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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1.27 19:12 수정 : 2012.02.17 13:41

지난 10일 경남 통영에 있는 자택에서 이수자(왼쪽)씨와 딸 윤정씨가 오길남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윤이상 부인 이수자씨 인터뷰
북한서 홀로나온 오길남씨
그 고통 이해는 하지만
더이상 윤이상을 팔지마라

집 앞선 날마다 규탄시위
고향서

“윤이상 선생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오셨습니까?”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씨와의 인터뷰는 처음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간 언론과의 접촉을 꺼려온 만큼, 가슴속에 담아뒀던 이야기를 속시원하게 펼쳐 보이겠다는 의지가 묻어나왔다. “더 이상 윤이상 이름을 팔아먹지 말라”, “우리도 가족이 8년 동안 흩어져 살아본 경험이 있어 오씨 가족의 송환을 위해 특별하게 신경썼다”는 대답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씨는 특히 지난해 11월3일 윤 선생의 기일에 보수단체 회원들이 집까지 찾아와 규탄대회를 연 것과 관련해 “고향 땅에 집 짓고 처음으로 영혼을 달래려 제사 준비 중이었는데 결국 펜션으로 옮겨가 제사를 지냈다”며 격한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씨와의 인터뷰는 지난 10일 통영 앞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딸 윤정씨 소유의 자택 응접실에서 3시간 남짓 진행됐다. (※ 표시된 부분은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곁들인 부분임.)

­오길남씨와 방수열 목사(통영현대교회)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그간 오길남씨 주장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은 건 역사가 정당함을 밝혀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너무 지나쳤다. 계속 조용히 있다간 저쪽 주장이 정당화될 거 아니냐.”

­논란의 계기는 1985년 독일 유학 도중 가족과 함께 입북했다가 혼자 탈북해 한국으로 온 ‘오길남 사건’이다. 오씨와의 인연은 어떻게 되나?

“윤 선생은 1977년 봄 독일 바트 고데스베르크에서 열린 한 국제회의에서 처음 본 것으로 기억한다.”

­윤 선생과 오씨는 이미 74년부터 독일 교민과 유학생을 중심으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회) 활동을 함께 하지 않았나?

“인간적으로 가까이서 그를 만난 게 그렇다는 얘기다. 언젠가 민건회 사람들 열 몇 명이 우리 집에 놀러와 불고기도 얻어먹고 갔다고 오씨가 말하는 거 같던데, 정확한 인상은 남아 있지 않다.”(※지난 92년 오씨가 한국으로 돌아온 뒤 ‘윤이상의 회유로 북한에 들어갔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자, 윤 선생은 ‘오길남 사건과 나’라는 제목의 친필 서한에서 오씨를 처음 만난 건 77년이라고 밝힌 바 있다. 반면 오씨는 75, 6년 무렵 윤 선생 집에서 민건 회의가 열렸고, 그날 자신이 윤 선생이 작곡한 ‘낙동강’을 부르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이후에도 계속 교류는 있었나?

“이런저런 자리에서 더러 만나기야 했겠지. 하지만 그리 친밀한 사이는 전혀 아니었다. 그러다가 북한에 다녀왔다고 불쑥 연락이 온 거다.”

­당시 상황은?

“86년 11월이다. 내가 먼저 전화를 받았다. 갑자기 ‘사모님, 저 오길남입니다. 제가 북에 가족 데리고 살러 갔다가 혼자 도망해 왔습니다’ 그러더라. 북쪽 사람들 속이고 도망나와 6개월 동안 독일 정보당국하고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조사받고 이제 나왔다고 하더라. 우리 선생님도 참 기가 막힌다 했다. 마침 며칠 후에 하노버에서 음악회가 열리니 그리로 찾아오라 하고 끊었다.”

­음악회 끝나고 만났나?

“음악회 뒤 만나 설명을 들었다. 급한 대로 잡비도 좀 쥐여주고, 서베를린으로 돌아가 알아보겠노라고 하고 일단 헤어졌다.”

­그다음엔?

“특별히 신경썼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유가 뭔지 아나? 우리 가족도 8년간 헤어져 산 경험이 있어 그 고통을 너무 잘 안다. 그때는 통독 이전이라 동베를린에 있는 북한 대사관에 직접 찾아가서 만났다. 아마 참사인가 누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씨 가족을 데리고 나오게 해달라, 꼭 부탁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당시 분위기로는 그 양반도 충분히 이해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됐나?

“대사관 양반이 본국에 다녀오기를 한참 기다렸더니, 나중에 독일로 돌아와서 전하는 말이 ‘선생님, 오길남 가족 못 데려온다’ 그러는 거야. 놀라서 ‘왜요?’라고 물었지. 그 양반이 말하기를 ‘오길남은 가족을 모두 데리고 이삿짐 꾸려 북한 공민으로 들어갔다. 그랬는데 자기 혼자 도망와 미국 정보당국 조사까지 받았으니 조국의 명예를 모욕한 거다’ 이러더라구.”

­나중엔 오씨 부인의 편지와 사진, 육성 테이프까지 전달해줬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북쪽에 오씨의 딱한 처지를 전하며 송환 요청했다. 그나마 편지나 사진, 육성 테이프라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사진과 육성 테이프 전해준 날 상황을 두고 오씨 주장과 크게 엇갈린다.

“아마 오씨가 북을 탈출하고 2~3년인가 지났을 무렵이다. 빨간 넥타이를 매고 찾아왔더라. 윤 선생과 나, 오씨가 아랫방에 모여 앉아 카세트를 틀었다. 듣고 있자니 눈물이 마구 흐르더라. 오씨 부인은 ‘우리 걱정하지 말고 잘 살라’고 했고, 아버지를 그리는 아이들 목소리도 담겼다. 옆에 앉은 윤 선생도 무척 슬퍼했다. 그런데 오씨는 피식 웃더니 느닷없이 ‘나는 우리 아이들이 이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못생겼구나’ 이러는 거야.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짐작하겠나? 눈물은커녕 ‘선생님, 저 가족 찾는 거 단념했습니다’ 하더라구. 그 소리 듣더니 윤 선생이 불같이 화를 냈다. 다시는 얼씬거리지도 말라고 호통을 쳐서 보냈다.”(※오씨는 상당히 다른 주장을 펴고 있다. ‘가족을 살려둔 것이 누구 덕인 줄 아느냐? 내 말을 듣지 않고 경솔한 짓을 하면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윤 선생이 말했다는 게 오씨 주장이다.)

­북쪽에서 오씨 부인 사진과 테이프 내줄 때 상황을 좀더 자세하게 얘기해달라.

“기회 있을 때마다 오씨 처지 이해해 달라고 부탁하니 그쪽에서도 난감했겠지. 나중엔 최소한 사진이라도 우선 전해줄 수 있느냐고 했다. 결국 그건 거절 못하더라. 오씨가 북한 탈출했을 무렵엔 한 3년간쯤 우리도 김일성 주석을 직접 만날 기회가 없었다. 북한에서 음악회가 열려서 갔더니, 참사 하나가 계속 따라다니면서 ‘오길남 얘기는 꺼내지 말라’고 당부하더라. 오씨가 독일로 돌아와 북한 사회에 대해 너무 부정적으로 선전하고 다니고 있어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는 분위기였다.”

­그 뒤에도 오씨 소식은 간혹 들었나?

“오씨 심리상태가 좋지 않다는 얘기는 간혹 들리더라. 술 마시고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전화해 울다가 협박하다가, 말이 아니었다고 들었다. 그 양반도 오죽 힘들었겠나. 이해는 간다. 그러다가 92년인가 느닷없이 본 주재 한국 대사관에 자수한 뒤 한국 들어와 조서 쓰고 큼지막하게 인터뷰했잖아. 윤이상이 자기를 회유해서 북에 가도록 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더라. 어이가 없었다. 처음엔 가족 팔아먹고, 나중엔 윤이상 팔고 산다. 더 이상 윤이상이란 이름 팔아먹지 마라. 우리만큼 오씨 가족 송환 위해 애쓴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라. 그런데도 이런 모욕을.”

이씨는 북에 남은 오씨 가족 송환을 위해 윤 선생과 자신이 끝까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사진하고 테이프라도 구해다 준 거, 그건 뭐 쉬운 일이었는 줄 아나. 그거라도 하나 얻어오려고 눈치보고 간청했는데, 그걸 되레 윤이상 잡아먹는 용도로 쓸 줄이야.” 잔잔하던 목소리에도 잔뜩 힘이 들어갔다.

오길남씨가 북에 두고 온 부인 신숙자(왼쪽)씨와 두 딸 혜원(오른쪽)·규원. 오씨는 1991년 윤이상이 북한 관계자에게서 이 사진을 구해 자신에게 전해줬다고 밝혔다. 오길남씨 제공
­쟁점은 두가지다. 도망나온 오씨한테 북한 가족 곁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야단쳤다는 것과, 애초에 처음 북한에 가라고 회유했다는 것. 이제 오씨가 가족과 함께 북한에 살러 들어간 85년 얘기를 해보자. 오씨는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가게 된 게 전적으로 윤 선생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윤 선생이 어떻게 가라 말라 할 수 있나. 동백림 사건 때 그리 말 못할 일을 몸소 겪었으면서. 그런 일을 왜 만들겠어.”

­오씨는 윤 선생이 편지까지 보내 권유했다고 주장한다.

“기가 막히다. 그런 일 없다. 백번 양보해서 만에 하나라도 윤 선생이 그런 생각을 가졌다 치자. 그리 중요한 일이라면 직접 말로 하지, 편지를 쓰겠나. 세살짜리 애도 아니고, 박사학위까지 받고 나이 50이 다 된 양반이 본인이 판단해서 가족들 데리고 세간 다 정리해 들어갔는데, 뭐가 회유고 뭐가 협박이란 건지.”(※이삿짐을 챙겨 북한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편지를 잃어버렸다는 게 오씨 주장이다.)

통영의 딸 논란이 커지는 과정에선 공안당국의 의중이 실린 흔적도 드러나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오씨의 저서 200권을 구입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를 통해 통영 지역 오피니언리더들에게 뿌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분위기 탓에 딸 윤정씨 소유의 집 앞에선 반대자들의 시위가 연일 끊이지 않고 있다. 기자가 찾은 날 오전에도 100여명이 집 앞에 몰려와 구호를 외치다 돌아갔다. 집 대문과 담벼락은 이들이 던진 달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윤이상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낸 친필 편지(오른쪽)와 이홍구 국무총리 명의의 답신.

­반대 시위가 계속되는 모양이다.

“한번은 외출하려는데 우리가 탄 차를 추격해서 막다른 언덕까지 내몰리기도 했다.”

이씨는 지난해 11월3일을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날로 꼽았다. 이날 ‘대한민국대청소 500만 야전군본부’(의장 지만원)란 이름의 단체 회원 50여명은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규탄대회를 열었다. 마침 이날은 1995년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난 윤 선생의 기일이었다.

­그날 상황을 좀 설명해 달라.

“소문엔 버스 다섯대 나눠 타고 통영에 데모하러 내려올 거라고 했다. 주변 사람들이 혹시 위험한 상황 벌어질 수 있으니 집에서 피하는 게 어떠냐고 그러더라. 그런데 그날이 바로 윤 선생 기일 아니냐. 고향 땅에 집 짓고 처음으로 영혼 달래겠다고 제사 준비 중이었는데. 하지만 견디다 견디다 못해 결국 집에선 제사 못 지내고 근처 펜션에 옮겨가서 지냈다. 우리 마음 이해하겠나.”

한동안 목이 메던 이씨가 감정을 추스르는 사이 옆에 앉은 딸 윤정씨가 잠시 얘기를 이어갔다. 화제는 동백림 사건으로 부모가 모두 서울에 잡혀온 뒤 남동생과 함께 독일에 남겨졌을 때의 아픈 기억으로 옮아갔다. “그때 나는 만 16살이었다. 독일에 네살 어린 동생과 둘이만 남았다. 아직도 가슴속에 응어리진 게 사람들이 그리도 무심하게 한순간에 등을 돌릴 수 있는가였다. 결국 부모 없이 기숙사로 보내졌다. 어린 나이에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다시 떠올리기도 싫다.” 이씨도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윤이상이란 사람은 어떤 인물인가?

“통영을 좋아해도 그리 좋아할 수가 없어. 머리맡에 큼지막한 통영 앞바다 사진을 평생 걸어두고 살았다. 일제 때 형무소살이도 했고, 해방 뒤 고아원도 하고 그러다 보니 민족의식이나 역사의식이 강했다.”

­윤이상이라는 인물이 갖는 이런 상징성 때문에 계속 논란에 휩싸인다고 보나?

“윤 선생은 명예도 높았다. 독일 대공로훈장도 받았고 현대음악 명예회원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와 함께 함부르크 자유예술원상도 받았다. 그런 사람 하나 배출하기가 얼마나 힘든 건데. 나라가 해준 거 하나도 없으면서.”

­한국 사회엔 여전히 섭섭한 모양이다.

“우리가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 겪은 뒤 독일로 돌아와서 그 모욕과 치욕을 씻어내는 데 자그마치 10년이 걸렸다. 그 시기에 윤 선생이 쓴 작품들은 하나같이 굉장히 강렬했다. 세월이 10년 정도 흐르고 나서야 작품세계가 조금 달라지더라. 평화와 사랑, 순수와 자비, 이런 게 배어나오더라. 이전 시기보다는 작품이 상당히 순화됐다. 조국은 깨어지고 두동강 났지만 동분서주하면서 음악으로 민족화합을 위해 정성껏 노력한 사람이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나?

“윤 선생 편지집을 정리해 출판할 생각이다. 지금까지 3분의 2 정도 정리를 마친 상태다.”

▶ ‘오길남 사건’의 진위와 상관없이 북한에 남겨진 것으로 알려진 오씨 가족이 돌아올 방법은 없을까? 현행 북한 법은 ‘공민’의 탈북은 어떠한 경우에도 금하고 있다. 오씨 가족은 자유로운 의사를 가지고 북한에 들어온 공민이라는 게 북쪽 입장이다. 북한 인권운동 단체들은 지난해 9월 현재 두 딸 혜원·규원씨는 평남 인근 통제구역에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히고 있다. 부인 신숙자씨의 생존 여부는 불투명하다.

통영/최우성 최우리 기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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