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19세기 영국의 비평가이자 사상가인 존 러스킨은 1864년 도서관 건립 기금 조성을 위한 강연에서 독서의 미덕을 역설한다. 이 강연에서 그는 산업화로 인한 물질적 풍요 속에 출세 지향적으로 일변하는 사회를 안타까워하며 오로지 출세만을 위한 교제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배움에 힘쓰며 스스로의 능력을 신장할 수 있는 교제, 즉 독서를 권장하고 있다. 러스킨은 서가를 위대한 왕과 정치가들이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귀 기울이고 지혜를 나눠 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곳에 비유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는 일정한 신분이 부여되어 있는 데서 알아차릴 수 있듯이, 그들의 깨달음을 나눠 갖기 위해서는 그들이 깨달음을 얻고 최상의 형태로 보존하기까지 들인 노력에 준하는 수고를 마땅히 들여야 한다. 따라서 러스킨은 독서란 “그들의 글에서 여러분 자신의 생각을 찾는 작업”이 아니라고 못박는다. 독자는 책 속 깊숙이 숨겨져 있는 저자의 사상을 금광 채굴하듯이 파고들어야 한다. 흥미롭게도 이 강연이 실린 책의 프랑스어판 서문을 쓴 프루스트는 이러한 러스킨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가 보기에 책을 읽는 것과 친구를 사귀는 것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독서는 대화적이기는커녕 철저히 고독을 바탕으로 성립한다. 독서 끝에 남는 것은 저자의 사상이 아니라 독자의 내면에 지펴진 정신적 자극이다. 프루스트에게 독서는 독자가 자기 자신과 내밀하게 접속하도록 인도해주는 “마법 열쇠”와 같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정신의 개인적 삶에 눈을 뜨게 해주는 대신 그 삶을 대치하려 한다면 독서는 위험해진다”. 즉 독서의 미덕은 곧 독서의 한계이기도 하다. 사르트르의 <구토>에 등장하는 독서광은 이러한 독서의 한계를 몸소 보여준다. 그는 도서관의 서가에 꽂힌 책을 알파벳 차례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무모한 계획을 실천하고 있다. 모든 책을 섭렵한 뒤에 그것을 바탕으로 어떤 대단한 모험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자신의 견해가 어떤 저자가 쓴 구절과 일치하기라도 하면 황홀해하는 그는 주변의 모든 것을 책에서 읽은 관념을 통해서만 인식한다. 그는 자신의 삶을 독서로 대체하는 사람이다. 독서광은 권여선의 <이모>에도 등장한다. 일찍이 객사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평생 가족들 뒷바라지만 하던 이모는 말년에 돌연 잠적한다. 세속의 짐을 모두 정리한 그녀의 중요한 일과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이다. 매일 도서관에 들러 그날 고른 책을 그날 꼬박 다 읽을 때, 삶의 기막힌 조화를 피해 숨어든 고독은 견딜 만한 것으로 변모한다. 과거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히게만 하던 고독의 시간은 책을 읽으면서부터는 “묽은 죽처럼 흘러” 그녀로 하여금 시간에 소진되지 않게 해준다. 그녀는 독서를 통해 비로소 그녀의 삶을 살게 되었다. <구토>의 독서광이 러스킨의 주장을 뒷받침한다면, <이모>의 그녀는 프루스트의 생각을 반영한다. 독서를 둘러싼 이처럼 상반된 견해와 사례는 독서가 얼마나 까다로운 행위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만큼 독서를 미더운 것으로 만들어준다. 자신을 잃게 하는 무수한 매체 속에서 자신을 상기시켜주는 매체로서 책이 여전히 값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책이 주는 체험은 당장 그럴듯하게 전시하고 소비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기꺼이 감수한 개인의 내면에 고유한 풍요를 지원한다. 독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가공되어온 개인에게 전혀 다른 물질성을 허용한다.
칼럼 |
[2030 리스펙트] 독서의 미덕과 한계 / 이은지 |
문학평론가 19세기 영국의 비평가이자 사상가인 존 러스킨은 1864년 도서관 건립 기금 조성을 위한 강연에서 독서의 미덕을 역설한다. 이 강연에서 그는 산업화로 인한 물질적 풍요 속에 출세 지향적으로 일변하는 사회를 안타까워하며 오로지 출세만을 위한 교제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배움에 힘쓰며 스스로의 능력을 신장할 수 있는 교제, 즉 독서를 권장하고 있다. 러스킨은 서가를 위대한 왕과 정치가들이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귀 기울이고 지혜를 나눠 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곳에 비유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는 일정한 신분이 부여되어 있는 데서 알아차릴 수 있듯이, 그들의 깨달음을 나눠 갖기 위해서는 그들이 깨달음을 얻고 최상의 형태로 보존하기까지 들인 노력에 준하는 수고를 마땅히 들여야 한다. 따라서 러스킨은 독서란 “그들의 글에서 여러분 자신의 생각을 찾는 작업”이 아니라고 못박는다. 독자는 책 속 깊숙이 숨겨져 있는 저자의 사상을 금광 채굴하듯이 파고들어야 한다. 흥미롭게도 이 강연이 실린 책의 프랑스어판 서문을 쓴 프루스트는 이러한 러스킨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가 보기에 책을 읽는 것과 친구를 사귀는 것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독서는 대화적이기는커녕 철저히 고독을 바탕으로 성립한다. 독서 끝에 남는 것은 저자의 사상이 아니라 독자의 내면에 지펴진 정신적 자극이다. 프루스트에게 독서는 독자가 자기 자신과 내밀하게 접속하도록 인도해주는 “마법 열쇠”와 같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정신의 개인적 삶에 눈을 뜨게 해주는 대신 그 삶을 대치하려 한다면 독서는 위험해진다”. 즉 독서의 미덕은 곧 독서의 한계이기도 하다. 사르트르의 <구토>에 등장하는 독서광은 이러한 독서의 한계를 몸소 보여준다. 그는 도서관의 서가에 꽂힌 책을 알파벳 차례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무모한 계획을 실천하고 있다. 모든 책을 섭렵한 뒤에 그것을 바탕으로 어떤 대단한 모험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자신의 견해가 어떤 저자가 쓴 구절과 일치하기라도 하면 황홀해하는 그는 주변의 모든 것을 책에서 읽은 관념을 통해서만 인식한다. 그는 자신의 삶을 독서로 대체하는 사람이다. 독서광은 권여선의 <이모>에도 등장한다. 일찍이 객사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평생 가족들 뒷바라지만 하던 이모는 말년에 돌연 잠적한다. 세속의 짐을 모두 정리한 그녀의 중요한 일과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이다. 매일 도서관에 들러 그날 고른 책을 그날 꼬박 다 읽을 때, 삶의 기막힌 조화를 피해 숨어든 고독은 견딜 만한 것으로 변모한다. 과거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히게만 하던 고독의 시간은 책을 읽으면서부터는 “묽은 죽처럼 흘러” 그녀로 하여금 시간에 소진되지 않게 해준다. 그녀는 독서를 통해 비로소 그녀의 삶을 살게 되었다. <구토>의 독서광이 러스킨의 주장을 뒷받침한다면, <이모>의 그녀는 프루스트의 생각을 반영한다. 독서를 둘러싼 이처럼 상반된 견해와 사례는 독서가 얼마나 까다로운 행위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만큼 독서를 미더운 것으로 만들어준다. 자신을 잃게 하는 무수한 매체 속에서 자신을 상기시켜주는 매체로서 책이 여전히 값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책이 주는 체험은 당장 그럴듯하게 전시하고 소비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기꺼이 감수한 개인의 내면에 고유한 풍요를 지원한다. 독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가공되어온 개인에게 전혀 다른 물질성을 허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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