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6.08 18:09
수정 : 2012.06.09 11:57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선배, 이번주 친절한 기자들 기사 좀 써주세요.”
“어? 난 친절한 기자가 아닌데?”
“선배가 친절한 기자가 아니라는 거 잘 알죠. 그런데 비비케이(BBK) 가짜편지 사건은 법조팀에서 선배가 제일 잘 아시잖아요.”
<한겨레> 토요판 담당 이정애 기자는 유쾌한 말투로 11장짜리 기사 청탁을 단숨에 끝내버렸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친절한 기자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한겨레> 편집국에서 비비케이 사건의 해묵은 스토리를 잘 알고 있는 기자 중 하나인 것도 맞습니다. 구구절절이 맞는 말만 하는데 딱히 반박할 게 없더이다. 저는 그렇게 ‘친절한 기자들’ 대열에 ‘문 닫고’ 합류했습니다. 하는 김에 사진도 제대로(?) 찍었습니다. 뽀로로와 돋보기가 대부분인 구태의연한 사진들이 싫어서 저는 ‘꼬마버스 타요’를 활용했습니다.(다섯살 난 제 아들놈 아이디어랍니다)
이제 본론입니다. 5년 전 얘기부터 꺼내겠습니다. 2007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고 대세론이 하늘을 찔렀지만, 비비케이 주가조작 사건에 이 후보가 연루됐다는 의혹도 함께 꿈틀거렸습니다. 비비케이의 대표 김경준씨가 주가조작 사건으로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고 미국으로 도피했다가 체포돼 징역을 살고 있었는데, 1990년대 후반 야인 시절 김씨의 동업자였던 이 후보가 이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특별취재팀의 일원으로 이 후보 검증의 최일선에 있었고, 입에서 단내 나게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의혹의 핵심인물인 김씨가 대선을 한달여 앞둔 11월16일, 국내로 송환됐고 검찰은 김씨를 상대로 관련 의혹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대세였던 이 후보에게는 최대 고비였던 셈이었지요.
그러나 검찰은 12월5일, 이 후보 관련 의혹을 모두 무혐의 처분했습니다. 더 이상 엠비(MB) 대세론을 저지할 변수는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도 못내 불안해서였을까요? 한나라당은 기획입국설을 주장하며 반격에 나섰습니다. 대선을 6일 앞둔 12월13일,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은 편지 한통을 공개합니다. 미국에서 김씨와 구치소 생활을 함께 했던 신경화씨가 썼다는 편지였습니다.
“나의 동지 경준에게… 이곳에 와 보니, 자네와 많이 고민하고 의논했던 일들이 확실히 잘못됐다고 생각하네. 자네가 ‘큰집’하고 어떤 약속을 했건 우리만 이용당하는 것이고.”
‘약속’은 뭐고 ‘큰집’은 무엇일까요. 직설은 없고 은유만 난무했지만, 한나라당은 ‘큰집’이란 참여정부 청와대를 뜻한다며 기획입국설의 확실한 물증이라고 방방 떴습니다.
이 대통령 당선 뒤 검찰은 수사에 착수했지만, ‘기획입국의 실체는 없다’며 수사를 끝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3월, 신경화씨의 동생 신명씨는 “그 편지는 형이 아닌 내가 썼다”며 기획입국설 자체가 조작된 것이라고 폭로했습니다. “미국에서 송환된 네 형을 다시 미국으로 돌려보내주겠다”는 대학교 교직원 양아무개씨의 권유로 그가 시키는 대로 편지를 작성했고, 그 편지가 홍 의원에게 흘러들어갔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가짜편지’가 어떻게 한나라당으로 흘러들어가게 됐는지 그 경위를 밝히라고 홍 의원을 압박했습니다. 지난 4월 19대 총선을 앞두고도 이런 ‘요구’가 계속되자 홍 의원 쪽은 신씨를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을 하게 됩니다. 천안교도소에서 잠자코 있던 김경준씨도 ‘가짜편지’ 자체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라며 뒤늦게 홍 의원과 신씨 등을 고소합니다. 가짜편지 사건의 진실을 다시 검찰이 수사하게 된 것이죠.
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지금까지 나름의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돈 문제 때문에 신씨가 없는 말을 떠들고 다닌다”며 의혹을 부인했던 양씨에게서 “신씨에게 가짜편지를 쓰게 했고 엠비캠프 상임특보였던 김병진(현 두원공대 총장)씨에게 전달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것입니다. 또 “그 편지를 누구한테서 받았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누누이 강조했던 홍 전 의원에게서는 “비비케이 대책팀장이었던 은진수 전 감사위원에게서 받았다”는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평면적으로는 ‘신명 → 양아무개 → 김병진 → 은진수 → 홍준표’라는 가짜편지의 흐름도가 완성된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궁금한 건 이 가짜편지 사건의 기획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신씨는 그동안 언론 인터뷰에서 이 사건의 배후로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이상득 전 의원 등을 거명했습니다. 검찰이 이 주장의 진위까지 판단하려 할까요? 아니면 명예훼손 여부를 따지는 데 그 부분까지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수사를 종결할까요? 친절한 기자 뺨치는 친절한 검사의 탄생을 기대하겠습니다.
김태규 사회부 법조팀 기자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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