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유리병에 담긴 주스를 택배로 부칠 일이 있었다. 택배사 홈페이지에서 배송을 신청한 다음 날 기사가 수거해 간 주스는 배송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파손되었다. 나는 배상을 요구했지만 택배사의 답변은 유리병이 배송제한 품목에 해당하므로 배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택배기사가 수거할 때 해당 내용을 제대로 안내하지 않았다면 기사에게 책임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나의 ‘컴플레인’은 기사가 해결할 몫으로 고스란히 넘어갔다. 택배사 홈페이지에 다시 접속해보니 배송제한 품목에 대한 안내는 작은 버튼을 누르면 팝업창으로 뜨도록 되어 있었다. 인터넷으로 택배 배송을 신청하는 고객이 배송제한 품목을 안내받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다면 유리병을 배송하려 한 고객의 잘못과, 안내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택배기사의 잘못에 앞서 홈페이지를 그런 식으로 설계한 본사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파손된 유리병에 대해 본사 또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글을 고객센터에 남겼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 글을 처리해야 할 책임은 우리 동네 지부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담당자가 전화하여 그런 글을 남기면 어떡하느냐며 기사님과 해결하라고 항의하였다. 그 기사님은 집으로 찾아와서는, 유리병이 파손된 것이 자신의 과실임이 인정되면 시말서를 써야 한다며 그냥 당신 개인 돈으로 주스값을 물어주겠노라고 사정하였다. 나는 그만 배상받기를 포기했다. 이 배배 꼬인 과정 속에서 본사가 져야 할 몫의 책임을 지게 하는 일은 나도, 택배기사도, 관할지부도,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대기업에 잠식당한 일상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지만 온전히 해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본사들은 도대체 책임이라는 것을 질 줄 모른다. 그리고 이 책임은 다른 이의 몫으로 돌아간다. 장강명의 <현수동 빵집 삼국지>에서는 100m 남짓 되는 거리에 빵집 세 곳이 경쟁하며 모두가 죽어나는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 그중 두 곳은 프랜차이즈 빵집으로, 동네 특성이나 운영자 사정과 무관하게 내려오는 “본사 방침”을 따르느라 온 가족의 몸과 영혼이 축난다. 이렇게 빵집 주인들은 절대 본사는 피해 보지 않는 “함께 죽는 싸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최저임금 노동자의 사용자인 편의점주들이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고 나서는 모습은 저 “함께 죽는 싸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진짜 책임을 져야 하는 이들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도록 설계된 미로 속에서 그 몫을 대신 떠맡은 이들은 짓눌리는 어깨를 못 견뎌 끝내 가짜 적과 싸우고야 만다. 그러나 진정 야만적이고 살인적인 것은 사용자가 지불해야 하는 최저임금인가, 아니면 상가건물주나 프랜차이즈 본사로 대변되는, 사용자의 사용자들인가? 온 사회가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 설탕이나 밀가루 따위를 팔아치우며 다져놓은 자본 위에, 사람값을 우습게 여겨가며 쌓아올린 자본을 움켜쥐고 온갖 고상은 다 떠는, 그러면서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해도 된다고 착각하는 대기업 일가들의 전근대적인 추태는 곪을 대로 곪아 터져 나오는 중이다. 그러나 고름이 나오건 말건, 그들만의 유토피아로 설계되어온 이 사회의 관절에 부역하며 이만하면 연옥이라 자족하는 이들도 많다. 그렇게 고장 난 채로 계속 굴러가는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함께 죽는 싸움”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다. 그러나 정작 이 싸움판에서 을들의 갈등을 꽃놀이패로 삼는 이들은 따로 있다.
칼럼 |
[2030 잠금해제] 함께 죽는 싸움은 계속되어야 하는가 / 이은지 |
문학평론가 유리병에 담긴 주스를 택배로 부칠 일이 있었다. 택배사 홈페이지에서 배송을 신청한 다음 날 기사가 수거해 간 주스는 배송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파손되었다. 나는 배상을 요구했지만 택배사의 답변은 유리병이 배송제한 품목에 해당하므로 배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택배기사가 수거할 때 해당 내용을 제대로 안내하지 않았다면 기사에게 책임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나의 ‘컴플레인’은 기사가 해결할 몫으로 고스란히 넘어갔다. 택배사 홈페이지에 다시 접속해보니 배송제한 품목에 대한 안내는 작은 버튼을 누르면 팝업창으로 뜨도록 되어 있었다. 인터넷으로 택배 배송을 신청하는 고객이 배송제한 품목을 안내받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다면 유리병을 배송하려 한 고객의 잘못과, 안내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택배기사의 잘못에 앞서 홈페이지를 그런 식으로 설계한 본사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파손된 유리병에 대해 본사 또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글을 고객센터에 남겼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 글을 처리해야 할 책임은 우리 동네 지부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담당자가 전화하여 그런 글을 남기면 어떡하느냐며 기사님과 해결하라고 항의하였다. 그 기사님은 집으로 찾아와서는, 유리병이 파손된 것이 자신의 과실임이 인정되면 시말서를 써야 한다며 그냥 당신 개인 돈으로 주스값을 물어주겠노라고 사정하였다. 나는 그만 배상받기를 포기했다. 이 배배 꼬인 과정 속에서 본사가 져야 할 몫의 책임을 지게 하는 일은 나도, 택배기사도, 관할지부도,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대기업에 잠식당한 일상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지만 온전히 해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본사들은 도대체 책임이라는 것을 질 줄 모른다. 그리고 이 책임은 다른 이의 몫으로 돌아간다. 장강명의 <현수동 빵집 삼국지>에서는 100m 남짓 되는 거리에 빵집 세 곳이 경쟁하며 모두가 죽어나는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 그중 두 곳은 프랜차이즈 빵집으로, 동네 특성이나 운영자 사정과 무관하게 내려오는 “본사 방침”을 따르느라 온 가족의 몸과 영혼이 축난다. 이렇게 빵집 주인들은 절대 본사는 피해 보지 않는 “함께 죽는 싸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최저임금 노동자의 사용자인 편의점주들이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고 나서는 모습은 저 “함께 죽는 싸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진짜 책임을 져야 하는 이들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도록 설계된 미로 속에서 그 몫을 대신 떠맡은 이들은 짓눌리는 어깨를 못 견뎌 끝내 가짜 적과 싸우고야 만다. 그러나 진정 야만적이고 살인적인 것은 사용자가 지불해야 하는 최저임금인가, 아니면 상가건물주나 프랜차이즈 본사로 대변되는, 사용자의 사용자들인가? 온 사회가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 설탕이나 밀가루 따위를 팔아치우며 다져놓은 자본 위에, 사람값을 우습게 여겨가며 쌓아올린 자본을 움켜쥐고 온갖 고상은 다 떠는, 그러면서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해도 된다고 착각하는 대기업 일가들의 전근대적인 추태는 곪을 대로 곪아 터져 나오는 중이다. 그러나 고름이 나오건 말건, 그들만의 유토피아로 설계되어온 이 사회의 관절에 부역하며 이만하면 연옥이라 자족하는 이들도 많다. 그렇게 고장 난 채로 계속 굴러가는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함께 죽는 싸움”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다. 그러나 정작 이 싸움판에서 을들의 갈등을 꽃놀이패로 삼는 이들은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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