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
내가 시작된 집
사진가 24명이 그들 삶 시작된 곳
수십년 만에 찾아가 사진으로 기록
옛 모습 그대로 영업하는 여관부터
주차장 또는 고속도로 중앙선으로,
재개발이 흔적 없이 지운 집들까지
시대가 사람 할퀴며 역사 쓰는 동안
사람 품었던 집은 말없이 시대 기억
내가 떠난 집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세계가 나를 흔들고 무너뜨릴 때도
끝내 살아남아 나를 지탱할 이야기
24명의 사진가가 그들의 삶이 시작된 곳을 찾아 사진으로 기록했다. 재개발로 철거돼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집, 반짝이는 고층빌딩숲에 지워진 집, 축구 연습장을 만들기 위해 흙더미로 변한 집, 가장 낮은 자들을 품는 무료병원 중환자실로 바뀐 신생아실, 그 자리에서 그 모습 그대로 세월을 쌓아온 집들까지…. 과거 옛집에서의 한때를 찍은 사진과 수십년 만에 새로 찍은 사진이 포개져 서로에게 말을 건다. 누군가가 시작된 집에서 사진들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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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의 가난이 몰려드는 곳에 도시가 있었다. 서울까지는 도착했으나 그 이상은 가지 못한 사람들이 비좁은 집에 몸을 포개 살았다. 1966년 박상찬(48·음악단체 프로젝트21앤드 대표)의 부모가 경남 고성군에서 이사한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의 열댓평 집에선 3대 3가구가 가족 구분 없이 섞여 잤다. 5년 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식구는 12명(그의 가족 7명+작은아버지 가족 4명+할머니)이 됐다. 좁은 골목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앵두를 따 먹고, 닭싸움을 하고, 개와 달리기를 했다. 그의 가족은 6살 때(1977년) 북아현동으로 이사 갔고 남아 있던 작은아버지 가족은 1985년까지 살았다. ‘86 서울 아시안게임’을 유치한 서울시가 ‘무허가 건축물을 정화한다’며 허물었다. 골목 안쪽에 있던 판잣집들이 철거돼 골목과 합쳐졌고 집이 있던 자리엔 담장이 세워졌다. 그가 수십년 만에 옛집 터를 찾아 카메라로 찍었다. 41년 만에 찍은 골목 사진 위에 어린 시절의 사진(그가 4살 때 장미를 꺾어 누나에게 주는 장면)을 포갰다. 사진 박상찬 제공, 그래픽 이정윤 기자 bb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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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작된 집에서 그 이야기들도 시작됐다.
내가 이 세계로 들어와 섞인 이야기. 나를 이 세계에 심은 사람들의 이야기. 나와 그들이 이 세계에서 ‘서로’가 된 이야기. 나를 이 세계가 흔들어도 끝내 살아남아 나를 지탱해온 이야기.
시대가 사람을 할퀴는 동안
나(홍영진·67)는 섬의 여관에서 시작됐다.
서울대병원 소아과 의사였던 아버지(홍창의·96)는 한국전쟁 때 제주도로 파견됐다. 1951년 1·4 후퇴 때 병원도 부산과 제주로 피란했다. 아버지는 서울대병원이 제주 한림에 만든 구호병원에서 일했다. 마땅한 병원 건물이 없어 면사무소 창고를 빌려 피란민들과 제주도민들을 진료했다.
아버지의 동료가 소개해준 숙소가 태양여관(제주도 제주시 한림읍)이었다. 어머니가 임신 중이어서 방이 3개뿐이던 여관 전체를 빌려 썼다. 여관은 한림항으로 나가는 뒷골목에 있었다. 육지에서 온 외판원들이 들고 온 물건들을 파는 동안 머무는 여관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가끔 한림항에서 육지의 전쟁을 걱정하며 바다 저편 비양도를 바라보곤 했다. 1951년 7월 의료진이 부산으로 합류했을 때도 아버지는 외과의사 한명과 제주에 남아 환자들을 돌봤다.
나는 1952년 그 여관에서 태어났다. ‘결과적으로’ 나는 장남이 됐다. 출생신고도 하지 못한 형이 전쟁통에 세상을 떠났다. 1953년 귀경한 서울대병원으로 되돌아갈 때까지 나의 식구들은 태양여관에서 살았다. 나의 기억엔 없는 여관을 아버지는 그리워했다. 제주도에 갈 때마다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했다. 수차례 방문 끝에 2015년 여관의 위치를 확인했다. 내 나이 62살에 내 출생의 장소를 처음 봤다.
나의 이야기가 시작된 태양여관의 이야기도 계속되고 있었다. 6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이름으로 영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1층짜리 건물은 2층이 돼 있었고 3개뿐이던 방도 7개로 늘어나 있었다.
그사이 “세상이 아프면 의사도 아파야 한다”던 아버지는 한국 소아의학계의 ‘어른’이 됐다. 1987년 6월항쟁 직후 창립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의 초대 이사장이 됐고, 아버지의 이름을 딴 책(1975년 첫 발간 뒤 263명의 필자가 참여해 현재 11판까지 낸 <홍창의 소아과학>)은 선구적인 한글 의학 교과서로 평가받았다. 아버지를 따라 소아과 의사가 된 나도 전공의 시절 의사가 부족한 제주도에서 파견 근무했고 인의협 창립에도 참여했다.
지난해 추석을 맞아 아버지와 나, 내 아들들과 손자, 4대가 제주도로 건너가 태양여관 앞에 섰다. 낡은 새시문에 빨간 글씨로 이름을 새긴 여관 안에선 시간이 품어온 이야기들이 묵고 있었다. 지난 시간을 살아낸 세대와 앞으로의 시간을 살아갈 세대가 서로를 대견해하며 여관 앞에서 오랜 이야기를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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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태양여관은 1951년 한국전쟁 당시 서울대병원에서 파견 간 소아과전문의 홍창의(오른쪽 둘째·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초대 이사장)씨가 2년 동안 머물며 아들 홍영진(오른쪽 첫째·전 인하대병원 소아과 과장)씨를 낳은 곳이다. 지난해 추석을 맞아 4대가 제주도로 건너가 태양여관 앞에 섰다. 홍영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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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안선영·49)는 동대문상가아파트(서울시 종로구 창신동) 다동 524호에서 시작됐다.
할머니를 모시고 살던 부모님이 1970년 부산을 떠나 방 하나, 부엌 하나인 집에 닿았다. 12평 남짓인 작은 집엔 한해 먼저 상경한 큰아버지 여섯 식구(큰아버지 부부와 사촌남매 넷)가 살고 있었다. 두 가구 합쳐 아홉인 집에서 단칸방을 쪼개 할머니 방을 따로 만들었다. 밤에 몸을 움직이려면 자고 있는 식구를 타고 넘어야 할 만큼 집은 비좁았다.
숨을 곳 없는 집에서 신기하게도 내가 생겼다. 입 하나 느는 게 큰 부담이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가 큰어머니의 눈치를 볼까 염려한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절대 아이를 지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해 연말 나는 기어코 태어났고 식구를 두자릿수로 만들었다. 인근 병원 의사가 집으로 왕진을 와 어머니의 출산을 도왔다.
농촌의 가난이 몰려드는 곳에 도시가 있었다. 서울까진 도착했으나 그 이상은 가지 못한 사람들이 5층짜리 아파트의 4층과 5층에 모여 살았다. 1~3층에선 노동자가 된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 땀으로 젖은 동대문의 일상을 구성했다. 누군가는 한국이 입는 옷을 재단했고, 누군가는 한국이 신는 신발을 만들었다. 누군가는 옷과 신발을 등에 지고 날랐고, 누군가는 누군가가 먹는 밥을 머리에 이고 배달했다. 누군가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과 딸로서 그들은 가난한 노동을 구원하느라 바빴다.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집에서 직선거리 600m 떨어진 동화시장에서 양복기술자로 일했다. 한 층을 두개 층으로 분리해 아래층에선 미싱(재봉틀)을 돌렸고 다락이 된 위층에선 재단과 ‘마도메’(미싱 작업 뒤 단추 등을 다는 마무리 손바느질·일본식 봉제용어)를 했다.
내가 태어나기 한달 전 붉은 화염(1970년 11월)이 일었다. 아파트에서 300m, 동화시장에선 100m도 안 되는 거리(평화시장)에서 스물두살의 재단사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몸에 불을 붙였다. 그의 죽음에 놀란 만삭의 어머니는 두 팔로 뱃속의 나를 꼭 감싸 안았다. 내가 태어나기 8개월 전엔 서울시가 지은 와우아파트가 무너졌고(4월), 내가 태어나고 일주일 뒤(12월15일)엔 제주에서 부산으로 항해하던 남영호가 침몰했다. 불타고 무너지고 침몰하는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던 때였다. 3년 뒤 우리 식구는 그 좁은 집에서 분가(종로구 충신동)했다. 대학생이 된 나는 학생운동을 하며 그동안 외면하고 살았던 동대문의 전태일을 다시 만났다.
사진을 찍으러 45년 만에 찾아간 아파트는 재개발이 바꾼 풍경 속에서도 옛 모습(신발 도매상가로 특화)을 유지하며 여전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촬영 몇달 전 어머니가 쓰러졌다. 뇌손상으로 기억이 흐려진 어머니의 뿌연 이야기를 부여잡고 내가 시작된 집을 찾아가 사진에 담았다. 낡은 아파트의 계단 창문 너머에 우리 식구가 아파트를 떠나던 해 지어진 ‘동대문맨숀’이 있었다. 그 잿빛 아파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 옛날 열 식구의 빨래를 들고 옥상을 오르내리던 엄마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피를 토하며 생산량을 맞추던 시대를 견디고 탄생시킨 오늘은 그때보다 덜 고달플까. 나는 지금 나와 내 가족이 살아갈 작은 집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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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 1970년 안선영씨는 할머니와 큰아버지 식구가 같이 사는 12평 남짓 아파트에서 머릿수 10명을 채우며 태어났다. 그 한달 전 청년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 소식에 만삭의 어머니는 뱃속의 그를 꼭 감쌌다. 현재 신발 도매상가로 특화된 동대문상가아파트 다동의 모습. 안선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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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수영·38)는 학살이 일으킨 공포 속에서 시작됐다.
아직 신혼이었던 부모님은 광주의 이층 양옥집(광주시 남구 양림동) 1층에 방 하나를 얻어 살았다. 집주인 식구들이 1층에서 같이 거주하며 공간을 나눠 가졌다.
1980년 5월 아버지의 직장은 전남도청 근처 전일빌딩(5·18 당시 계엄군의 헬리콥터 기총소사 흔적이 남아 있는 건물)에 있었다. 거래장부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러 출근한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머니는 나를 업고 금남로가 내려다보이는 집 앞 공원에서 혼자 무서워 떨었다. 밤에도 총소리가 들렸고 불꽃놀이 하듯 밖이 환했다. 소리가 새어나오는 집으로 총알이 날아든다는 소문에 어머니는 백일도 안 된 나를 이불로 말아 장롱 안에 숨겼다.
1년 뒤 여수(전남)로 이사 가며 떠난 그 집을 37년 만에 카메라를 들고 찾아갔다. 디자인회사로 바뀐 옛집 앞에서 주름진 어머니가 백발이 된 아버지의 팔짱을 꼈다. 시대가 사람을 할퀴며 역사를 쓰는 동안 사람을 안아주던 집은 말없이 시대를 기억하거나 기억에도 남지 못한 채 사라졌다.
나 없는 집을 지키며
사진들이 찍은 것은 존재가 아니라 부재였다.
내가 시작됐으나 이젠 내가 없는 곳을 기록했다. 수십년 만에 찍은 내 출생의 장소는 사람 대신 차들이 쉬는 공영주차장이 돼 있거나, 주차장을 나온 차들이 무섭게 내달리는 고속도로 중앙선이 돼 있었다. 수평을 깔고 앉은 수직의 고층빌딩으로 바뀌었거나, 재개발로 흔적을 잃고 아파트 단지 속으로 숨어버렸다. 내가 시작된 집을 담은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나였다.
나(최경아·49)는 죽음이 대기하는 병원에서 시작됐다.
1970년 내가 태어난 성가병원(재단법인 천주교성가회·서울시 강북구 미아동)은 1990년 성가복지병원(사회복지법인 성가소비녀회·성북구 하월곡동)으로 이름과 장소를 바꿔 무료병원이 됐다. 성가복지병원은 일반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는 가난한 환자들이 마지막으로 의탁하는 의료기관(후원: 국민은행 017-25-0001-379)이었다. 노숙인과 무연고자, 장애인,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찾아가 아픈 몸을 맡겼다.
내가 48년 만에 병원을 찾아갔을 때 옛 신생아실은 중환자실이 돼 있었다. 내 삶이 시작된 자리에 죽음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이 세계로 삶이 오고 가는 통로는 그렇게 연결돼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중학생 때 의료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서 처음과 끝을 맞는 삶들이 나를 운명처럼 글에 묶었다.
내 생의 자리에서 가장 낮은 생을 마무리하는 이들을 촬영하며 나(2018년 전태일문학상 생활·기록 부문 수상자)는 내가 걸어갈 길을 생각했다. 나(현재 르포문학작가)는 방송사에서 시사·다큐 작가로 20년 넘게 일했다. 2015년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기획이 거부당한 뒤 방송 일을 접었다. 나는 웅장하거나 으리으리한 것들에 내 글을 보태지 않을 것이다. 웅크리고 스러지는 것들 곁에서 나는 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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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당시 서울시 도봉구 수유동: 최경아씨가 한살 때 집에서 목욕을 하고 있다. 최경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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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서울시 성북구 하월곡동: 최경아씨는 1970년 미아동의 성가병원에서 태어났다. 48년 만에 찾아간 병원의 신생아실은 위치(하월곡동)와 이름(성가복지병원)을 바꿔 무료병원 중환자실이 돼 있었다. 일반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는 가난한 환자들이 성가복지병원을 찾아 의탁했다. 최경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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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조혜경·48)는 지금 없는 병원에서 시작됐다.
부모님이 살던 동네 산부인과병원(서울시 종로구 삼청동)이었다. 어머니가 기억하는 병원 건물의 위치를 찾아냈을 땐 음식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갓난아기였던 내가 40대 후반의 나이가 되는 동안 병원은 스파게티 전문점이 돼 있었고, 건물 벽에선 벽화로 그려진 나무가 진짜 나무(가로수)와 경계를 섞고 있었다. 내 카메라 앞에서 74살이 된 어머니가 포크를 들었다. 나를 낳고 미역국을 먹었던 건물에 앉아 스파게티를 먹으며 어머니는 재빨리 가버린 세월을 낯설고 서먹서먹해했다.
나(정지현·45)는 어머니가 기억하기 싫어하는 집에서 시작됐다.
서해가 내려다보이는 유달산 중턱에 그 집(전남 목포시 서산동)이 있었다. 찬 바람이 눈보라를 휘날리던 1974년 새벽에 나는 조부모와 고모·삼촌의 사랑을 받으며 태어났다. 그 사랑이 어머니에겐 미치지 못했다.
한해 전 태백산맥 끝자락의 너른 평야(전남 영암)에서 시가로 온 어머니는 고된 시집살이를 겪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밥을 이불을 덮어 아랫목에 두면서도 갓 결혼한 어머니에겐 누룽지 먹을 시간도 주지 않았다. 물 길으러 갈 때를 빼곤 대문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했다며 어머니는 눈물겨워했다. 음식 솜씨가 좋은 어머니에게 고모들은 “음식 잘하는 걸 보니 어디서 식모살이라도 하다 왔나 보다”며 핀잔을 줬다.
1992년 할아버지 사망(이후 할머니는 부모님의 분가(1976년)한 광주 집에서 생활) 뒤 처음으로 지난해 어머니와 그 집 앞에 섰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던 집을 딸과 오게 될 줄은 몰랐다면서도 어머니는 집 곳곳에 묻은 기억들을 되살렸다. 태어난 시각에 맞춰 사진에 담은 집의 빛깔은 새벽만큼 검푸르렀다. 이젠 우리 가족 아무도 살지 않는 쇠락한 동네에서 배를 타는 선원 이주노동자들이 가장 젊었다.
나(이연호·50)는 흙더미로 변한 집에서 시작됐다.
부모님이 결혼 뒤 마련한 첫 보금자리(경기도 부천시 오정구)였다. 집은 김포공항에 바짝 붙어 있었다. 공항에 취직시켜준다는 사람의 말을 믿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은 집에 아버지가 세를 얻었다. 그 사람은 ‘와이로’(뒷돈)만 챙기고 연락을 끊었다.
집에 있으면 비행기 뜨고 내리는 소리로 귀가 멍했다. 비행기가 머리 위로 날아갈 때마다 비행기 따라 고개를 쳐들던 나는 거꾸로 넘어져 논두렁에 처박혔다. 공항을 포기한 아버지는 미군부대에서 일했다. 아버지가 출근해 집을 비운 사이 큰아버지가 와서 살림살이를 차에 싣고 성남(경기)으로 가버렸다. ‘반강제 이사’를 당한 우리 가족은 지금까지 성남에서 터를 잡고 산다. 비행기 소리에 잠을 설치느라 우리 형제가 많아졌다고 어머니는 그 시절을 웃으며 회상했다.
지난해 어머니(아버지는 2010년 작고)와 방문한 옛집은 철거당해 축구장 터가 돼 있었다. 흙과 폐자재가 쌓인 집터에 서서 어머니가 어깨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올려다봤다. 50여년 전에도 어머니는 저 자리에서 출근하는 아버지를 배웅하고 있었겠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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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갓난아기 때 이연호씨가 김포공항 옆에 위치한 집에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다. 아버지는 김포공항에 취직시켜준다는 사람의 말을 믿고 공항 옆에 세를 얻었다. 이연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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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이연호씨가 45년여 만에 찾아간 옛집은 축구장 터로 철거돼 흙더미가 돼 있었다. 어머니가 폐자재가 쌓인 집터에 서서 어깨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올려다보고 있다. 이연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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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내보낸 집들을 시간이 통과하자 시간이 흘린 이야기들이 남았다. 방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선 나는 맷돌질하는 세상에 갈리지 않으려고 세상보다 빨리 돌았다. 집이 헐려 사라져도 맷돌 사이로 떨어진 이야기의 가루는 땅에 붙어 날아가지 않았다. 그 이야기가 건네는 위안에 의지하며 나와 그들과 이 세계의 이야기도 계속될 것이었다.
*태어난 집을 이야기하는 사진집단 ‘포토청’의 단체전(‘Birthplace’)이 2월1일부터 28일까지 경기도 성남시 ‘갤러리 카페앤드티’(중원구 산성대로 594 세영빌딩 3층)에서 열린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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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경기도 평택시 서정동: 당시 한살이던 ‘아기 김혜리’가 집이 있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유모차를 타고 있다. 김혜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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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경기도 평택시 서정동: 27살이 된 김혜리씨가 같은 장소에서 카메라 앞에 앉아 아기 때의 사진을 들고 촬영했다. 김혜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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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동: 성애병원 신생아실에 갓 태어난 김중백씨가 누워 있다. 김중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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