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22 18:01
수정 : 2019.12.23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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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시간제 정시 퇴근 장려 모니터 화면이 켜진 사무실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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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시간제 정시 퇴근 장려 모니터 화면이 켜진 사무실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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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승희 ㅣ
관악청년문화공간 신림동쓰리룸 총괄
관악의 청년사업 수행자 및 단체 활동가들과 월별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멤버들의 소속과 성격은 다양하다. ‘신림동쓰리룸’처럼 지방자치단체 청년정책과의 위탁을 받는 비영리법인 회사원, 민간 복지재단의 지원을 받은 사회복지사, 학교재단과 협업하는 1인 활동가, 지역 청년단체 대표, 청년 문화예술단체 디렉터, 지역 내 도시재생센터의 청년 실무자까지. 대부분 2030이고 청년 당사자이자 프로그램의 대상자, 청년정책 사업의 전문가이자 실행자로서의 정체성과 열정, 문제의식을 고루 갖고 있다.
그중 한사람을 이제 볼 수 없게 됐다. 지난달 모임에서 한달 휴직을 이야기했던 그는, 병원에서 1년간 무조건 쉬라는 말을 전해들었다. 과로로 인한 건강악화, 면역체계 이상으로 인한 몸의 변화 때문이다. 몇달 옆에서 지켜본 그는 믿음직한 중간관리자였고, 일에 대한 자부심으로 훌륭하게 업무를 처리했다. 그의 회사 내 조직문화를 지켜본 사람으로서 감히 단언하자면, 직장갑질119에 신고할 건은 아니었다. 다만 아직 안정적인 시스템이 만들어지지 않은 분야에서 일어나는, 슬프기 그지없는, 자기착취를 할 수밖에 없는 선구자의 사례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올여름부터 자기착취를 일삼았다. 순환근무 가능 인원이 적음에 따른 야근, 대관이나 지원 인력이 필요한 상황에서의 연장근무 등은 화폐자본으로 보상받을 수 없었다. 애초 내 월급에 수당은 편성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일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생긴다. 나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청년정책’ 분야에서 활동하는 많은 이들이 그렇다. 청년세대의 안정적인 사회 진입이 어느 때보다 늦어지는 상황에서 행정부는 이제 막 청년들을 만나러 다니는 중이다. 서울시와 경기도가 선제적으로 다양한 청년정책을 기획하나, 지자체 차원에선 이제 막 싹을 틔운 정도다. 이 분야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일했다. 아주 현실적으로는 올해 성과를 바탕으로 내년도 야근수당을 꼭 편성하고 싶었다. 나와 함께 일하는 90년대생 직원들이 좀더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어야 청년정책의 미래가 이어질 테니까.
번아웃, 건강악화로 퇴사하는 중간관리자 아래의 일반 사원이 어떻게 안정적인 장기근속 미래를 그릴 수 있을까. 이 그림을 사회로 확대해보면, 한국에서 미래를 그리지 못하는 청년세대의 좌절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일자리’에 취직해서, 회사 노동과 가사 노동을 동거인과 평등하게 분담하고, 삶의 의미를 완성하는 동년배나 선배 세대는 거의 멸종한 것 같다. 이 의심은 얼마 전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의 인터뷰 때문에 좀더 확고해졌다. 인터뷰는 그의 번아웃 뒤 인력 수급이 이뤄지지 않는 활동가판의 구조적 문제까지 함께 짚었다. 그런데 번아웃으로 인한 퇴사는 스타트업, 중소기업, 대기업, 공직사회 등 가릴 것 없이 자주 나오는 소재다.
주 6일 근무에서 2004년 주 5일로, 2018년 주 52시간 초과근무 금지로 법이 허용하는 근로시간이 줄어왔지만 현실에선 여전히
‘많은’ 이들이 ‘많이’ 일한다. 회사 컴퓨터가 꺼지면 집에서 밤샘하거나, 적은 기본급 때문에 야근을 자청한다. 근무시간이나 칼퇴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사회변화에 따라 인력이 필요한 곳에 좋은 일자리 생태계가 살아날 수 있도록 산업구조의 탄생, 성장, 노화를 고민하고 대책을 실행하는 사람은 대체 어디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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