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09.02 17:37 수정 : 2018.09.02 19:12

이은지
문학평론가

지난 주말, 더위가 한풀 꺾이고 오랜만에 찾은 서울 광화문 일대는 그야말로 집회의 천국이었다. 태극기와 성조기와 군복으로 요약될 법한 무리가 일으키는 크고 작은 소용돌이는 우습게만 보아 넘기기에는 제법 비장함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하였다.

정치가 미처 포섭하지 못하는 현실의 에너지가 분출하는 장소가 광장이지 않은가. 광장을 지배하는 에너지는 온전히 정의되거나 가치를 판단할 수 없는 유동적인 것이므로, 그것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광장을 지배하는 에너지가 사회적 규범 이전의 차원에 속한다는 점에서, 광장은 우리 정치의 궁극적 준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소 귀족주의적인 냄새가 나긴 하지만 스페인의 사상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20세기 초 대중의 출현을 ‘과대민주주의’라고 표현한 것은 새겨둘 만하다. 대중은 소수의 대리인을 통하기보다 직접 행동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관철하기 때문이다. 가세트는 당시의 발전된 문명을 천혜의 자연과 같이 당연시하며 권리를 요구하기만 하는 대중을 ‘야만인’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정치를 대중이 갈등에 참여하는 ‘방식’과, 대중과 갈등의 ‘관계’를 관리하는 행위로 정의한 바 있다. 사적 영역의 갈등을 민주적 절차를 통해 공적인 논의로 전환한 뒤, 시민들이 참여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갈등을 ‘사회화’하는 것이 정치의 요체라는 논리다. 사적 영역에서의 갈등은 강자에게 유리하게 해결되기 마련이므로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갈등을 사회화하게 되면 보다 많은 사람이 이에 참여함으로써 힘의 균형이 변하게 되어, 불평등한 해결을 최대한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샤츠슈나이더는 이처럼 갈등을 사회화하는 과정에서 정당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정당은 소수의 이익집단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도록 적절한 정책을 고안함으로써 대중이 갈등 문제에 공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힘의 불균형이 해소되지 못할 때, 약자들이 스스로 갈등을 사회화하고자 활용하는 공간이 바로 광장이다. 그렇다면 광장이 상시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는 역설적이게도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인 셈이다.

광장은 갈등의 공평한 해결이 절박한 이들에게 허락된 유일하고 예외적인 정치적 채널인 셈이다. 정당 및 정부는 민주주의라는 “평범한 사람들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고안된 정치체제”의 기구로서, 이 채널을 통해 호소하는 목소리를 공적으로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흡수하고 통합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거꾸로 자신들의 허약해진 입지를 다지는 데 이 채널을 동원하는 퇴행적인 제스처가 정당 차원에서 주도되고 있다면,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그런 이유에서 지난 주말의 광화문 일대는 엄밀히 말해 광장으로 정의될 수 없어 보였다. 그곳은 약자를 약자로만 내모는 힘의 불균형을 볼모로 삼아 이익을 추구해온 이들의 프레임에 사로잡힌,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이처럼 광장이 ‘사유화’된 책임은 이를 주도하는 이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공적인 논의를 설계할 능력과 의지가 없는 정치 집단 전체에 책임이 있다.

서울시청 앞 광장, 쌍용차 사망 해고자 추모 분향소와 ‘정미홍 애국 열사’ 추모 분향소가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세워져 있는 기괴한 모습은 그런 무능력과 무책임이 연출한 악몽과도 같았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2030 리스펙트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