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슬프게도 이게 내 인생>은 최근 내가 유일하게 챙겨 보는 웹툰으로, 디자인을 전공한 작가와 그 친구들이 겪은 직장 내 갑질을 비롯한 업무상의 갖은 불편부당함을 소재로 다룬다. 급여는 최저임금 수준에, 추가수당 없이 야근이나 철야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업무프로세스는 지극히 비효율적이며, 공사 구분 없이 무례한 동료들이 수시로 출몰한다. 이 웹툰 특유의 ‘빻은’ 유머는 공감만큼이나 반발도 불러일으키지만 웹툰을 좀 더 들여다보면 말하고자 하는 바와 말하는 방식 간에 완벽한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토록 처참한 노동조건 하에서 일하고 있노라면 누구도 정신을 빻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경험을 빻지 않은 온건한 형태로 제시하는 것은 유사한 고통을 겪는 직장인들에게 실례가 될 만큼, 소규모 영업장에서 관성적으로 이루어지는 행태들은 가히 충격적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노동에 대한 보상을 노동자가 자족하는 것이 적극 권장된다. 일을 너무 잘했더니 타 부서에서 수시로 일손을 빌려가 초주검이 되었다는 친구의 일화는, 회사에서 절대 일을 잘하면 안 된다는 독자들의 간증을 통해 절절히 뒷받침된다. 탕비실을 털고 화장실을 자주 가는 것, 점심시간에 온전히 휴식하기 위해 혼밥을 하는 것마저도 그러한 셈법의 일환으로 지지받는다. 그 와중에 작가가 자주 지각하는 것을 자조적으로 언급한 것을 두고 일부 독자들이 지나친 근무태만이라고 지적하는 모습은 눈길을 끈다. 물론 잦은 지각 자체는 두둔될 수 없겠지만 최소한의 품위 유지조차 어려운 수준의 근무 환경에서라면 왠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가 기함해야 하는 지점은 작가의 잦은 지각이 아니라 그마저도 그럴 만하다고 수긍하게 만드는 잘못된 노동조건일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산업화가 본격화되던 근대사회를 노동 윤리가 지배하는 ‘생산자 사회’로 정의한다. 자본이 팽창하기 위해 산업화 이전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노동인력으로 적극 유치하는 과정에서 일하지 않는 자는 굶거나 죽어야 한다는 식의 노동 윤리가 정착된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노동 윤리는 노동자들에게 죽지 않을 만큼만 대가를 지불해도 좋을 근거로 작동하였다. 마찬가지로 근무 환경에 상관없이 근무가 태만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은 열악한 근무 환경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그것이 존속하는 데 불가피하게 공조한다. 한편 작가는 푼돈으로 쥐어진 급여마저 각종 생존비용으로 빠져나가 최소한의 소비만이 허락되는 현실을 서러워한다. 제대로 된 일상마저도 소비의 방식으로밖에는 영위할 수 없다. 바우만이 현대사회를 소비 윤리가 지배하는 ‘소비자 사회’로 적시하였듯이, 오늘날 우리는 소비자일 때 비로소 인간다울 수 있다. 소비자 사회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소비자로 기능할 수 없는 사람들은 끔찍한 결핍에 시달린다. 이 결핍을 충족시키기는커녕 당장 생계를 보전하기 위한 소비에 떠밀려 사람들은 끔찍한 노동조건을 감수하는 악순환에 내몰린다. 노동 윤리와 소비 윤리로 양쪽에서 고통받는 우리 시대의 영혼들을 이 웹툰은 특유의 재치로 위무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을 자조하고 공유함으로써 다시금 그것을 견뎌낼 힘을 창출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착취의 연쇄에 몸서리쳐진다. 자신의 인생을 자조할 여력밖에 남지 않은 사람들이 이 사회를 견디기 위한 한줌의 아편마저도 그들 자신이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칼럼 |
[2030 리스펙트] 슬프지만 자조할 수밖에 / 이은지 |
문학평론가 <슬프게도 이게 내 인생>은 최근 내가 유일하게 챙겨 보는 웹툰으로, 디자인을 전공한 작가와 그 친구들이 겪은 직장 내 갑질을 비롯한 업무상의 갖은 불편부당함을 소재로 다룬다. 급여는 최저임금 수준에, 추가수당 없이 야근이나 철야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업무프로세스는 지극히 비효율적이며, 공사 구분 없이 무례한 동료들이 수시로 출몰한다. 이 웹툰 특유의 ‘빻은’ 유머는 공감만큼이나 반발도 불러일으키지만 웹툰을 좀 더 들여다보면 말하고자 하는 바와 말하는 방식 간에 완벽한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토록 처참한 노동조건 하에서 일하고 있노라면 누구도 정신을 빻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경험을 빻지 않은 온건한 형태로 제시하는 것은 유사한 고통을 겪는 직장인들에게 실례가 될 만큼, 소규모 영업장에서 관성적으로 이루어지는 행태들은 가히 충격적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노동에 대한 보상을 노동자가 자족하는 것이 적극 권장된다. 일을 너무 잘했더니 타 부서에서 수시로 일손을 빌려가 초주검이 되었다는 친구의 일화는, 회사에서 절대 일을 잘하면 안 된다는 독자들의 간증을 통해 절절히 뒷받침된다. 탕비실을 털고 화장실을 자주 가는 것, 점심시간에 온전히 휴식하기 위해 혼밥을 하는 것마저도 그러한 셈법의 일환으로 지지받는다. 그 와중에 작가가 자주 지각하는 것을 자조적으로 언급한 것을 두고 일부 독자들이 지나친 근무태만이라고 지적하는 모습은 눈길을 끈다. 물론 잦은 지각 자체는 두둔될 수 없겠지만 최소한의 품위 유지조차 어려운 수준의 근무 환경에서라면 왠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가 기함해야 하는 지점은 작가의 잦은 지각이 아니라 그마저도 그럴 만하다고 수긍하게 만드는 잘못된 노동조건일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산업화가 본격화되던 근대사회를 노동 윤리가 지배하는 ‘생산자 사회’로 정의한다. 자본이 팽창하기 위해 산업화 이전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노동인력으로 적극 유치하는 과정에서 일하지 않는 자는 굶거나 죽어야 한다는 식의 노동 윤리가 정착된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노동 윤리는 노동자들에게 죽지 않을 만큼만 대가를 지불해도 좋을 근거로 작동하였다. 마찬가지로 근무 환경에 상관없이 근무가 태만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은 열악한 근무 환경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그것이 존속하는 데 불가피하게 공조한다. 한편 작가는 푼돈으로 쥐어진 급여마저 각종 생존비용으로 빠져나가 최소한의 소비만이 허락되는 현실을 서러워한다. 제대로 된 일상마저도 소비의 방식으로밖에는 영위할 수 없다. 바우만이 현대사회를 소비 윤리가 지배하는 ‘소비자 사회’로 적시하였듯이, 오늘날 우리는 소비자일 때 비로소 인간다울 수 있다. 소비자 사회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소비자로 기능할 수 없는 사람들은 끔찍한 결핍에 시달린다. 이 결핍을 충족시키기는커녕 당장 생계를 보전하기 위한 소비에 떠밀려 사람들은 끔찍한 노동조건을 감수하는 악순환에 내몰린다. 노동 윤리와 소비 윤리로 양쪽에서 고통받는 우리 시대의 영혼들을 이 웹툰은 특유의 재치로 위무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을 자조하고 공유함으로써 다시금 그것을 견뎌낼 힘을 창출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착취의 연쇄에 몸서리쳐진다. 자신의 인생을 자조할 여력밖에 남지 않은 사람들이 이 사회를 견디기 위한 한줌의 아편마저도 그들 자신이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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