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아이돌 음악시장은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 이후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아이돌 그룹 투애니원(2NE1).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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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서태지 음악의 빛과 그림자
서태지 음악의 고향은 록이었다. 1985년 말 중학교 2학년 시절의 정현철(서태지의 본명)은 ‘그룹사운드’라는 단어가 좋아 친구 4명과 함께 록밴드 ‘하늘벽’을 만들었다. 연습실 대신 자신의 한옥집 문간방에서 1만5000원짜리 베이스기타로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을 연주했던 그는 그로부터 3년 뒤 자신과 닮은 선배 음악인 한 명을 만났다. 가수 김종서였다. 김종서는 지난 15일 “곡에 대한 이해력이 뛰어났고, 연주의 리듬감도 아주 좋았다”며 그에 관한 기억을 떠올렸다. “언제나 선물” 김종서와의 인연 “1989년 그때가 ‘시나위’ 4집 앨범이 나오기 전이었어요. 저는 시나위 2집까지 참여했다가 나와서 다른 음악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시나위 리더 신대철씨가 다시 한번 음반을 같이 만들어보자는 거예요. (2집 활동 직후 시나위에서 쫓겨난) 마지막 한이라도 풀어볼 생각에 일단 가봤어요. 거기서 17살짜리 서태지를 만난 거죠.” 당시 음악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20년을 훌쩍 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나위 시절에도 두 사람은 유독 잘 어울렸다. 서태지의 유일한 취미인 무선조종(RC) 모형비행기 조립은 곧 김종서의 유일한 취미다. 서태지 주변에서는 그의 음악세계를 가장 잘 아는 인물로 김종서를 꼽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김종서는 그의 음악을 ‘선물’이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1집부터 8집까지 서태지가 낸 앨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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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와의 격차해소만으로도
20년은 충분히 평가받을 만 ‘대박’이었다. 1992년 3월에 발매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 <난 알아요>는 180만장이 팔리며 최고의 히트를 기록했다. 지금 한국연예제작자협회 고문을 맡고 있는 이태현 서울기획 회장은 그때 그를 처음 봤다. 이 회장은 서태지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최고의 가수로 꼽혔던 조용필의 매니지먼트사 ‘필기획’을 이끌었던 인물로, 1988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전문 공연기획사 서울기획을 만들었다. 같은해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프레올림픽쇼와 1989년 리차드 클레이더만, 1991년 플라시도 도밍고 내한공연 등이 그의 작품이었다.
“1집 활동 기간이었는데, 아들 녀석이 태지보이스를 좋아했고 저도 관심이 있었으니까 서울 잠실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공연을 보러 갔어요. 공연은 조명, 무대 구성, 연출 등 하나부터 열까지 다 엉망이었어요. 속으로 ‘저게 아닌데’ 하면서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서태지가 이 회장과 만난 건 1993년 6월 2집 발매 이후였다. 그가 먼저 이 회장을 찾아 “저희 공연도 해주실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이 회장은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1층 커피숍이라고 첫 만남 장소를 또렷이 기억했다. 이 회장은 흔쾌히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2009년 8월 ‘이티피(ETP) 페스티벌’까지 서태지가 가진 59차례의 국내외 공연은 모두 이 회장이 연출하거나 총감독을 맡았다. 그가 이 회장에게 “그런데요”라는 말과 함께 내건 유일한 요구는 대기실을 마련해달라는 것이었다. “원래는 대기실이라는 공간이 있었는데요, 의자는 공연할 때마다 담배 피우는 ‘기자 선생님’들이 차지하셔서 저희는 그냥 바닥에 신문지 깔고 앉거든요.”
소녀시대.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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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장르의 뮤지션들은
굉장히 안 좋게 평가할 수도 그의 영향을 직접 받은 H.O.T 반면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이후인 2000년대의 그에 대한 평가는 조금 다르다. 그는 2000년 <울트라맨이야>를, 2004년 <이슈>를 내놓으며 각각 하드코어와 감성코어라는 생소한 장르를 시도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인디음악 신에는 이미 하드코어로 종종 잘못 소개되곤 하는 얼터너티브 메탈과 하드코어 펑크에서 비롯한 이모코어 등이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지적이 많다. 상당수 음악인이 그를 선구적 음악인이라기보다 마니아의 우상, 곧 아이돌로 기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도원 음악평론가는 “서태지는 자기 음악을 꾸준히 해온 스타일의 아티스트형 음악인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과 조우하며 기획상품으로서의 음악을 발빠르게 내놓는 아티스트형 아이돌이었다”며 “다만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랩과 힙합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며 국내 음악과 해외 트렌드의 격차 해소에 앞장섰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20년은 충분히 평가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빅뱅.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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