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02.10 22:13 수정 : 2012.02.17 13:37

박종수 전 러시아 공사

[토요판] 커버스토리
푸틴은 왜 ‘한번 더’를 외치는가

러시아 대통령 선거가 오는 3월4일 치러진다. 한달이 채 남지않았다. 프랑스 대선과 함께 유럽 최대의 ‘권력 빅뱅’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푸틴은 집권 여당인 통합러시아당의 추천을 받아 출마를 선언했다. 그의 대통령직 복귀는 대통령의 임기연장을 위한 헌법개정을 단행했던 2008년부터 이미 예고된 수순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서방권에서는 푸틴의 대통령직 복귀 가능성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그것은 러시아인들의 정서와 정치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 따른 것이었다. 푸틴의 인기는 재임기간 내내 70-80%대를 유지했다. 통치만 잘 한다면 영구집권을 해도 개념치 않는다는 것이 전반적인 국민정서였다. 아울러 다수의 국민들은 푸틴보다 더 무능한 지도자가 나올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푸틴의 일시후퇴는 다분히 서구사회를 의식한 행보였을 뿐이다.

푸틴은 지난 1월 중순 ‘강한 러시아’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대선을 통해 재집권할 경우 러시아 이해를 무시한 서방의 일방적 행보들을 용납치 않겠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지정학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관류한 유라시아 국가다. 이 때문에 사상적으로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 사이에서 끊임없는 논쟁을 반복해왔다. 푸틴의 ‘강한 러시아’ 정책은 제정러시아 표트르 대제의 부국강병에 기초한 서구화 모델이다. 물론 서구화의 중심은 바로 푸틴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다. 푸틴이 ‘유럽주의자’를 자처하는 데는 이런 성장배경과 무관치 않다. 게다가 KGB 요원으로서 장기간에 걸쳐 독일에서 활동했던 것도 그의 유럽주의적 사고 방식을 고착화시킨 요인이었다.

푸틴이 이미 2000년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천명했던 대외정책 기조는 반미·반패권주의 성격의 ‘위대한 러시아 재건’이었다. 신군사 독트린도 동일 맥락이었다. 러시아 권위를 무시하고 자존심을 훼손하는 나토의 끊임없는 동진정책과 독자적인 미사일 방어체제(MD)를 구축하여 범세계적 단일 헤게모니 체제를 완성하겠다는 미국의 의도를 묵과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전방위적 외교노선을 추구한 푸틴의 대외정책은 노골적으로 유럽과 미국을 겨냥한 것이었고 상당부분 성공했다. 미국의 영향 하에 들어갔던 옛소련권을 대부분 회복시켰으며 마침내 폴란드와 체코의 MD설치도 저지했다.

푸틴의 대한반도 정책도 아태정책을 포함한 대외정책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대아태정책은 유럽 우선정책의 종속변수로 작용한 측면이 강했다. 특히 한·러 관계사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짧았다. 17세기말께 청의 강요로 나선정벌이라는 미명하에 러시아인과 일시 접전했다. 1884년 조·러 통상조약 체결로 공식 외교관계를 설정했으나 아관파천 375일이라는 외교적 진통과 함께 불과 20년 만에 을사조약으로 국교가 단절됐다. 1990년 한·러수교는 외교관계가 공식적으로 단절되었던 을사조약후 100여년만에 재개된 셈이다.

푸틴은 2000년 취임 직후 ‘한반도는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러시아의 국익에 포함된다’면서 ‘러시아의 외교적 노력은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러시아의 동등한 참여 보장과 모두와의 등거리 관계를 유지하는데 집중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러한 실용적 등거리 노선은 남한 공략의 한계성과 북한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명료한 인식에 기초했다. 북한과는 정치·안보적 유대를 더욱 강화하고 남한과도 다차원적 경제협력을 증진시켜 한반도에서 정치적 역할을 확대한다는 명분과 함께 경제적 실익을 확보하는 것이다.

푸틴은 취임과 동시에 최고지도자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전격 방문한 바 있다. 이러한 외교적 충격요법은 북·러간 존재했던 냉기류를 단번에 제거했다. 이어 김정일이 두차례에 걸쳐 러시아를 방문했고, 러시아는 북한의 협조를 받아 북핵 6자회담의 정식 멤버로 참여했다. 그후 북한의 핵실험 단행, 미국의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 비자금 동결조처 등 현안 발생 때마다 러시아는 중재자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고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푸틴과 외교적 고립에서 탈피해 자주 외교와 경제재건의 실리를 도모하는 김정일 사이에 새로운 밀월기를 맞은 것이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 집권 이후에도 양국 관계는 궤도 수정없이 지속돼 왔다. 지난해 8월 시베리아 울란우데에서 9년 만에 개최된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국간 협력 지평을 넓혀 나갔다. 특히 경협 추진의 최대 장애물이었던 북한의 대러 채무 문제와 김정은 후계 체제 보장에 대한 이면 합의도 있었다.

한국과는 외교안보적으로 다소 마찰도 있었지만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면서 경제이익을 신장시키는데 주력해 왔다. 새로운 무기시장으로서의 남한의 경제·군사적 가치를 과소평가할 수 없고 극동시베리아 개발을 위한 한국의 경협 참여와 투자 확대 등도 절실하다. 금년 9월 블라디보스톡 아펙(APEC) 정상회의,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및 2018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월드컵 등 대규모 국제 행사를 앞두고 한국과의 경협은 목마름 그 자체이다. 북한 통과의 가스관·송유관 건설 및 TSR-TKR연결 사업 등 남북한-러시아 3각협력에 기초한 대규모 프로젝트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또한 러시아는 사면이 바다이다. 해양협력도 삼면이 바다인 한국과 유망분야이다. 푸틴도 양국 경제관계의 상호 보완성을 잘 이해하고 있는 지도자이다.

푸틴의 대통령직 복귀는 이변이 없는한 1개월 후면 기정사실화될 것이다. 그는 국제사회에서 어떤 지도자 못지않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우리는 푸틴 재등장의 신동북아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 그간 지지부진했던 협력 프로젝트를 재정비하고 새로운 로드맵을 준비해야 한다. 특히 오는 5월부터 3개월간 열릴 여수 해양엑스포를 한러간 해양 협력의 모멘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양국 정상의 참석하에 연례적으로 개최되어왔던 제3차 『한러 대화포럼』을 여수 엑스포 현장에서 개최하는 방안을 적극 강구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해양협력 뿐만 아니라 인접 고흥의 제3차 나로호 우주발사의 성공을 유도하는 묘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종수 전 러시아 공사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커버스토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