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08 18:25
수정 : 2019.12.09 02:35
이은지 ㅣ 문학평론가
얼마 전 지하철 내 임산부 배려석이 시행된 지 무려 7년이나 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해당 뉴스는 여전히 임산부 배려석에 임산부가 마음 놓고 앉지 못하는 실태를 점검하는가 하면, 임산부 배려석이 임산부에게 좀 더 돌아갈 수 있도록 지자체들이 내놓은 여러 아이디어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7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정책의 실태를 규명하고 시민들의 배려를 촉구하는 목소리는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도입 초기부터 말도 많았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도 실패한 정책이기 때문이다.
임산부 배려석은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의 인구 밀도를 자랑하는 서울 도심의 지하철 이용자 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 정책을 최초로 제안한 사람이 하루 종일 파김치가 되도록 일을 한 뒤에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빽빽한 지하철에 올라타 그곳에서 거의 유일하게 비어 있는 핑크색 좌석 앞에 서 있게 해보고 싶다. 그리하여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바로 그 자리에 앉고 싶은 마음과 내적으로 싸워야 하는 심리적 피로까지 겪게 된다면, 그는 자신이 얼마나 나쁜 정책을 만들었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나아가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상황이라면 그의 뉘우침은 갑절이 될 것이다.
임산부 배려석을 비롯하여 대중교통에 마련된 각종 노약자석은 겉으로는 ‘양보’나 ‘배려’와 같은 인륜적인 미풍양속을 내세우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시민 개개인의 양심에 의지하여 복지 수혜를 창출하려는 대단히 일차원적인 정책이다. 남의 눈치를 보고 욕먹지 않으려고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우게 하는 식으로 약자에 대한 복지 수혜 여부를 개개인의 양심에 떠넘겨버리다니, 실로 국가의 비양심이 아닌가? 이는 물이나 전기를 아껴 쓰고, 국산품을 애용하고, 과소비를 줄이자는 식으로 국가 발전에 국민을 대규모로 동원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겨온 전근대적이고 군사적인 발상의 연장이다.
임산부 배려석은 임산부의 교통 편의를 위한다는 본래의 취지가 무색하게, 임산부가 아닌데도 그 자리에 앉는 이들이 누구인지 감시하고 그 몰상식함을 질책하는 일종의 인민심판대로 전락해왔다. 언론 또한 이러한 프레임에 갇혀서 임산부 배려석이 정책적으로 성공했는지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누가 뻔뻔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둘러싼 의자 게임을 기사화하기에만 바빴다. 그러나 심판대에 오르고 손가락질 받아야 하는 것은 일반 시민들이 아니다. 겨우 지하철 좌석 하나 비워준 걸로 임산부를 위해 대단한 복지라도 제공한 양 생색을 내면서, 임산부는 아니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소임을 다하며 사회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다른 시민들의 도덕성을 질책하는 이 사회의 위선과 정부의 무책임함이야말로 손가락질 받아야 한다.
실효성 없는 임산부 배려석 대신 차라리 임산부가 자유롭게 택시비로 사용할 수 있는 ‘핑크카드’를 발급해주면 어떨까? 정말로 임산부가 자유롭고 안락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를 원한다면 그 정도는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급속도로 줄어드는 출산율에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치고 이 사회는 임산부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데 지나치게 인색하다. 최근에는 한술 더 떠서 임산부 뱃속 아이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달라고 감정에 호소하는 멘트를 지하철에서 틀어대고 있다. 카펫 하나 깔아주고 인정에 호소하는 식으로 복지를 체면치레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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