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칼럼을 연재하면서 다른 칼럼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데 그중에는 특정 에스엔에스(SNS)에 한하여 일어난 소란을 구체적인 배경 설명 없이 논평하는 경우가 있어 아연해지곤 한다. 에스엔에스에 노출되어 있는 이들에게 제법 중대한 사안으로 여겨졌을 일이 다른 이들에게는 먼 나라 일보다 더 머나먼 일처럼 금시초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느 계정이 활성화되어 있느냐에 따라, 어느 채널을 구독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사가 천차만별로 나뉘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오죽하면 유튜브를 ‘너튜브’라고 하겠는가. 하나의 공식적인 진리의 자리를 대체하는, 머릿수만큼 무한한 ‘뇌피셜’은 또 어떤가. 그 와중에 매체들 간에도 위계라는 것이 생겨서 에스엔에스에서 벌어진 일이 가감 없이 기사화되거나, 개중에 큰 이슈는 티브이(TV)에까지 보도되는 식으로 뉴스가 유통되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상류의 수원지에서 제법 세차게 소용돌이치던 강물이 하류에 당도하면 으레 느려지듯이 각각의 매체 소비자들에게 소식이 체감되는 차이는 분명하다. 누군가에게 항시 뜨거운 이슈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매번 미지근하게 다가온다면 감히 그들을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라고 말해도 좋은 걸까. 이 새로운 분열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매체는 마치 신체기관과 같이 우리의 일상에 밀착해 있기에 이에 대한 탐구는 매우 긴요해 보인다. 구글 트렌드를 연구한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서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내놓는다. 사람들은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에서는 이상적으로 편집된 자아상을 연출하지만, 자신을 노출할 필요가 없는 구글 검색창에는 억압된 내면을 드러낸다. 에스엔에스는 숙제 검사를 받는 일기장과 같고, 구글 검색창은 화장실 낙서와 같은 셈이다. 매체의 종류만큼 분열된 자아는 축복일까 불행일까. 박상영의 소설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에는 에스엔에스 세대의 좌절된 자화상이 핍진하게 그려져 있다. 주인공 ‘나’의 여자친구 ‘소라’는 “유일한 자아실현의 장이자 인생의 진열대”인 인스타그램에 열정적으로 매달린다. 그녀가 영화제에 출품한 단편영화는 “소라를 닮았지만 조금 덜 예쁜 배우가 소라의 말투로 이야기”하는, “소라를 위한 소라만의 영화”였다고 ‘나’는 술회한다. 자신을 과잉 재현할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공허함으로부터 이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의 젊은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는 구글을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으로 독해한다. 일반의지는 “다양한 의지가 서로 간의 차이를 내포한 채 공공의 장에 나타남으로써” 성립하는, 사물의 질서와 같은 것이다. 차이의 합이 클수록 일반의지의 정확성은 증가한다. 구글은 이 일반의지의 현대적 구현이며, 민주주의의 원칙인 합리적인 의사소통으로 해결될 수 없는 부분을 일반의지로 보충하자는 것이 아즈마 히로키의 주장이다. 인간에게는 공적으로 의식화할 수 있는 측면만큼이나 비합리적인 무의식의 측면 또한 있기 때문에 이를 사회적 논의에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는 논리다. 매체가 다양해지는 만큼 사회 또한 다원화하고 있다면, 여러 매체를 고루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이는 우리의 한정된 에너지를 이전보다 더욱 효율적으로 분산시켜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한 그만큼 우리가 스스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더욱 난망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매체는 국경보다 더 촘촘하게 사람들 사이를 경계 짓고 있다.
칼럼 |
[2030 잠금해제] 너튜브와 뇌피셜의 시대 / 이은지 |
문학평론가 칼럼을 연재하면서 다른 칼럼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데 그중에는 특정 에스엔에스(SNS)에 한하여 일어난 소란을 구체적인 배경 설명 없이 논평하는 경우가 있어 아연해지곤 한다. 에스엔에스에 노출되어 있는 이들에게 제법 중대한 사안으로 여겨졌을 일이 다른 이들에게는 먼 나라 일보다 더 머나먼 일처럼 금시초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느 계정이 활성화되어 있느냐에 따라, 어느 채널을 구독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사가 천차만별로 나뉘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오죽하면 유튜브를 ‘너튜브’라고 하겠는가. 하나의 공식적인 진리의 자리를 대체하는, 머릿수만큼 무한한 ‘뇌피셜’은 또 어떤가. 그 와중에 매체들 간에도 위계라는 것이 생겨서 에스엔에스에서 벌어진 일이 가감 없이 기사화되거나, 개중에 큰 이슈는 티브이(TV)에까지 보도되는 식으로 뉴스가 유통되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상류의 수원지에서 제법 세차게 소용돌이치던 강물이 하류에 당도하면 으레 느려지듯이 각각의 매체 소비자들에게 소식이 체감되는 차이는 분명하다. 누군가에게 항시 뜨거운 이슈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매번 미지근하게 다가온다면 감히 그들을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라고 말해도 좋은 걸까. 이 새로운 분열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매체는 마치 신체기관과 같이 우리의 일상에 밀착해 있기에 이에 대한 탐구는 매우 긴요해 보인다. 구글 트렌드를 연구한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서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내놓는다. 사람들은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에서는 이상적으로 편집된 자아상을 연출하지만, 자신을 노출할 필요가 없는 구글 검색창에는 억압된 내면을 드러낸다. 에스엔에스는 숙제 검사를 받는 일기장과 같고, 구글 검색창은 화장실 낙서와 같은 셈이다. 매체의 종류만큼 분열된 자아는 축복일까 불행일까. 박상영의 소설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에는 에스엔에스 세대의 좌절된 자화상이 핍진하게 그려져 있다. 주인공 ‘나’의 여자친구 ‘소라’는 “유일한 자아실현의 장이자 인생의 진열대”인 인스타그램에 열정적으로 매달린다. 그녀가 영화제에 출품한 단편영화는 “소라를 닮았지만 조금 덜 예쁜 배우가 소라의 말투로 이야기”하는, “소라를 위한 소라만의 영화”였다고 ‘나’는 술회한다. 자신을 과잉 재현할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공허함으로부터 이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의 젊은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는 구글을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으로 독해한다. 일반의지는 “다양한 의지가 서로 간의 차이를 내포한 채 공공의 장에 나타남으로써” 성립하는, 사물의 질서와 같은 것이다. 차이의 합이 클수록 일반의지의 정확성은 증가한다. 구글은 이 일반의지의 현대적 구현이며, 민주주의의 원칙인 합리적인 의사소통으로 해결될 수 없는 부분을 일반의지로 보충하자는 것이 아즈마 히로키의 주장이다. 인간에게는 공적으로 의식화할 수 있는 측면만큼이나 비합리적인 무의식의 측면 또한 있기 때문에 이를 사회적 논의에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는 논리다. 매체가 다양해지는 만큼 사회 또한 다원화하고 있다면, 여러 매체를 고루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이는 우리의 한정된 에너지를 이전보다 더욱 효율적으로 분산시켜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한 그만큼 우리가 스스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더욱 난망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매체는 국경보다 더 촘촘하게 사람들 사이를 경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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