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17 18:21
수정 : 2019.11.18 02:36
곽승희 ㅣ 독립출판 <월간퇴사> 제작자
회사 근처 사회주택 입주자 모집 공고 내용에 깜짝 놀랐다. ‘여성 전용 신축 원룸, 월세 20만~30만원에 실보증금 500만원!’ 입주자 간 관계 맺기와 성장을 위한 임파워링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었다. 이런 집이라면 나도 살 수 있지 않을까? 2년 전 월세 생활 당시 같은 지역 5평 방에 보증금 1천만원, 월세 50만원으로 들어갔다. 일반적인 원룸이었다. 건물 주인은 적당히 친절했고, 다른 층 사람들과는 얼굴 한번 보지 못했으며, 밤에는 건물 현관문 번호키와 방 도어록을 빛의 속도로 눌러댔다. 누가 뒤에서 나타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여성 1인가구를 위한 안심 사회주택’은 다르지 않을까. 기대를 품고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니 뇌가 거른 정보들이 눈에 들어왔다. 실제 보증금은 500만원 플러스 1천만원. 다만 1천만원은 무이자로 대출해주는 제도와 연결해준다고.
아…. 돈 때문에 자기비하를 하고 싶지 않지만, 뇌는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내려지는 사회적 평가를 떠올렸다. 30대 중반에 원룸 보증금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사람, 앞으로 꾸준히 안정적으로 소득을 벌 특별한 기술이나 자격증도 없는 사람. 그것이 알고 싶다, 그는 왜 이런 상황에 놓였을까. 경제관념이 없거나, 사치가 심하거나, 아직 철이 안 든 사람이라서? 내 지난날을 스캔해보니 아무래도 잦은 퇴사 및 마지막 퇴사 후 4대보험망 밖에서 일하며 꽤 긴 시간을 보낸 탓이 큰 것 같다. 헉. 설마 밀레니얼 세대를 향해 ‘욜로(YOLO) 살다 골로 간다’는 세간의 평가를 내가 직접 실현한 건…. 아, 집이 뭐라고 내 인생에서 가장 건강하게 성장한 2년의 시작점을 부정하는 단계까지 왔는지.
퇴사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특출하지 않게 10대와 20대를 보내고, 세상과 삶에 대한 나만의 기준 없이 회사원이 됐다. 회사라는 조직과 일에 대한 철학은 주식 투자 지식보다 적었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퇴사 후 조직 밖에서 내가 어떻게 일하는 사람인지 부딪쳐보는 시간을 충분히 보낸 덕이다. 또한 그런 시간을 보낼 사람이 많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를 운 좋은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그 운이 원룸 보증금을 모아둘 정도까지가 아니었다고 해서 내 과거 선택을 후회하고 싶지 않다.
더 열심히 살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당신이여, 후회는 우리 몫이 아니다. 돈을 더 많이 모으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탓하는 건 시간 낭비다. 물론 사랑하는 존재의 병원비를 대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면 일차적으로 자신을 원망하겠지만, 넓게 보자. 어차피 근로소득으로 자신의 삶을 ‘인간적’으로 영위하고, 가족 친지의 삶을 돕고, ‘인간적’인 집에서 거주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말이다.
퇴사를 후회하는 대신 퇴사로 더 나은 길을 찾았다고 스스로를 칭찬해줘야 한다. 현재의 곤궁함을 퇴사 탓으로 돌리면 뭘 하나. 어차피 퇴사하지 않고 한 회사에 오래 다녔어도 근로소득으로 집 사기란 불가능하다. 일과 조직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지 못한 채 여전히 불행한 회사원 생활을 지속했을 것이다. 정신승리 아니냐고? 맞다. 일단 정신이라도 승리해야, 현실에서도 싸워볼 만하지 않을까.
나다운 삶을 살기 위한 과정으로서 퇴사를 선택하고 동시에 안전하고 안정적인 주거 생활이 가능한 현실을 위해 뭘 해야 할까. 일단 정신승리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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