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연희를 보러 갔다. 무당, 마을 사람들과 나까지 열명이 안 되는 사람이 신당에 모였다. 옛날 한옥처럼 생긴 작은 신당 안에는 향과 전 냄새가 났다. 색색이 한복이 걸려 있는 벽과 푸짐한 음식이 마련된 한쪽 벽 사이에서 무당과 보살은 각자 징과 장구, 꽹과리를 치면서 가락을 만들었다. 굿이 시작되자 내림굿을 받는 여성이 신상 앞에서 절을 했다. 그렇게 한참 절을 하고 일어나 제자리에서 위아래로 뛰었다. 가락이 고조됐을 때 부채를 들고 뛰던 그녀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부채를 던지고 소리 질렀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가 뭘!” 이어지는 눈물과 울분에 나도 따라 눈물이 흘렀다. 반나절 넘게 이어진 굿은 그들이 땀범벅이 된 다음에야 끝났다. ‘정상적인 여자 어른’이 되는 걸 견디지 못한, 혹은 견딜 수 없는 여성들이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육체적 고통으로 앓는 오래된 병이 있다.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도 낫지 않고 통증은 심해진다. 그런 그녀를 위한 큰 잔치가 열린다. 그녀는 무대에서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을 토로하고 춤을 춘다. 잔치에 온 사람들은 ‘신’이 나서 함께 춤추거나 낯설어진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미래를 점치고 지금을 해석한다. 신병을 앓던 여성이 내림굿을 하고 강신무 무당이 되는 일반적인 과정이다. 내림굿을 받는 그녀를 보면서 바리데기가 떠올랐다. 바리데기 이야기는 이렇다. 바리는 태어나자마자 딸이라는 이유로 왕족 부모에게서 버림받는다. 그래서 바리다. 바리가 자라서 성인이 될 무렵 부모는 병에 걸렸다. 저승문에 부모의 병을 낫게 할 약이 있는데, 죽은 자만 갈 수 있는 곳이라 아무도 가지 않으려 했다. 부모는 바리를 찾아가 사실 내가 너의 부모인데 병이 걸렸다고, 저승문에서 약을 가져와 줄 수 있겠냐고 묻는다. 바리는 약을 가지러 저승문으로 갔다. 저승문에 있던 문지기는 약을 가져가는 대신 자기 아이를 낳고 살림을 해야 한다고 했고, 그의 조건대로 바리는 저승에서 9년을 살다가 약을 가지고 이승으로 온다. 약을 먹은 부모는 병이 나았다. 부모가 왕국으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바리는 저승으로 가는 길목으로 떠났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로 이승과 저승 사이의 다리, 경계에 선다. 많은 무당이 정성 들여 기도하는 존재가 바로 최초의 무당, 무당의 조상 바리데기다. 오래전 무당은 국가, 제도정치, 제도예술, 제도종교에서 탈락된 여성이 말하고 연대하고 춤출 수 있는, 기생을 제외하고 유일한 직업이었다. 언어를 발언할 공간이 없던 그녀는 입에서 입으로 즉흥적인 수다로 이야기를 전하고 무가를 부르면서 한과 넋과 흥을 나눴다. 바리데기가 저승문에 도착했던 것처럼 신병을 앓던 그녀는 죽음의 감촉을 느끼면서 ‘나’라는 환상이 부서지는 통과의례를 겪는다. 나라는 환상 때문에 듣지 못했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제련되는 과정이다. 누군가를 대상으로 밀쳐냄으로써 나 자신을 신격화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해체함으로써 나와 타자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음을 응시하는 거다. 그녀가 굿을 통해 신나는 비명을 입 밖으로 토해내고 숨 쉬고 다시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은 내가 내 언어를 찾아가며 글을 썼던 과정과 닿아 있었다. 그들의 말이 계속 들리면 좋겠다. 무엇이 들려도 두렵지 않으면 좋겠다.
칼럼 |
[2030 잠금해제] 바리 / 홍승희 |
예술가 연희를 보러 갔다. 무당, 마을 사람들과 나까지 열명이 안 되는 사람이 신당에 모였다. 옛날 한옥처럼 생긴 작은 신당 안에는 향과 전 냄새가 났다. 색색이 한복이 걸려 있는 벽과 푸짐한 음식이 마련된 한쪽 벽 사이에서 무당과 보살은 각자 징과 장구, 꽹과리를 치면서 가락을 만들었다. 굿이 시작되자 내림굿을 받는 여성이 신상 앞에서 절을 했다. 그렇게 한참 절을 하고 일어나 제자리에서 위아래로 뛰었다. 가락이 고조됐을 때 부채를 들고 뛰던 그녀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부채를 던지고 소리 질렀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가 뭘!” 이어지는 눈물과 울분에 나도 따라 눈물이 흘렀다. 반나절 넘게 이어진 굿은 그들이 땀범벅이 된 다음에야 끝났다. ‘정상적인 여자 어른’이 되는 걸 견디지 못한, 혹은 견딜 수 없는 여성들이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육체적 고통으로 앓는 오래된 병이 있다.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도 낫지 않고 통증은 심해진다. 그런 그녀를 위한 큰 잔치가 열린다. 그녀는 무대에서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을 토로하고 춤을 춘다. 잔치에 온 사람들은 ‘신’이 나서 함께 춤추거나 낯설어진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미래를 점치고 지금을 해석한다. 신병을 앓던 여성이 내림굿을 하고 강신무 무당이 되는 일반적인 과정이다. 내림굿을 받는 그녀를 보면서 바리데기가 떠올랐다. 바리데기 이야기는 이렇다. 바리는 태어나자마자 딸이라는 이유로 왕족 부모에게서 버림받는다. 그래서 바리다. 바리가 자라서 성인이 될 무렵 부모는 병에 걸렸다. 저승문에 부모의 병을 낫게 할 약이 있는데, 죽은 자만 갈 수 있는 곳이라 아무도 가지 않으려 했다. 부모는 바리를 찾아가 사실 내가 너의 부모인데 병이 걸렸다고, 저승문에서 약을 가져와 줄 수 있겠냐고 묻는다. 바리는 약을 가지러 저승문으로 갔다. 저승문에 있던 문지기는 약을 가져가는 대신 자기 아이를 낳고 살림을 해야 한다고 했고, 그의 조건대로 바리는 저승에서 9년을 살다가 약을 가지고 이승으로 온다. 약을 먹은 부모는 병이 나았다. 부모가 왕국으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바리는 저승으로 가는 길목으로 떠났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로 이승과 저승 사이의 다리, 경계에 선다. 많은 무당이 정성 들여 기도하는 존재가 바로 최초의 무당, 무당의 조상 바리데기다. 오래전 무당은 국가, 제도정치, 제도예술, 제도종교에서 탈락된 여성이 말하고 연대하고 춤출 수 있는, 기생을 제외하고 유일한 직업이었다. 언어를 발언할 공간이 없던 그녀는 입에서 입으로 즉흥적인 수다로 이야기를 전하고 무가를 부르면서 한과 넋과 흥을 나눴다. 바리데기가 저승문에 도착했던 것처럼 신병을 앓던 그녀는 죽음의 감촉을 느끼면서 ‘나’라는 환상이 부서지는 통과의례를 겪는다. 나라는 환상 때문에 듣지 못했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제련되는 과정이다. 누군가를 대상으로 밀쳐냄으로써 나 자신을 신격화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해체함으로써 나와 타자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음을 응시하는 거다. 그녀가 굿을 통해 신나는 비명을 입 밖으로 토해내고 숨 쉬고 다시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은 내가 내 언어를 찾아가며 글을 썼던 과정과 닿아 있었다. 그들의 말이 계속 들리면 좋겠다. 무엇이 들려도 두렵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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