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항복한 적도, 잘못을 뉘우친 적도 없는 후진적 부패의 상징이다. 추징금을 넘어 부패의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난 3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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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리뷰&프리뷰 다음주의 질문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대통령이라곤 한 사람만 봐온 터여서, 다른 이름의 대통령은 어색하기만 했다. 대통령 이름이 바뀌는 것은 이제 익숙해졌지만, 그 다른 이름의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이 30여년째 살아오는 길 곳곳에서 이렇게나 시시때때로 출몰할 줄은 또 몰랐다. 처음엔 어디서 어디로 물러가야 할 사람인지도 모른 채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구호와 현수막으로 접한 사람이었다. 몇 해 뒤엔 시위로 구속된 아들을 풀어내 보려 시골 아버지가 대통령의 사촌동생을 찾아갔다는 말을 들었다. 빈손으로는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기자 초년병 시절 국회에서 5공 비리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청문회를 취재하면서 비리의 규모와 권력욕의 잔혹함에 새삼 놀랐다. 그 뒤 그는 수사와 재판의 대상이 됐고, 이런저런 약속도 했다. 약속은 대부분 거짓말로 드러났다. 되돌아보면 그는 항복한 적도, 잘못을 뉘우친 적도 없다. 친인척 비리와 부정 축재 등으로 거센 비난에 몰린 1988년 11월, 그는 대국민 사과성명을 내어 부동산 4건과 금융자산 23억원 등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헌납한다던 서울 서초동 땅에는 지금 그의 큰아들이 소유한 출판사가 들어서 있다. 헌납 발표 3년 뒤 증여한 것이라고 한다. ‘전 재산’ 외에 숨겨둔 재산도 있었다. 1989년 야당은 경기도 안양시 관양동 토지가 그의 아내 명의로 가등기됐다고 폭로했다. 그 땅은 2006년 그의 딸에게 넘겨졌다. 뇌물수수와 내란 혐의로 검찰의 소환을 받았던 1995년 12월, 그는 집 앞 골목길에서 수하들을 뒤에 세우고 큰아들이 썼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제가 국가의 헌정질서를 문란케 한 범죄자라면 이러한 내란 세력과 야합해온 김영삼 대통령도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정면으로 반발했다. 그는 수천억원대 비자금 조성과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12·12 내란 혐의 등으로 사형을 구형받았지만, 법원은 “항장(降將)은 불살(不殺)”이라며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하지만 그는 재판 내내 항복은커녕 뭘 잘못했느냐는 태도였다. 1997년 말 사면으로 석방된 뒤, 그는 골프를 치고 여행을 다니며 십수년째 잘 산다. 그런 그를 ‘풍운의 세월을 보낸 노인’쯤으로 너그럽게 넘기지 못하는 것은, 그가 ‘지금 여기’ 우리 사회에 분명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후진적 부패의 상징이다. 그는 최고권력을 동원해 치부를 했다. 96년 검찰이 대충 계산한 것만도 9500억원을 기업에서 거둬 제 몫으로 2200여억원을 챙겼다. 그 돈은 복잡한 은닉 과정을 거쳐 자식들에게 이전된 것으로 드러났다. 다른 대통령들에게선 보기 어려운 행태다. 한두 사람도 아닌 친인척 상당수가 이 기회에 한몫 챙기자는 듯 앞다퉈 대통령을 판 돈벌이에 나선 것도, 집단탐욕을 부추긴 전두환 시대의 특징이다. 또 비자금의 부스러기는 두툼한 돈봉투와 이권으로 패거리들에게 나눠졌다. 그런 일이 의리나 보스의 풍모 따위로 찬양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부패와 정실은 그의 시대에 크게 창궐해 나쁜 유산이 됐다. 죄를 저지르고도 버티면 된다는 선례도 문제다. 1996년 검찰 수사 뒤에도 몇 차례 숨겨둔 재산이 논란이 되었지만, 그때마다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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