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러브 스토리>, 에릭 시걸 지음, 편집국 옮김
시사영어사, 1992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하여간, 미안해.” “거봐,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잖아.” “미안하다면 된 거 아냐!” 연인이나 부부 간에 흔한 대화다. 이때 오가는 것은 말이 아니라 미움과 분노. 인생고 중 하나가 미안한 감정을 주고받는 문제다.
‘미안’의 사유가 구조적 원인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고 구조에 대한 개인의 반응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실제 상황은 복잡 미묘하다. 마음과 판단이 제대로 정리된 사과가 어려운 이유다. 엘턴 존의 노래대로 “미안하다는 말이 제일 어려운 것 같다.”(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말로는 “미안”이지만 어감에 따라 “미안하지 않은 미안”도 많다. 면피, 내 불편 해소, 건성, 달래기, 위기 탈출용, 조롱, 습관적 감탄사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가식과 뻔뻔함을 사과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내가 제일 듣기 싫은 미안 관련 표현은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네가 불쾌했다면 미안해”다. 이럴 땐 차라리 “싸우자”는 게 예의다. 진짜 미안할 때는 할 말이 없거나 멀리서 오랫동안 미안해한다.
연인끼리 미안하다는 말은 또 다르다. 너무 사랑해서 말이 필요 없는 상태거나 죽도록 사랑해서 미안도 후회도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인생에서 며칠(?) 이상 일어나지 않고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아끼는 사람, 가까운 사람 사이일수록 “미안해”, “고마워”가 필요하다.
어렸을 적 읽었던 소설 중에 그때도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 구절이 있다. 유명한 문장일 경우 소외감마저 느낀다. 내가 보기엔 별로인데 왜들 좋다는 거야. <러브 스토리>의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아”(Love means not 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가 그 경우다. 미안하다는 말은 많이 할수록 좋은 거 아닌가?
‘sorry’는 미안, 유감, 후회, 안타까움, 안됐네요… 등 뜻이 많다.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 제니가 올리버에게, 올리버가 아버지에게 “사랑은…미안”을 말한다. 영어는 같은 문장인데 우리말 의미는 다르다. 영한 대역본인 이 책은 같은 뜻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다(인용한 구절은 내가 조금 고친 것이다).
<러브 스토리>의 연인들은 계급 차이 때문에 남자 주인공(올리버) 집안의 반대로 결혼에 어려움을 겪는다. 올리버가 제니에게 미안하다고 하자, 제니는 “사랑하는데 뭐가 미안해”라고 말한다.(169쪽) 마지막 페이지에서 제니가 죽자 올리버의 아버지는 “안됐구나”(I’m sorry)라고 말한다. 올리버는 아버지에게 “사랑은 미안해할 일을 하지 않는 겁니다”라며 원망스레 울먹인다.(243쪽)
최근 조금 의문이 풀렸다. ‘사랑’과 ‘미안’은 같은 말일 수도 무관할 수도 있다. 두 마음의 상호성은 평범한 사람들의, 어쩌지 못하는, 인간관계의 정치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친한 친구가 8년째 아프다. 심각한 병이지만 사회적 낙인이 심해 위로받기는커녕 변명과 ‘거짓말’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돈 잘 벌고 착하고 자랑스러운” 딸이었던 그녀는 걱정거리와 민폐로 ‘전락’했고 경력, 경제력, 인간관계 모든 것을 잃었다. 그녀의 고통을 지켜보며 인생을 배우는 나는 미안하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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