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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1.26 09:13 수정 : 2019.01.26 16:43

[토요판] 커버스토리
장애인자립리포트 ① 하상윤의 48시간

2009년 비리 장애인 시설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자립 요구하며 농성했던
‘마로니에 8인’ 중 한명 하상윤과
48시간 같이 먹고 자며 동행 취재

치킨과 김치볶음밥 등
탈시설 뒤 처음 먹어본 음식들
개인 존재하지 않던 시설 생활
작년 임대아파트 살며 진짜 독립
활동지원사 도움 받아 매일 외출

지난해 12월12일 자신의 임대아파트에서 하상윤씨가 밝게 웃고 있다. 특별취재팀

하상윤은 선천성 뇌병변에 따른 중증 장애인이다. 그는 10년 전 ‘마로니에 8인’으로 불렸다. ‘마로니에 8인’이란, 2009년 6월4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비리 장애인 거주 시설인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벗어나 자립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한 이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시설 안에서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자신들을 눈앞에서 지우고 싶어 하는 사회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농성은 그 삶에서 탈주하겠다는 선언이었다. 하상윤의 탈시설 자립은 투쟁 이후 9년이 지나 작은 임대아파트로 이사한 지난해 8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됐다. 최근 사회적인 관심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는 ‘장애인 탈시설 자립’ 운동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장애인의 탈시설 자립에 대한 이야기는 당사자보다 주로 자립을 도운 가족이나 지원센터를 통해 이야기됐다. <한겨레>는 당사자 하상윤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48시간 동안 그의 일상에 동행했다. ‘장애인 탈시설 자립 투쟁 10년’을 맞아 2009년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지냈던 123명의 현재도 추적했다. 지난달 12일 자신의 임대아파트에서 만난 하상윤은 도전하는 이의 웃음을 내내 얼굴에 담고 있었다.

세상 견디기 힘든 일 중의 하나는 엘리베이터에 밴 치킨 냄새를 맡고 그냥 참는 일이다. 지난해 12월12일 저녁 7시57분 서울 성북구 길음동 한 임대아파트. 외출에서 돌아오던 46살 하상윤과 활동지원사(장애인의 신체·가사활동 및 이동을 지원하는 사람)는 엘리베이터에서 그만 치킨 냄새를 맡아버렸다. 하상윤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스마트폰으로 배달 앱을 켰다. 40분 뒤 치킨이 도착했고, 활동지원사에게 포크를 건네받은 하상윤은 닭다리부터 찍어 먹었다.

하상윤에게 치킨이 새삼 특별한 건, 일상의 음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상윤은 선천성 뇌병변에 따른 중증 장애인이다. 기어서 이동해야 하고, 전동휠체어에도 혼자 오를 수 없다. 하상윤의 장애인 거주 시설 생활은 그가 아홉살 때인 1982년 시작됐다. 그 뒤로 27년이 지난 2009년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벗어나 자립생활주택에서 자립을 준비할 때까지, 그는 한번도 치킨을 먹은 적이 없었다. 한번도 김치볶음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시설에선 한번도 원하는 음식을 원할 때 먹어본 적이 없었다. 하루 세번 식사 시간을 어기면 꼬박 긴 시간을 굶어야 했다. 자신이 면 요리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시설에서 나온 뒤에야 알았다. 시설에서 먹을 수 있는 면 요리는 일주일에 한번 정기적으로 먹는 라면과 소면으로 대충 만든 짜장면 같지 않은 짜장면이 전부였다. 식사량도 제한적이었다. 많이 먹으면 “싼다”는 이유로 조금만 담아 줬다. 시설 생활은 “밥 먹고 똥 싸고 또 밥 먹고의 반복”이었다.

시설에는 개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옷장과 이불 외엔 개인 소지품도 없었다. 2000년까지는 남성과 여성 생활관도 구분하지 않았다. 어쩌다 방문을 열면 복도 한복판에서 소변을 보는 여성들의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 바지에 대변을 보는 실수를 하면, 금세 소문이 퍼졌다. 인간의 가장 개인적이어야 할 생리 현상이 그곳에선 모두가 들여다보는 공동의 일상이었다. 그런 생활 속에서 하상윤은 수치심을 떨쳐낼 수 없었다.

자유가 억제되고 부끄러움이 강요되는 생활은 더 이상 하상윤의 것이 아니다. 하상윤은 2009년 시설에서 나온 이후 다른 장애인들과 함께 지내는 자립생활주택에서 살다가 지난해 8월 52㎡(16평) 임대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진짜 독립을 했다. 기초생활수급자 생계비와 장애연금, 주거급여 등을 합치면 한달에 120만원 정도의 소득이 있고, 여기서 월세 24만원과 관리비 9만원 정도를 내고 지낸다. 한달에 모두 721시간에 해당하는 활동지원사 시간당 급여를 지원받는다. 보건복지부가 401시간, 서울시가 320시간에 해당하는 급여를 지원한다. 하상윤이 활동지원 카드로 활동지원사들의 단말기나 휴대전화 앱에 지원 시간을 기록하면, 보건복지부와 서울시가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등 중계기관을 통해 활동지원사들에게 급여를 지급한다. 넉넉하진 않아도 최소한 의지대로 삶의 행보를 선택할 수 있는 토대다. 그런 하상윤과 2박3일 48시간 동안 함께 먹고 자며 그의 삶을 들여다봤다.

하상윤씨가 지난해 12월13일 오후 자신의 집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살펴보고 있다. 그는 자립 뒤 가장 잘한 일이 컴퓨터 교육은 받은 것이라고 했다. 27년 동안 시설에서 지낸 그는 지난여름부터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살기 시작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이제는 매생이굴우동을 먹을 수 있다

12월12일 오후 3시17분 아파트 욕실. 하상윤의 마음이 바빠졌다. “빨리빨리, 빨리빨리.” 외출하기 전 몸을 씻기 위해 활동지원사를 재촉했다. 활동지원사 강민수(가명)가 욕실로 다가와 칫솔에 치약을 짜줬다. 하상윤은 욕실 입구에 엎드린 채로 목 위만 욕실 안에 넣어서 이를 닦았다. 엎드리면 발끝이 머리 쪽으로 말려 올라오기 때문에 앞으로 기울어진 온몸을 왼팔 하나로 지탱해야 했다. 하상윤은 팔을 움직여 양치질하는 게 아니라 칫솔을 꼭 쥔 채로 얼굴을 아래위로 움직여서 이를 닦는다. 하상윤이 칫솔을 내려놓으니 강민수는 컵에 물을 받아 입에 대줬다. 두 사람은 4년 동안 호흡을 맞춰온 사이다. 서로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미리 움직였다. 입을 헹군 뒤에는 머리였다. 하상윤이 양치질하는 사이 샤워기 뜨거운 물 온도를 조절해둔 강민수가 하상윤의 머리를 감겼다. 하상윤은 앞으로 쏠린 온몸을 이번에는 욕실 바닥에 댄 오른팔로 지탱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외출을 하기 위해서 매일 이 과정을 거치는데, 2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비장애인보다 몸을 움직이기 쉽지 않지만 외출 준비는 하상윤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하상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상윤은 동행 취재 사흘 동안 모두 외출을 했다. 첫째 날은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해 사람들과 만났고, 둘째 날은 집회에 참석했다. 셋째 날은 이마트에 가서 옷과 컴퓨터 용품 등을 쇼핑했다. 3차례의 외출·귀가를 위해 집에서 목적지까지 6차례 오가는 동안 하상윤은 지하철 5번, 장애인 콜택시 1번을 이용했다.

둘째 날인 12월13일 오후 4시45분. 하상윤은 서울 광화문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이틀 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를 추모하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하상윤은 우선 광화문역과 연결된 교보문고 푸드코트에서 매생이굴우동을 먹었다. 매생이굴우동 역시 시설에서 나온 뒤 처음 먹어본 음식이었다. 국물만 남기고 깨끗하게 우동을 비운 하상윤의 눈에 전시된 크리스마스트리가 들어왔다. 전동휠체어를 조작해 트리를 요모조모 살펴보면서 이곳저곳 빠르게 이동하는 통에 활동지원사가 잠시 하상윤의 위치를 놓쳤다. 하상윤은 이날 3만2천원짜리 트리를 샀다. “크리스마스를 따로 챙겨본 기억이 없어요.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는데 혼자 지내는 공간이 없었잖아요. 이번에 이사하고 혼자 살면서 해보고 싶었어요.” 독립해서 맞이하는 첫 크리스마스, 12월13일 밤 하상윤의 임대아파트에는 생애 첫 트리가 놓였다.

하상윤이 시설에 살던 27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은 지금과 달리 누워서 지내야 했다.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이 있던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내라도 나가려면 외출증을 끊어야 했다. 그렇게 나간 외출이라고 해봐야 은행 정도였다. 김포시를 벗어나는 일은 1년에 한번 정도, 그마저도 단체 외출이었다. 19살이던 1992년 6월2일 생애 세번째 요양원으로 옮기던 날 “왜 또 시설에 들어가야 하나. 여기 있기 싫은데 왜 들어가야 하나” 되뇌며 눈물을 흘렸던 까닭이다.

자립 생활자 하루 평균 이동거리
시설 생활자에 비해 3배
하루 평균 만난 사람은 5배

“시설 생활자들 사회관계 단절
부당한 일 참고 자율성 침해”

아버지, 아내 사망 사실 안 알리고
아들의 자립에도 반대했으나
46살 돼 처음 가진 하상윤의 꿈
“자격증 따서 현수막 디자이너”
꿈 이루려 공부하고 매달 저축도

‘34㎞ 대 11㎞’

장애인들이 시설 생활과 자립 생활에서 겪는 이동권 자유 격차는 하상윤만의 일이 아니다. <한겨레>는 지난해 12월19일부터 25일까지 자립 생활을 하는 장애인 5명과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의 후신인 김포 ‘향유의집’ 거주 장애인 5명이 일주일 동안 이동한 거리와 만난 사람들을 견주어봤다. 지인을 만나고 여가 활동을 하며 직장에 출퇴근하는 것과 같은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데 자립 장애인과 시설 장애인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짚어보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시설의 구조적 특성이 장애인 당사자가 누리는 보통의 삶에 미치는 영향도 파악하고자 했다. 이동 거리는 ‘집에서 외출한 뒤 움직인 거리’를 기준으로, 만난 사람은 ‘한마디 이상 대화를 나눈 사람’(동거인, 활동지원사, 시설 직원 제외)을 기준으로 삼았다.

<한겨레> 분석 결과, 자립 장애인 5명의 하루 평균 이동 거리는 34.1㎞로 시설 거주 장애인 5명의 평균(11.8㎞)에 견줘 3배 가까이 됐다. 자립 장애인 가운데 하루 평균 이동 거리가 가장 긴 이는 뇌성마비에 따른 중증 뇌병변 장애를 가진 한규선(57)이었다. 그는 47㎞를 이동했다. 두 다리와 왼손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한규선은 일터인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부터 영화관, 교회와 연말 모임 등을 쉴 새 없이 오가는 생활로 일주일 동안 모두 329㎞나 이동했다. 가장 거리가 짧은 이는 역시 중증 뇌병변 장애를 가진 방상연(47)인데, 매일 10.1㎞ 남짓 이동했다. 일터와 야학 등 교육기관, 연말 송년 모임과 집회, 교회 등으로 이들이 다닌 장소는 다양했다. 지역도 김포시 일대와 서울 성북구·송파구·강서구 등으로 넓게 퍼져 있었다.

반면 시설 거주 장애인 5명의 하루 평균 이동 거리는 모두 합쳐도 한규선 한명보다 조금 긴 59.2㎞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이아무개(46)의 30.3㎞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동 거리가 없는 장애인도 있었다. 박아무개(34)는 일주일 동안 시설 밖에서 산책조차 하지 않아 이동 거리가 0㎞였다. 김아무개(67)는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외출했지만, 주로 시설 안에서 잠시 나와 담배를 피우거나 전동휠체어를 탄 채 시설 주변을 두바퀴가량 산책하는 정도여서 하루 평균 500m 정도 움직였다. 일주일 동안 다녀온 곳 중 가장 먼 곳은 시설에서 270m가량 떨어진 식당이었다.

시설 거주 장애인들의 이동은 시설 안 산책, 시설 주변 식당·마트 방문 등에 그쳤다. 가끔 서울 종로구, 인천 동구로 이동한 경우도 눈에 띄었다. 장애인 야학이나 가족이 사는 곳을 방문했을 때인데, 이런 장거리 이동 비중은 자립 장애인보다 훨씬 적었다. 자립 장애인의 경우 거주하는 지역 밖으로 이동한 경우가 일주일 평균 2.8차례였던 반면, ‘향유의집’ 거주 장애인들은 김포를 벗어난 사례가 일주일 평균 1건뿐이었다.

한마디 이상 대화를 나눈 사람의 수 또한 자립 생활인지 시설 생활인지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자립 생활을 하는 장애인이 하루 평균 만난 사람은 12.3명이었다. 한규선이 언어 장애가 있어서 의사소통 속도가 느림에도 26.3명으로 가장 많았고, 48시간 동행 취재에서 많은 이들을 만났다고 생각한 하상윤이 3명으로 가장 적었다. 이들은 주로 직장 동료나 함께 수업을 듣는 장애인 야학 학생 및 강사, 같은 동네에서 자립 생활을 하는 지인, 교회 교인 등을 만났다.

반면 시설 거주 장애인이 하루 평균 만난 인원은 2.6명으로, 자립 장애인의 5분의 1 수준이었다. 앞서 하루 평균 500m 움직인 김아무개도 일주일 동안 시설 안팎에서 만난 이는 같은 시설에 함께 지내는 다른 장애인과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 식당 직원 정도로 모두 6명에 불과했다. 자립한 한규선의 30분의 1 수준이다.

이런 생활이 자립 장애인과 시설 장애인의 성격에도 영향을 끼친다. 소극적인 성격이었다가 탈시설 이후 적극적으로 바뀌는 장애인이 많다. “시설 생활을 하다 보면 사회관계가 단절됩니다. 따로 만나는 사람이 없다 보니 시설 사람들에게만 의지하게 되고,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말도 못 하고 그냥 넘어가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자율성이 침해되는 거지요. 하지만 탈시설을 하는 경우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자신의 고민이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고,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죠. 지극히 평범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김재환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의 말이다.

시설에선 연애와 그리움이 금지

하상윤이 연애를 시작하게 된 것도 자립 생활 이후였다. 여자친구 이미정(47)과 시설에서 나온 지 2년 뒤인 2011년부터 8년째 연애 중이다. 함께 영화를 보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집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다. 때로는 장애인 연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하는 여자친구의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한다. 남성과 여성 생활관도 독립시키지 않았던 시설에서는 정작 연애가 금지되어 있었다. “시설에서는 성인이 되어도 연애도 못 하게 했어요. 너무 싫었어요. 성과 관련한 모든 것을 금지하니까 더 하고 싶고 그랬던 거죠. 성이 나쁜 건 아니잖아요. 우린 성인이었는데… 왜 금지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하상윤의 말이다.

시설에서는 그리움마저 차단됐다. 하상윤은 가족에게 잊힌 존재였다. 시설 입소 전에 살던 서울 종로구 작은 집의 흐릿한 모습이 남아 있는 기억의 전부다. 형과 남동생 한명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들의 얼굴도 어릴 때 모습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변변한 가족사진 한장 없다. 그가 가족을 기억하는 유일한 수단은 지갑 속에 넣어둔 어머니 차금순의 증명사진뿐이다. 시설에 살던 시절 어머니는 일주일에 한번씩 목욕을 시켜주러 왔었다. 하상윤이 좋아하는 떡볶이를 만들어서 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하상윤이 16살이 된 어느 날부터 어머니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지병으로 쓰러진 뒤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하상윤은 한참 지난 뒤에야 알게 됐다. 어머니 산소도 겨우 2년 전에야 알아냈다. 아버지가 가르쳐주지 않았다. 9살 하상윤을 시설에 넣었던 아버지는 하상윤이 자립한다고 했을 때도 강력하게 반대했다.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시설에 있어야 안전하지 않으냐고 하면서 제가 장애인 관련 집회에 다니고 노들센터에 다니는 게 이용당하는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어요.” 하상윤은 뇌병변 장애로 그저 육체가 비장애인보다 좀 더 불편할 뿐인데, 아버지는 하상윤을 정신적 자율성도 박탈된 존재로 여겼다.

아버지의 편견과 달리 장애인들의 신체나 정서 발달에 퇴행이 생기는 건 되레 시설의 거주 환경 때문이다. “시설에서 늘 비슷한 사람만 만나고 새로운 자극이 없으면 발달에 영향을 끼칩니다. 특히 아동기에 새로운 자극을 경험하지 못하면 성인이 된 다음에도 신체나 정서 발달이 퇴행하는 문제들이 발생하죠. 실제 시설 거주 장애인 중에는 누군가에게 다가가 말을 먼저 걸거나 친구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밥을 어떻게 짓는지, 가게에서 물건을 어떻게 사야 하는지, 여행을 가서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등을 모른 채 살도록 하는 것은 기회의 박탈인 거죠.” 강정배 한국장애인개발원 조사패널팀장의 말이다.

12월13일 밤 10시, 하상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머니가 이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됐다는 사실, 그리고 남은 가족으로부터 죽은 어머니마저 찾아갈 수 없도록 배제됐던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 깊이 슬퍼했다. 하상윤이 2박3일 동안 유일하게 눈물을 보인 순간이다.

46년 삶에 처음 가지게 된 꿈

2박3일 동행 마지막 날인 12월14일 오전 9시30분. 하상윤은 무말랭이와 콩나물무침, 김치를 반찬으로 아침밥을 먹었다. 다시 몸을 씻고, 잠시 게으름을 피우다가 오전 11시3분이 되어서 집을 나섰다. 이날 행선지는 대형마트였다. 겨울옷도 사고, 컴퓨터 용품도 사야 했다.

하상윤은 일주일에 2차례씩 집으로 찾아오는 선생님에게 컴퓨터를 배우고 있다. 포토샵과 엑셀, 파워포인트 사용법을 배운다. 벌써 그렇게 배운 지 4년이 됐다. 한달 721시간 활동지원사 시간당 급여도 엑셀로 표를 만들어 직접 계산한다. 임대아파트에 있는 그의 방도 웬만한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작업실을 방불케 한다. 다섯개나 되는 멀티탭에 스무개의 플러그가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만 세개다.

4호선 미아사거리역에 연결된 대형마트에 도착한 하상윤은 불편한 움직임 때문에 좀더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몸집보다 큰 110사이즈 검정 오리털 야상을 샀다. 참기름을 사고 컴퓨터에 연결할 스피커도 샀다. 컴퓨터 관련 제품은 그가 자주 구매하는 물품인데, 이렇게 차곡차곡 산 물건들로 연습해서 언젠가 현수막(펼침막) 디자이너가 되고자 한다. 46살이 되면서 처음으로 가져보는 꿈이다. “자격증을 따고 현수막 공장을 차리고 싶은” 꿈을 위해 매달 40만원씩 저금을 하고 있다. “저는 중증 장애인이니까 취직이 잘 안 되잖아요. 취직은 아예 생각도 안 해봤어요. 어차피 안 될 거니까….”

그러나 “어차피 안 된다”고 해서 포기한 건 아니다. 하상윤은 자신이 가장 자유롭다고 느낄 때가 컴퓨터를 만지며 뭔가를 배울 때라고 했다. “컴퓨터 교육을 받을 때 제일 자유로움을 느껴요. 뭔가 배우는 기분, 그거요. 여자친구는 두번째요.” 3개의 컴퓨터 모니터를 연결해두고 포토샵으로 현수막 디자인 연습도 하고, 티브이도 보고, 인터넷도 하는 하상윤이 빨리 움직일 수 없음에도 한껏 즐거워 보였던 건 그래서였다.

“시설이라고 하는 건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포장해도 장애인을 ‘격리’하겠다는 것이고, ‘이 사람은 2등 인간이기 때문에 1등 인간과 함께 살아가기에는 모자란 사람들이다’란 전제가 깔려 있죠. 어떤 능력을 가졌건 자기 인생을 결정할 권리는 그 사람에게 주어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18년 동안 시설에서 산 중증 발달장애인 동생 장혜정(31)과 함께 자립 생활을 하는 모습을 찍은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의 감독 장혜영(32)의 말이다.(2017년 10월 <한겨레> 인터뷰)

아들을 정신적 자율성조차 박탈된 존재로 여긴 아버지의 생각과 달리 하상윤은 ‘2등 인간’이 아니다. 단지 몸이 조금 불편할 뿐. 12월12일 오후 2시부터 14일 오후 2시까지 48시간 동행 취재를 한 뒤 헤어지면서 하상윤에게 소개 동영상을 찍자고 했더니 휴대전화 너머로 쑥스러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시설에서 20여년 동안 살고 또 자립한 지 10년 됐고요. 뇌병변 중증 장애인입니다. 끝끝.”

“끝이라고요?”

“아, 하상윤입니다.” 특별취재팀/24시팀 정환봉 권지담 김민제 박윤경 이준희 기자

“탈시설은 지극히 평범한 삶 위한 전제”

탈시설 개념과 현황

장애인 266만8천여명 중

88만여명 여전히 시설에

자발적 입소 13.9% 그쳐

돌봄 문제가 탈시설 발목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 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굶어 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의 주제곡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중 한 구절이다. 지난해 12월 개봉한 이 다큐멘터리는 18년 만에 장애인 거주 시설에서 나온 발달장애인 동생 장혜정씨와 언니 장혜영씨의 6개월의 첫 동거기를 담았다. 장혜영 감독이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 구절에는 발달장애인의 자립이 주는 어려움과 걱정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두 자매의 이야기는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됐다. 지난해 9월 청와대에서 열린 ‘발달장애인 평생케어 종합대책 발표 및 초청 간담회’에 초대돼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만나기도 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쓴 지체장애인 김원영 변호사도 장애인 탈시설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 가운데 한명이다. 지난해 10월 장 감독과 함께 연 북콘서트에서 김 변호사는 “저도 장애인 거주 시설에 3년 동안 있었다”며 “시설에 있던 기간 만난 사람들과 이후 대학이나 로스쿨에 진학하며 만난 사람들, 두 집단 간 갭이 갈수록 커졌다”고 털어놨다.

최근 장애인 운동의 화두가 되고 있는 ‘탈시설’의 사전적 의미는 ‘장애인을 시설에 수용하는 것에서 탈피하여 지역 사회에 거주하게 하고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장애인 거주 시설에서 나와 자립하는 것을 뜻한다. ‘시설’은 ‘장애인이 집단 또는 공동으로 거주하는 복지 시설’로 30인 이상 대규모 거주 시설과 장애인 공동생활 가정, 단기 보호 시설 등이 이에 해당한다.

탈시설 담론이 공론화한 건 10년쯤 됐다. 2005년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과 2006년 성람재단 성추행 사건이 발생하면서 시설 거주 장애인의 인권 문제가 제기됐다. 하지만 장애인들은 여전히 시설에서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해 4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7년 장애인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전국 장애 인구 수는 2014년 272만6900여명에서 2017년 266만8400여명으로 5만8천여명 줄었지만, 시설 장애인 수는 80만800여명에서 88만여명으로 7만명 이상 늘었다.

장애인들이 시설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뭘까. 2012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시행한 ‘시설거주인 거주 현황 및 자립생활 욕구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스스로 시설에 들어오기로 결정했다’는 대답은 13.9%에 그쳤다. ‘나는 들어오고 싶지 않았으나 가족 등 주변 사람들의 강력한 권유로 들어왔다’는 대답이 35.3%로 가장 많았고, ‘내가 결정했으나 실질적으로 가족 등 주변 사람들의 설득과 권유로 들어왔다’는 응답이 25.6%로 뒤를 이었다. ‘동의 없이 강제적으로 시설에 들어왔다’는 비율도 21%나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시설에 입소한 이유도 ‘24시간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20.7%), ‘가족의 노령화·장애 등으로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15.3%) 등 가족들의 돌봄 문제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전문가들은 ‘탈시설’에 대한 사회적 통념부터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준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는 “장애가 있고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시설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 그동안 한국 사회의 상식이었다”며 “탈시설은 장애인이 무조건 시설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도 공부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등 지극히 평범한 삶을 누리자는 것”이라고 짚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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