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1.27 19:25
수정 : 2012.04.18 09:46
|
1967년 동백림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법정에 선 윤이상(왼쪽 사진). 그해 12월13일 열린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2심에서 15년형, 3심에서 10년형으로 감형됐다. 오른쪽은 오길남씨가 독일 유학 시절 독일인 동료와 함께 찍은 사진. 윤이상기념관·오길남씨 제공
|
[토요판] 커버스토리
‘오길남 사건’의 역사적 뿌리
윤이상
중정 납치와 고문·무기징역
김영삼 정부의 전향 강요
끝내 남한사회와 화해 못해
오길남
입북·탈북 상처 큰 피해의식
수용소 생활 뒤에 긴 방랑
정보당국의 관리·통제 의심
윤이상, 모든 것의 시작
예나 지금이나 ‘윤이상 때리기’에서 드러나는 한가지 특징을 꼽자면, 그가 보인 구체적 행적의 진위를 가려내기보다는 윤이상이라는 존재가 갖는 의미를 강조하는 데서 주된 동력을 찾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신비화된 윤이상이 더욱 신비화된 윤이상을 무한복제하면서 우리 사회 일각에 분노와 공포를 확대재생산하는 꼴이다. “수사를 할수록 관련자들의 상부선은 윤이상에게 연결되더라. 윤이상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1967년 이른바 동백림 간첩단 사건 당시 수사관이 내뱉었다는 이 한마디야말로 이후 우리 사회에서 전개될 지루한 이야기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통영의 딸’ 논란의 주인공으로 취재 도중 만난 오길남씨는 “윤이상이란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 유럽 교민사회에 수많은 친북 지식인을 양성한 씨앗”이라 주장했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 홍보팀장을 맡고 있는 김미영 세이지코리아 대표도 “수없이 많은 친북 지식인을 양산하게 만든 친북 교두보이자 한국 지성계가 노출된 데드락”이라는 평가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갔다. ‘절대적 지위→친북 성향→모든 것의 책임’이라는 단순하지만, 고래 심줄과도 같은 연결고리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스스로를 옥죄고 만 윤이상의 이러한 ‘미친(!) 존재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일차적으로는 그가 거둔 음악적 성과 탓이 크다. 신혼 무렵 부인에게 늘 “내 안에 음악이 샘물 솟듯 흐르는데 표현 방법을 모르겠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던 윤이상은 전쟁의 상처가 채 씻기기도 전인 1956년 프랑스 파리를 거쳐 이듬해 독일 서베를린에 자신만의 음악을 만개시킬 둥지를 틀게 된다. 1972년 뮌헨올림픽 문화행사로 오페라 <심청>을 초연하는 등 한국인으로서 세계 현대음악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기게 되는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피의 절규 “네 아비는 간첩이 아니다”
하지만 1967년 터진 동백림 사건이야말로 윤이상의 일생을, 심지어 사후에 이르기까지 험로로 만든 결정적 분수령이었다. 중앙정보부 직원들에게 납치되듯 서울로 강제 이송된 윤이상에겐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 적화공작단’의 수괴란 딱지가 붙여진 채 무기징역형이 선고됐다. 훗날 이 시기를 타오르는 예술혼에 절대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치욕과 모욕으로 기억하는 윤이상은 당시 조사받던 사무실에 놓인 재떨이로 머리를 내려친 뒤, 흐르는 피를 벽에 찍어 ‘네 아비는 간첩이 아니다’라는 문구를 남겼고, 법정에선 “언젠가 내 음악이 연주될 때 간첩의 음악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해달라”고 진술했다. 2006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강압수사에 의해 소극적인 대북 행적에 대해 고전적인 간첩죄 적용. 윤이상=간첩이라는 오명을 둘러쓰게 한 것은 부당한 측면이 있다’는 내용의 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해외 음악가들과 독일 정부의 압력에 놀란 한국 정부는 윤이상을 추방 형식을 빌려 자유로운 몸으로 만들어주었으나, 이 사건으로 그의 행보는 점차 하나의 방향성을 띠게 된 게 사실이다. 그를 둘러싼 논란이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는 배경이기도 하다. 1974년 교민과 유학생 55명이 모여 만든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회) 건설에 주도적으로 나선 게 대표적이다. 특히 상처를 안긴 남쪽과 달리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북쪽(북한)과의 접촉면을 본격적으로 넓혀나간 건 반대자들로 하여금 두고두고 빨갱이 딱지를 붙이게 만드는 ‘확고한 증거’였다.
이후 그가 보인 행적을 두고선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윤이상과 함께 민건회 활동을 벌였던 한 인사는 “그의 음악적 하이마트(고향)는 남쪽”이라며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 피카소가 시대 상황에 따라 공산당원이 되었듯이, 윤이상 역시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지식인의 사명감으로 남북화해를 위해 몸을 던졌을 뿐”이라 평가했다. 이에 반해 김미영 대표는 “개인적인 상처 때문이었다고는 해도, 지나치게 친북으로 기울었다”며 “(편지를 보낸 건 맞지만) 설령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치더라도 오길남 박사가 윤이상의 권유에 의해 북한에 갔다는 주장이 틀린 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세상을 등지기까지 끝내 남한 사회와 ‘화해’하지 못한 건 우리 현대사의 또다른 상처로 남아 있다. 1994년 25년 만에 귀국을 추진하던 윤이상은 당시 김영삼 대통령 앞으로 친필 편지를 보내 “대통령께서만 저의 명예를 회복하여 주심으로써 저의 고국 방문은 성공할 것”이라는 뜻을 전했으나, 우리 정부는 이홍구 국무총리 명의의 편지에서 “선생님께서 어려우시더라도 지난날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 미안하다는 것과 앞으로는 예술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혀주시면 저희들이 일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겠습니다”라는 말로 사실상 ‘반성문’을 강요했다. 이에 윤이상은 “나는 남이나 북이나 똑같이 사랑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라는 답글을 보내 귀국 뜻을 접었다.
오씨를 향한 남한 정보당국의 움직임
‘통영의 딸’ 논란을 불러온 당사자인 오길남이 걸어온 길 역시 우리 사회 지식인이 남긴 또다른 궤적이다. 70년대 독일 브레멘대학에서 유학한 오씨는 당시 많은 유럽 유학생이 그러했듯, 고국에서 날아든 유신과 장기집권의 음울한 소식에 떠밀려 자연스레 해외 민주화 운동에 빠져들었다. 오씨는 이 무렵부터 자신이 공부한 사회주의경제학을 현실 사회주의 계획경제 건설 과정에 접목·적용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오씨와 독일 생활을 함께 했던 한 인사는 “오씨가 유럽 주재 몇몇 북한대사관에 입북 의사를 타진한 적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교민사회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던 윤이상의 권유 편지를 받고 1985년 입북하게 됐다는 오씨의 주장과는 다소 다른 설명이다. 이에 대해 오씨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내 일이 터진 후 나를 음해·매도하려고 지어낸 흑색선전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가족을 이끌고 북한에 도착한 뒤, ‘민영훈 교수’란 가명으로 대남 선전방송 요원으로 전락한 오길남. 머릿속에 그리던 모습과 너무 다른 현실에 부인과 두 딸을 북한에 놔두고 1년 만에 혼자 탈출한 오씨는 독일 북부도시 하노버의 정치범 수용시설에 홀로 버려진 채 긴 방랑의 세월을 이어갔다. 이 시기 오씨를 만난 주변 인사들은 극도로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이어갔다고 전했다. 한 지인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감정의 기복이 더 커지고 피해의식도 심해진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 무렵부터 오씨 주변에서 남한 정보당국의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결국 오씨는 1992년 5월 입국해 ‘윤이상의 권유로 입북했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다. 이른바 ‘오길남 사건’이 처음으로 우리 사회에 알려지게 된 순간이다. 귀국 과정 및 이후 남한에서 오씨가 보인 행적이 모두 정보당국의 치밀한 관리·통제 아래 있었다는 사실은 최근 불거진 ‘통영의 딸 ’ 논란에 여전히 숨은 배경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게 한다. 실제로 윤이상의 딸 윤정씨는 “오길남이 처음 북한으로 들어갈 때 분명히 한국 국적을 갖고 있었는데, 북한에 살겠다고 들어갔던 사람이 아무런 사법처리조차 당하지 않은 뒷배경이 뭐냐”고 강조했다.
이념의 시대에서 인권의 시대로
한때 사회주의 사회를 동경했던 한 지식인이 북한에 남겨둔 부인과 두 딸의 사연을 소재 삼아 등장한 ‘통영의 딸’ 논란은 거침없이 ‘윤이상 때리기(흔적 지우기)’로 옮겨붙었다. 통영의 딸 구하기가 통영의 아들 죽이기로 한걸음에 내달리는 모습은 우리 사회 이념지형의 단순성을 보여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례다.
이 점에서 이용민 통영국제음악제 사무국장의 얘기는 새겨들을 만하다. 이 국장은 “윤이상음악재단을 통해 북한 사회에 베토벤도 멘젤스존도 소개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이는 문화사적으로도 대단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좀더 힘겨운 관문은 따로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고향 앞바다의 정겨운 풍경을 그리다 세상을 등져야 했던 거장 윤이상을 단순히 ‘과거의 피해자’로 영원토록 박제화시켜두지 않는 열린 자세 말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 사회 보수진영 일각의 움직임은 예상보다 훨씬 발빠르고 공세적이다. 김미영 대표는 “90년대~2000년대 초만 해도 과거 과도하게 이념으로 상처받았던 사람을 치유하는 게 우리 사회의 지상과제였고, 윤이상도 당연히 피해자라 할 수 있었다”며 “앞으로 중요한 건 남북한 일반 주민들의 상처에 어떻게 다가서느냐에 달려 있다”고 못박았다. 이념의 시대에서 인권의 시대로 빠르게 탈바꿈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념의 시대 대표적 피해자인 윤이상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무엇보다 진보진영에 던져진 과제가 아닐는지.
최우성 최우리 기자
morgen@hani.co.kr
|
동백림 사건이란?
중앙정보부(중정)는 동베를린 소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던 유럽 유학생들이 입북하거나 국내에 잠입해 간첩 활동을 벌였다며, 윤이상(독일)·이응로(프랑스) 등 194명을 적발했다고 1967년 7월8일부터 17일까지 7차에 걸쳐 발표했다. 중정은 윤이상 등 해외 인사 30여명을 광복절 행사 초청 명목으로 본 주재 서독대사관으로 유인한 뒤 강제로 국내 송환했다. 최종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1명도 없었다. |
|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