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마지막 잎새>, 오 헨리 지음, 이계순 옮김 청목, 1996
기후, 일조량, 건강은 상관성이 있다. 하지만 계절을 인생에 비유해 봄은 청소년, 가을은 중년이라는 식의 통념은 연령주의와 북반구 중심 사고의 합작이다. 남반구의 크리스마스는 여름이다. 그러니 나이 들수록 겨울을 쓸쓸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고 쓰고 있지만 실은 나도 앞으로 몇 개월이 심란하다.
읽을 때 머릿속에 영화가 함께 찍히는 소설이 있다. 예전에 이 작품을 읽었을 때는 휑할 정도로 분량이 짧았는데도, 나는 뉴욕의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허름한 아파트에서 11월 폐렴으로 죽어가는 젊은 화가(조안나)가 되어 낭만적인 죽음을 상상했다.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이 소설이 1905년 작이라는 것, 작가가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을 보냈고, 공금 횡령 행위로 체포되어 수감 생활 도중 글을 썼다는 것이다.(이 사건은 미스터리로 남았다.) 오 헨리는 당시 교도소 간수장이었던 ‘오린 헨리’에서 딴 필명이다. 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 윌리엄 시드니 포터라니….
이번엔 주인공이 바뀌었다. 새 주인공은 비바람 치는 겨울밤, 담벼락에 담쟁이덩굴 잎을 그리다가 죽은 예순 넘은 버먼이라는 화가다. “신발과 옷은 흠뻑 젖어서 얼음처럼 차갑구. 날씨가 그렇게 추운 날 밤에 도대체 어디를 갔다 오셨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어. 그러다가… 흩어진 화필과, 초록과 노랑 물감을 푼 팔레트를 발견한 거야…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지던 그날 밤, 버먼 할아버지가 저 자리에 그려 놓으셨던 거야.”(14~15쪽)
몇 해 전 10대에서 70대까지 성별로 열네개 그룹으로 나누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설문 결과를 본 적이 있다. 놀랍게도(?) 거의 모든 연령과 성별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내 대답 역시 그렇다. 여기서 “공부”는 10대를 억압하는 전형적인 공부라기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인생’을 원한다는 뜻일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내가 필요한 존재였다는 것, 무엇인가를 추구했다는 것, 나만의 세계가 있었다는 것 등 다양할 것이다.
60대 친구가 몇몇 있다. 돈과 학벌을 따지는 ‘속물’ 어른을 포함, 남들 보기에 비교적 ‘성공한’ 인생들이다. 그들 역시 공부 이야기를 제일 많이 한다. 자신은 이룬 것이 없다며, 가진 것이 없는 내게 말한다. “그래도 너는 책을 썼잖니, 나는 한 것이 없다.”
버먼이 그린 떨어지지 않는 잎새 덕분에 조안나의 생존 확률은 10분의 1에서 반반으로 높아졌다. 이 소설은 ‘희망’으로 널리 읽힌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다른 등장인물, 평생 무명화가에 진(gin)을 달고 살았던 술주정뱅이 버먼에게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이야기다. 생명을 살린 그림보다 걸작이 어디 있겠는가. 잎사귀 하나는 위대한 예술이 되었다. 그의 죽음은 보잘것없었던 삶까지 의미 있게 만들었다.
의욕, 삶의 방향, 목적. 사람은 결국 ‘무엇’ 때문에 산다. 삶의 의미는 인간이 묻는 것이 아니다. 삶이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는 몸부림이, 내가 생각하는 의미 있는 삶이다. 승부나 성공 패러다임과 달리 의미는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어서 아무도 속일 수 없다. 자신과 마주할 수밖에 없으니 인생에 몇 안 되는 정의다.(물론, ‘상식’적인 사회일 경우에만 그렇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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