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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2.17 20:54 수정 : 2012.02.17 20:54

국내 아이돌 음악시장은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 이후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아이돌 그룹 투애니원(2NE1).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서태지 음악의 빛과 그림자

서태지 음악의 고향은 록이었다. 1985년 말 중학교 2학년 시절의 정현철(서태지의 본명)은 ‘그룹사운드’라는 단어가 좋아 친구 4명과 함께 록밴드 ‘하늘벽’을 만들었다. 연습실 대신 자신의 한옥집 문간방에서 1만5000원짜리 베이스기타로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을 연주했던 그는 그로부터 3년 뒤 자신과 닮은 선배 음악인 한 명을 만났다. 가수 김종서였다. 김종서는 지난 15일 “곡에 대한 이해력이 뛰어났고, 연주의 리듬감도 아주 좋았다”며 그에 관한 기억을 떠올렸다.

“언제나 선물” 김종서와의 인연

“1989년 그때가 ‘시나위’ 4집 앨범이 나오기 전이었어요. 저는 시나위 2집까지 참여했다가 나와서 다른 음악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시나위 리더 신대철씨가 다시 한번 음반을 같이 만들어보자는 거예요. (2집 활동 직후 시나위에서 쫓겨난) 마지막 한이라도 풀어볼 생각에 일단 가봤어요. 거기서 17살짜리 서태지를 만난 거죠.”

당시 음악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20년을 훌쩍 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나위 시절에도 두 사람은 유독 잘 어울렸다. 서태지의 유일한 취미인 무선조종(RC) 모형비행기 조립은 곧 김종서의 유일한 취미다. 서태지 주변에서는 그의 음악세계를 가장 잘 아는 인물로 김종서를 꼽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김종서는 그의 음악을 ‘선물’이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1집부터 8집까지 서태지가 낸 앨범들
“언제나 선물이었어요. 그 친구는 단 한번도 제 기대에 못 미치는 음악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 친구가 시나위를 떠난다고 했을 때도 저는 오히려 박수를 보냈어요. 사실 헤비메탈 뮤지션이 댄스음악으로 전향한다는 건 ‘배반’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저 역시 그의 음악이 별로였다면 ‘이게 뭐냐’ 한마디 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가 ‘난 알아요’와 ‘환상 속의 그대’ ‘록앤롤 댄스’ 등을 작업한 걸 보니까 너무 세련되게 잘 만든 거예요. 그래서 저는 ‘야, 이건 대박 아니면 쪽박일 거다. 중간은 없을 거다’ 그랬어요.”

랩과 힙합 국내 소개와
국외와의 격차해소만으로도
20년은 충분히 평가받을 만

‘대박’이었다. 1992년 3월에 발매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 <난 알아요>는 180만장이 팔리며 최고의 히트를 기록했다. 지금 한국연예제작자협회 고문을 맡고 있는 이태현 서울기획 회장은 그때 그를 처음 봤다. 이 회장은 서태지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최고의 가수로 꼽혔던 조용필의 매니지먼트사 ‘필기획’을 이끌었던 인물로, 1988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전문 공연기획사 서울기획을 만들었다. 같은해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프레올림픽쇼와 1989년 리차드 클레이더만, 1991년 플라시도 도밍고 내한공연 등이 그의 작품이었다.


“1집 활동 기간이었는데, 아들 녀석이 태지보이스를 좋아했고 저도 관심이 있었으니까 서울 잠실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공연을 보러 갔어요. 공연은 조명, 무대 구성, 연출 등 하나부터 열까지 다 엉망이었어요. 속으로 ‘저게 아닌데’ 하면서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서태지가 이 회장과 만난 건 1993년 6월 2집 발매 이후였다. 그가 먼저 이 회장을 찾아 “저희 공연도 해주실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이 회장은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1층 커피숍이라고 첫 만남 장소를 또렷이 기억했다. 이 회장은 흔쾌히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2009년 8월 ‘이티피(ETP) 페스티벌’까지 서태지가 가진 59차례의 국내외 공연은 모두 이 회장이 연출하거나 총감독을 맡았다. 그가 이 회장에게 “그런데요”라는 말과 함께 내건 유일한 요구는 대기실을 마련해달라는 것이었다.

“원래는 대기실이라는 공간이 있었는데요, 의자는 공연할 때마다 담배 피우는 ‘기자 선생님’들이 차지하셔서 저희는 그냥 바닥에 신문지 깔고 앉거든요.”

소녀시대. <한겨레> 자료사진
20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공식 활동기가 아니라면 어떤 기자도 그를 만날 수 없다. <한겨레>도 서태지 관련 특집기사를 준비하며 전자우편으로 인터뷰 요청서를 띄웠지만 아무런 답변도 받지 못했다. 그가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언제나 비밀이다. 이와 관련해 이 회장은 최근 <한겨레> 인터뷰에서 “서태지가 지난 20년간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완벽하게 준비되기 전까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자기관리”라며 “그가 다시 나타난다는 것은 그것이 새 음반이든 공연이든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이 회장에게 서태지의 신비주의는 완벽주의와 동의어였다.

서태지의 귀환은 늘 신선한 것처럼 보였다. 언론은 그가 컴백할 때마다 ‘실험’ ‘새로운 장르’라는 수식어를 헌사했다. 심지어 92년 1집 활동을 마친 뒤 2집 <하여가> 앨범이 나오기까지 6개월간 모습을 감춘 것도 일종의 실험이었다. 가요계에 처음으로 ‘휴식기’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이었다. 특히 그가 2집 <하여가>에서 힙합과 국악의 접목을 시도하고, 3집 <발해를 꿈꾸며>의 대표곡 ‘교실 이데아’와 ‘발해를 꿈꾸며’ 등을 통해 가사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것은 댄스음악의 외연을 넓혔다는 점에서 대중음악계로부터 두루 좋은 점수를 받고 있다. 4집 <컴백홈>에서 선보인 갱스터랩도 당시로서는 새로움으로 다가온 것이 분명했다.

주류음악계의 ‘서태지 유전자’
다른 장르의 뮤지션들은
굉장히 안 좋게 평가할 수도

그의 영향을 직접 받은 H.O.T

반면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이후인 2000년대의 그에 대한 평가는 조금 다르다. 그는 2000년 <울트라맨이야>를, 2004년 <이슈>를 내놓으며 각각 하드코어와 감성코어라는 생소한 장르를 시도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인디음악 신에는 이미 하드코어로 종종 잘못 소개되곤 하는 얼터너티브 메탈과 하드코어 펑크에서 비롯한 이모코어 등이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지적이 많다. 상당수 음악인이 그를 선구적 음악인이라기보다 마니아의 우상, 곧 아이돌로 기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도원 음악평론가는 “서태지는 자기 음악을 꾸준히 해온 스타일의 아티스트형 음악인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과 조우하며 기획상품으로서의 음악을 발빠르게 내놓는 아티스트형 아이돌이었다”며 “다만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랩과 힙합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며 국내 음악과 해외 트렌드의 격차 해소에 앞장섰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20년은 충분히 평가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빅뱅. <한겨레> 자료사진
진정한 음악인이었든 아이돌의 원조였든 지난 20년간 그가 한국의 대중음악에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2012년 한국 주류 대중음악을 지배하고 있는 아이돌의 몸속에 흐르는 유전자는 ‘아이돌 서태지’ 쪽에서 물려받았을 확률이 크다. 김병찬 플럭서스뮤직 대표는 “서태지는 대중가수로서는 처음으로 이미지메이킹 차원의 휴식기를 활용하는 등 댄스를 기반으로 한 아이돌의 상품화 가능성을 보여줬다”며 “자신은 아이돌인 동시에 자기 음악을 개척한 아티스트였지만 그의 등장 이후 대중음악은 아이돌 중심의 산업화를 본격적으로 경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태지의 음악적 동반자 김종서의 평가는 어떨까. 서태지 음악의 유산을 꼽아달라고 했다.

“댄스음악의 포문을 열었죠. 그의 영향을 직접 받은 게 ‘에이치오티’(H.O.T.)였고, 지금 대형 기획사에서 나온 가수들이 케이팝을 이끌고 있잖아요. 엄밀하게 말해서 다른 장르의 뮤지션은 서태지를 굉장히 안 좋게 평가하는 그룹도 있어요.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현으로 아이돌만 살아남고 다른 음악은 다 죽었잖아요. 하하.”

김종서의 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마지막으로 전한 말은 이랬다. “‘난 알아요’ 할 때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음악은 장르를 떠나서 잘하면 그만인 것 같아요. 잘하면 결국 누구에게든 다 통하거든요.”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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