자야> <갈 테면 가라지> 등을 구성지게 부른 트로트 가수? 1980년대 후반 이지연 등 신인가수를 발굴한 음반제작자 겸 매니저?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이지연 노래), <성냥갑 속 내 젊음아>(도원경 노래) 등을 만든 작곡가? 1980년대 중반 그룹 백두산을 결성하고 이끈 헤비메탈 1세대 보컬리스트? 요즘의 박태환의 인기를 능가하던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와 결혼해서 여성지와 스포츠신문을 장식한 가수?그 모두가 음악인 유현상의 디엔에이를 이루는 요소다. 유현상을 메탈 보컬리스트로 숭배했던 이들에게 그가 이지연의 틴 아이돌 팝 곡들을 작곡하고 트로트 가수로 변신한 일은 충격과 경악 그 자체였지만, 그가 록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로로 오랫 동안 무명 밴드를 거쳤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룹 백두산 이전에 트로트 음반을 발표한 적이 있다는 사실 역시 금시초문일 공산이 크다.
최이철(사랑과 평화), 이건태(위대한 탄생) 등 동료 음악인들이 입 모아 증언하듯, 유현상은 1970년대 미군을 상대로 한 이태원 클럽가에서 기나긴 무명의 로커 시기를 보냈다. 라스트 찬스, 사계절, 템페스트, 사랑과 평화는 그가 기타리스트로, 보컬리스트로 내공을 다진 수많은 밴드 중 일부일 뿐이다. 트로트와 록이 묘하게 혼합된 솔로 앨범 <사랑의 강>(1985)에서 김도균을 세션 기타리스트로 픽업한 일이 그룹 백두산 결성의 결정적 계기였다는 사실은 이후 그의 행보를 보았을 때 의미심장하다.
1986년은 헤비메탈 4인방(시나위, 백두산, H2O, 부활)으로 불린 밴드들의 데뷔작들이 쏟아진 해이다. 그해 백두산 역시 1집 를 발표했다. 서정성과 장중함을 갖춘 <어둠 속에서>를 히트시킨 이 음반은 한국 헤비메탈의 시금석 중 하나로 평가받지만, 건전 발랄하기 그지없는 가사와 무드(<우리의 것>)와 한춘근의 타미 앨드리지 풍 드럼 솔로(<뛰어>)와 하이톤의 샤우팅(<말할 걸>)이 공존하는 음반이었다.
이듬해 내놓은 2집 에 열광했다. 하지만 백두산 역시 다른 밴드들처럼 해체의 수순을 피하지는 못했고 영광의 시기는 1986~87년의 짧은 2년으로 그쳤다.
백두산은 메탈 4인방 밴드 중 가장 격렬한 음악과 무대 매너를 보여준 밴드다. 단신에, 30대를 훌쩍 넘긴 나이였지만 웃통을 벗어젖히고 무대를 누비던 유현상의 퍼포먼스는 당시 록 마니아라면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후 다소 희화화된 이미지로 추억되는 측면이 있다. 캔의 배기성이 더러 연예프로그램에서 그 시절 유현상과 백두산을 흉내 내 좌중을 웃기던 장면을 본 사람이라면 무슨 뜻인 줄 알 것이다. 웃긴가? 그렇더라도 그것 역시 한국 록의 나이테의 하나다. 씁쓸한가? 아직 메탈 시대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시작되지도 못했다. 다만 그때는 무겁고 다소 맹목적이고 우스꽝스러웠을지라도 절실하고 절박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슬프지만 진실’이다.
이용우/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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