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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2.23 09:36 수정 : 2019.02.23 10:15

〔토요판〕 커버스토리
노동자기업 우진교통의 성공 비결
청주에서 가장 큰 시내버스 회사
부실경영·비리로 2004년 부도
171일 파업 끝 노동자가 회사 인수
“곧 망할 것” 예측 깨고 15년째 순항

정보공유 투명경영이 첫째 비결
“비리 소지 없앴더니 흑자 되더라”
비정규직 없애자 주인의식 높아져
“위기 왔을 때 허리띠 조르고 단합”

2005년 1월 노동자자주관리기업으로 출범한 우진교통은 임금과 징계 등 모든 것을 주인이자 노동자인 구성원들이 결정한다. 지난 14일 오후 다달이 한번씩 열리는 자주관리위원회 회의에 앞서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우진교통 본사 건물 앞에서 김재수 대표(앞줄 왼쪽 다섯째)와 박우용 노조위원장(앞줄 왼쪽 넷째) 등 자주관리위원들과 직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청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300명이 넘는 직원 가운데 대표이사만 빼고 모두 노조원이다. 대표도 전직 민주노총 충북본부 사무처장 출신이다. 이 회사의 노조위원장은 경영팀의 일상적인 업무보고부터 이사회 격인 자주관리위원회 참석까지 회사의 크고 작은 모든 일에 대표와 함께하고 도장 찍는다. 임금 기준도 대표와 동일하다. 게다가 사실상 모든 직원이 정규직이다. 명실상부한 ‘노동자 기업’이다. 부도난 회사를 인수해 2005년 1월 노동자자주관리기업으로 출발한 청주의 시내버스회사 우진교통 이야기다. 구성원 모두가 주인이면서 노동자인 우진교통은 금방 망할 거라던 주변의 예측과 달리 15년째 힘차게 달리고 있다. 우진교통은 지난달 <노동자자주관리기업 우진교통 이야기>(저자 강수돌) 책 출판회를 열어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의 탄생을 자축했다. 우진교통은 자본가나 대주주 없이도 성공할 수 있는 노동자기업의 좋은 모델이자,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봄햇살 같은 희망이다. 지난 14일 충북 청주시 우진교통 본사에서 김재수 대표와 박우용 노조위원장 등을 만나 성공 비결과 과제를 들어봤다.

현관에 들어서자, 좌르르 쏟아지는 동전 소리가 들렸다. 궁금증에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1층 수금실이었다. 지난 14일 오전 10시 청주 우진교통 본사 수금실의 테이블 주변에는 8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경리부 직원과 아침 근무를 마친 승무직원(버스기사)들이었다. 이들은 현금통의 돈을 작은 바구니에 쏟은 뒤 동전과 지폐를 따로 셌다. 전날 밤 운행을 마치고 돌아온 시내버스의 현금통은 이처럼 경영직원뿐 아니라 현장 노동자들이 함께 모여 정리한다. 회사 수입(교통카드 80%, 현금 20%)을 구성원들이 직접 관리하는 것은 우진교통이 2005년 1월 노동자자주관리기업으로 출범한 뒤부터 우진교통에 내려오는 전통이다.

노동자자주관리기업 우진교통의 역사는 2004년 7월의 파업 투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1년 대화운수와 동원교통을 통합해 만들어진 우진교통은 청주에서 가장 큰 시내버스회사였다. 그러나 그 뒤 우진교통은 매년 15억~2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으며, 임금 체불을 하기 일쑤였다. 2004년 중반 두달치 월급을 받지 못하고 퇴직금조차 적립돼 있지 않다는 것을 안 노동자들은 마침내 ‘생존권 사수’를 내걸고 파업에 들어갔다. 경영진은 직장 폐쇄 등으로 맞섰으나, 171일 만인 2005년 1월10일 두 손을 들었다. 우진교통 노조와 노동자들은 주식의 50%와 경영권, 부채(약 150억원)를 함께 넘겨받았다. 나머지 지분 50%도 이후 구성원들의 출자전환 등으로 모두 인수했다.

노동자자주관리기업 우진교통은 투명경영으로 첫해부터 흑자를 기록했다. 지난 14일 오전 우진교통의 경리직원과 현장 노동자들이 현금으로 받은 버스비를 정리하고 있다. 청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단시간 노동자 9명도 무기한 상근직

2005년 1월20일 오너 없이 노동자가 주인인 회사로 새로 출발하자, 주변에서는 석달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예측했다. 밀린 임금에 거액의 부채까지 있는데다가 경영 경험이 있는 경영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 우진교통은 그해 말 3500만원의 운송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이전의 적자폭을 고려하면 사실상 약 20억원의 수익을 올린 셈이다. 우진교통은 새 출발 3년 만에 부채 66억원을 상환했다. 최근 2년간 청주의 다른 시내버스 회사와 마찬가지로 버스 승객 감소 등으로 7억원과 9억원의 적자를 기록하긴 했지만, 우진교통은 15년째 순항하고 있다.

“부도난 회사의 부채가 실제는 200억원쯤 된데다가 현금도 없었으니 그 상황을 당연히 돌파하지 못할 거라고 사람들이 얘기했다. 개인적으로 친한 민주노총의 자문 변호사도 저한테 ‘괜히 헛고생하지 말고 그거 맡지 마라’고 말할 정도였다. 저도 자주관리기업이 안정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했는데 어떻게 잘 이겨냈다.”(김재수 대표·60)

“그때 저는 입사한 지 겨우 일년 정도였던 막내 운전기사였다. 단지 다시 일을 할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떴고 새마음으로 하자는 생각만 했지, 우리의 미래 청사진이 어떻고 등등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다.”(박우용 노조위원장·54)

“당시 저는 파업지도부인 비대위 활동을 하긴 했지만, 경영 경험이 전혀 없는 노동자들이 회사를 인수해서 잘 해나갈지 확신이 솔직히 없었다.”(염갑수 자주관리실장·61)

순항할 수 있었던 첫번째 원동력은 투명경영이었다. 노동자자주관리기업으로 출범한 뒤 우진교통은 한달에 한번씩 경영설명회를 열어 모든 수입과 지출에 대한 정보를 구성원들에게 공개했다. 과거 경영진이 현금 수입의 일부를 때때로 집어가던 악습은 당연히 사라졌다. 또 부정부패를 없애고, 비리가 생길 만한 틈을 다 막았다. 오너 경영 시절 납품업자와의 수의계약으로 이뤄졌던 경유(당시 연간 40억원) 공급 방식을 정유회사와의 직거래로 바꿨다. 수의계약 때는 리베이트 등으로 새나가는 돈 때문에 기름값이 정유소보다 오히려 더 비쌌지만, 공장도 가격으로 직거래를 하자 돈은 그만큼 절약됐다.

“우리가 무슨 비법이 있었겠나. 다만 부정비리가 발붙이지 못하게 했다. 모든 계약은 현금으로 공개입찰을 했고, 담당 부서장들에게는 유관기관 사람들과 밥도 같이 먹지 말도록 했다. 그랬더니 흑자로 돌아섰다. 그 기조로 2015년에는 제2차고지(3800평)도 샀다. 예전 버스업자들이 얼마나 많이 해먹었는지를 알겠더라.”(김재수)

구성원들의 주인의식도 주요한 힘이었다. 자주관리기업 출범 때의 약속대로 우진교통은 비정규직이었던 사무관리직과 정비직 노동자 30여명을 2005년 중반에 전부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이들은 당연히 회사 일에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임했다. 현재 321명의 전체 직원 가운데 ‘3년 계약직’인 대표이사, 업무 특성상 단시간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식당 조리원 3명과 야간 경비직 3명 등 10명을 뺀 311명이 정규직원이다. 단시간 노동자들도 4대보험을 적용받을 뿐 아니라 본인이 원하는 한 무기한 일할 수 있는 상근직이다.

청주의 시내버스 회사인 우진교통은 주인인 노동자가 모든 것을 스스로 운영한다. 2005년 노동자자주관리기업 출범 때부터 우진교통 대표를 맡고 있는 김재수 대표(가운데)가 동반자 관계에 있는 박우용 노조위원장(맨 오른쪽)과 총무부장에 해당하는 염갑수 자주관리실장과 함께 지난 14일 오전 청주 상당구 우진교통 본사 1층 현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청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구성원에게 붙잡힌 김재수 대표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김재수 대표가 있었다. 민주노총 충북본부 사무처장이었던 그는 파업 도중에 합류했다. 원래 우진교통은 한국노총 소속이었으나, 한국노총이 파업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자 2004년 9월 조합원 투표를 통해 상급단체를 민주노총으로 바꿨다. 이때 그가 파업 지원을 위해 우진교통에 파견됐고, 이듬해 노동자자주관리기업 우진교통의 대표로 선출됐다. 그는 1970~80년대 학생운동(충북대 경영학과)과 사회운동(민통련, 전민련)을 거쳐 1990년대 초반부터 노동운동을 해왔다. 그가 첫 3년 임기를 마치고 민주노총으로 복귀하려 하자, 우진교통 구성원들은 2007년 말 그를 붙잡기 위해 회사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였다.

“우진교통에 더 있다가는 제가 꿈꾸고 걸어왔던 노동운동가와는 결이 다른 인생을 살지도 모르기에 많이 고민됐다. 제가 없어도 우리 조직의 문제를 구성원들이 충분히 풀어갈 능력이 있다고 봤으나, 동지들이 붙잡는 것을 뿌리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노동운동 정신을 기업에 적용해 구현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봤다.”(김재수)

김재수 우진교통 대표는 민주노총 충북본부 사무처장으로 있다가 2004년 파업 때부터 합류했다. 그는 첫 임기 3년을 마치고 민주노총으로 복귀를 희망했으나, 구성원들이 만류해 지금까지 대표를 맡고 있다. 청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우진교통 노조에서 김재수 대표에게 준 명예조합원 위촉패 등이 대표이사실에 진열돼 있다. 청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그러나 위기는 내부에서 왔다. 파업 때는 똘똘 뭉쳤지만, 회사가 차츰 정상화되면서 잠복해 있던 견해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노조위원장 자리 싸움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주관리기업에 대한 철학 차이였다. 우진교통은 전 경영진으로부터 경영권과 지분을 양도받았을 때 ‘우리사주 회사’(노동자들이 주식을 분산소유)로 갈지 ‘노동자자주관리 회사’(노동자들이 주식을 공동소유)로 갈지를 두고 고민했다.

“파업지도부 안에서 새 회사의 방향에 대한 의견이 갈려 팀을 나눠서 다른 회사들을 찾아서 연구했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우리사주기업은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따낸 과실을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똑똑한 사람이나 노조위원장 등이 차지하고 있더라. 그래서 우리는 1945년 해방 이후 일본 자본이 물러가면서 등장했던 자주관리기업 모델을 투표로 채택했다. 사적 소유 관계를 없애는 대신 공동소유 방식이 자주관리기업의 핵심이다. 당시는 협동조합법이 없었기에 공동소유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믿을 수 있는 분에게 주식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신망이 높던 김정기 당시 서원대 총장에게 가서 지분 50%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더니 흔쾌히 수락해줬다. 이 주식은 엔(n)분의 1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 구성원 전체가 합의하지 않는 한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도록 해놓았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 소유’라고 부른다.”(김재수)

임금 기준 동일한 대표와 노조위원장

하지만 구성원 중 일부는 노조위원장 선거를 기회로 이러한 노동자자주관리기업에 반기를 들었다. 내부 권력을 차지하려는 사람들과 자주관리기업을 지키려는 사람들 간에 갈등이 커졌다. 결국 60여명의 구성원이 2008년 3월 퇴사했다. 이들은 파업 이전에 못 받았던 체불임금과 퇴직금 반환을 요구하면서 이를 위한 담보로 회사의 최대 수익금(60%)인 교통카드에 대한 압류를 걸었다. 압류액(약 46억원)을 갚기 위해 남은 구성원들은 6개월 동안 임금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운영자금조차 모자랐다. 또다시 우진교통이 멈춰 설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구성원들은 근로복지공단에서 1인당 500만~700만원씩을 대출받아 생활비를 간신히 해결하면서도 집을 담보로 대출받은 돈이나 암 진단으로 받은 보험금 등으로 회사채를 샀다.

“교통카드 압류 사태로 6개월 정도 고통을 겪고 나서 왜 그랬을까를 함께 복기했다. 그랬더니 인간은 아무리 노동운동을 하고 스스로 노동자라고 해도 권력과 돈에 대한 욕망을 스스로 통제하기 힘들다, 통제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래서 첫째로 나온 장치가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한 교육이었다. 사내에 만든 자주관리교실이 그것이다. 한번에 20명씩 6개월 동안 노동이 무엇이고, 자주관리기업의 의미와 역사 등등을 배운다. 처음에는 왜 이런 것을 배워야 하느냐, 대표의 재선을 위한 것 아니냐는 등 별별 소리가 다 나왔는데 막상 6개월을 마치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넓어졌고 회사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는 평가가 나오더라. 사람이 변하고, 기업문화가 바뀌었다.

둘째는 직무자치제를 도입했다. 회사의 이익 분배나 복지 등 주요한 의사결정 권한을 주인인 노동자들에게 다 줬다. 버스 배차 등 노동 현장과 관련된 일도 영업부 등 경영팀에서 결정해서 내려보내는 하향식 대신에 현장 자치모임에서 스스로 논의해 결정하도록 했다. 모든 의사결정권을 주인들에게 주니까 집단적 지혜가 발휘되면서 어려움이 있더라도 결국 풀어나가더라. 또, 권력을 둘러싼 사내 갈등이 줄어들거나 거의 나타나지 않게 됐다.”(김재수)

우진교통에서는 임금까지 구성원들이 스스로 정한다. 임금을 결정하는 자주관리공동결정위원회는 경영 쪽 직원 2명과 승무직인 현장 노동자 3명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조직이나 특정세력의 대표자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다. 대표와 노조위원장은 공동협약에 법적으로 서명하기 위해 마지막 단계에 참여한다. 물론 공동협약은 전체 구성원 총회에서 투표로 인준 과정을 거친다. 징계나 포상 등 인사문제나 신규 채용 등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구성원들 스스로가 결정한다.

“자기 임금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은 정말 곤란하고 힘든 문제다. 쌀은 한정돼 있는데 내가 밥을 많이 먹을지 적게 먹을지를 결정해야 하지 않나. 그러나 현장에 모든 권력을 주니까 그걸 견뎌내면서 슬기롭게 결정하더라.”(박우용)

우진교통 구성원들은 2017년 첫 적자를 기록한 뒤인 지난해 사실상의 임금 동결을 선택했다. 호봉 때문에 총액은 대표가 조금 더 많기는 하지만, 대표와 노조위원장에게 적용되는 임금 기준이 똑같다.

내분 뒤 경영참여 등 자치 확대
이사회 격인 자주관리위원회에
현장 선출 노동자가 더 많아
사내교육으로 정체성 강화도

타회사와 월급 같지만 복지 많고
65살까지 근무로 만족감 높아
명실상부한 자주기업 지속 위해
협동조합으로 회사 전환 추진

우진교통은 일반회사의 이사회에 해당하는 자주관리위원회를 한달에 한번씩 연다. 자주관리위원회는 대표와 노조위원장, 각 부서장 등 당연직 7명과 현장에서 선출한 노동자 대표 8명으로 구성된다. 지난 14일 우진교통 본사 회의실에서 열린 자주관리위원회 회의에 앞서 김재수 대표(가운데)와 박우용 노조위원장(오른쪽), 박진하 이사(왼쪽) 등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청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협동조합형 노동자자주관리기업 청주 우진교통 노동조합사무실 벽에는 전태일 열사와 조합 초대위원장인 변정룡 전 지부장의 사진이 걸려있다. 청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몸은 힘드나 정신적으로 편해”

현장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장치로 자주관리위원회를 정식으로 구성한 것도 1차 위기를 극복한 직후였다. 우진교통은 2005년부터 실험적으로 운영하던 연석회의(경영관리팀과 노조 대의원 참여)를 일반 기업의 이사회 격인 자주관리위원회로 격상시켰다. 위원회는 대표와 자주관리실장(총무부장 격), 노조위원장 등 당연직 7명에 현장에서 선출한 8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이사회에 현장 노동자들이 다수인 셈이다.

마침 인터뷰하는 날 한달에 한번씩 열리는 자주관리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회의실 벽을 따라 직사각형으로 배치된 좌석의 한쪽 면에 박우용 노조위원장과 김재수 대표, 박진하 이사 등 3명이 나란히 앉았다. 회의는 노동열사를 위한 묵념에 이어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른 뒤 시작됐다. 김재수 대표의 인사말이 끝나자, 청주시의 버스 준공영제 논의 상황 등에 대한 질의응답, 다른 안건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게 오갔다.

조직 내부갈등으로 인한 위기를 극복해갈 즈음 이번에는 외부에서 도전이 밀려왔다. 대한주택공사(현 LH공사)가 시행하는 ‘청주 동남택지개발사업’으로 본사 건물이 있는 용암동 차고지가 수용될 위기에 처했다. 우진교통 구성원들은 2008년 9월 또다시 머리띠를 묶고는 단일 대오를 갖췄다. 수용 반대 농성을 하는 한편 시내버스의 공공성을 여론에 호소했다. 단결의 힘은 강했다. 결국 우진교통 차고지는 택지개발구역에서 합법적으로 제외됐다.

파업 투쟁과 두차례 위기를 거치면서 노동자자주관리기업 우진교통은 더 튼튼해졌다. 월급 수준은 다른 시내버스 회사와 같은데다가 노동자들은 65살까지 일할 수 있다.

“2008년 악몽을 겪은 뒤에 회사로서는 구성원들에게 보답해야겠는데 성과급을 줄 상황은 아니었다. 대신 찾은 게 62살까지로 돼 있던 정년을 연장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2년을 연장했는데 그래도 퇴직하는 분들이 너무 아쉬워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회사를 지켜왔는데 자신은 세월에 떠밀리는 공허함을 토로했다. 그래서 건강이 허락하고 동료들이 동의할 경우에 1년 더 연장하고 있다.”(김재수)

복지정책도 알차다. 현장의 자치모임별로 2년에 한번씩은 국내여행, 5년에 한번씩은 국외여행을 회사가 지원한다. 사회와 역사를 배우는 품격 있는 여행에 대한 구성원들의 평가가 좋다. 자녀 입학금 지원(50만원)과 무상 독감주사, 생일 케이크 보내기 등 작은 배려에도 구성원의 만족도가 높다.

“다른 버스회사에 다니다가 2013년에 입사했다. 우진교통이 민주노총이라는 것을 알고는 처음에는 망설였다. 이직할 때 민주노총 출신은 다른 회사에서 잘 안 받아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와 보니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버스 노선이 많아서 육체적으로는 더 힘들지만 할 말을 다 할 수 있어 정신적으로는 훨씬 좋다. 자주관리교실도 처음에는 왜 이런 것을 하나 싶었는데 배우는 게 많아서 좋았다.”(조호진·48·승무직)

“다른 회사에 있다가 2년 전에 경력으로 입사했는데 99% 만족한다. 일하는 분위기가 무엇보다 좋다.”(이기환·59·정비직)

그러나 우진교통이 풀어야 할 숙제도 여전히 많다. 우선 회사의 소유구조 문제다. 실제로는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운영하는 기업이지만 법적으로는 주식회사다. 지분 50%를 가지고 있는 김정기(75) 전 총장이 대주주다. 사회적 약속과 선의에 기초한 주식 위탁 체제로 계속 갈 수는 없다. 자주관리기업에 맞는 회사 형태를 갖춰야 한다.

“2005년 초 찾아와서 주식을 맡아달라고 하길래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나를 이용하라고 했더니 이 사람들이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이름 없는 노동자들이 회사를 잘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회사의 구조를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하도록 바꿔야 한다. 제가 딴마음 먹고 주식을 갖고 튀면 안 되지 않나. 하하.”(김정기 전 총장)

우진교통의 노동자들은 임금과 복지가 다른 회사에 비해 좋은데다가 65살까지 일할 수 있어 회사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우진교통의 제2차고지에서 한 노동자가 차를 정비하고 있다. 청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협동조합형 노동자자주관리기업 우진교통의 제2차고지에 마련된 승무원 휴게실 모습. 청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차세대 리더 육성 과제

우진교통은 주식회사 대신 협동조합으로 갈 계획이다. 걸림돌은 재무구조다. 전 경영진한테 넘겨받은 부채 때문에 자본이 잠식당한 상태여서 현행법상으로는 협동조합으로의 전환이 안 된다. 새로운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우진교통을 인수하는 것 등 여러 방안을 놓고 협동조합 전문가들과 상의하고 있다.

투쟁 경험을 공유한 1세대가 물러난 뒤에 회사를 안정적으로 끌고 갈 차세대 리더를 키우는 것도 시급하다. 김재수 대표는 지난해 한 공공기관의 책임자 자리를 제안받은 뒤 자신의 거취에 대해 구성원들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이번에도 구성원들은 그의 잔류를 투표로 요구했다. 하지만 ‘김재수 없는 우진교통’은 시간문제다.

사내 민주주의도 여전히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우진교통은 주인들끼리 치열하게 토론해서 결정하면 모두가 따르는 이른바 민주집중제를 실천하고 있다. 그럼에도 생각이 다른 소수자는 있을 수밖에 없다. 기자가 간 날 노조 사무실 앞 게시판과 제2차고지 휴게실 벽에는 회사의 자주관리교실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한 노조원을 규탄하는 구성원들의 성명이 여럿 붙어 있었다. 과거 조직 분열로 위기를 겪었던 구성원들의 우려가 반영된 것이겠지만, 다수와 다른 생각을 가진 구성원들과 어떻게 같이 지내야 하는지는 또다른 문제이다.

몬드라곤 등 자본주의 대안으로 주목
노동자자주관리기업이란
우진교통, 키친아트, 해피브릿지
우리나라에서도 성공 사례 등장

노동자자주관리기업이란 말 그대로 노동자 스스로가 경영하는 기업을 뜻한다. 노동자가 반드시 주인(소유)이 아니어도 자주관리는 가능하지만, 대개는 노동을 제공하는 노동자가 기업의 주인이다. 노동자자주관리기업은 주식에 따라 1표를 행사하는 주식회사와 달리 구성원이 똑같이 1표를 행사하며, 수익 배분도 구성원이 결정한다.

노동자자주관리의 역사는 19세기 후반 유럽의 혁명적 생디칼리스트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노동자자주관리는 20세기 들어서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초기 사례는 1917년에서 27년까지 활발하게 운영됐던 미국 켄터키주의 힘러(Himler)석탄회사가 대표적이다. 석탄 가격 하락과 대기업과의 경쟁에 밀려 개인 소유주들에게 매각돼 사라지긴 했지만, 힘러석탄회사는 이후 노동자자주관리회사 탄생에 영감을 줬다.

사회주의 체제였던 유고슬라비아(1945~1992년)도 오랫동안 국가 차원에서 노동자자주관리제를 실시했다. 공산당이 거시 경제정책을 관리했지만, 기업은 노동자들이 자율적으로 직접 운영했다.

유고슬라비아가 노동자자주관리제를 실시하던 초기인 1955년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서 5명이 모여 울고르(Ulgor)라는 기업을 설립했다. 이 기업은 동등한 투표권을 가진 노동자가 모든 경영상의 결정을 내리고, 이윤은 노동자의 자본 계정으로 직접 분배되는 식으로 운영됐다. 이 기업은 이듬해 몬드라곤 마을의 한 건물로 이사했다. 오늘날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인 협동조합인 몬드라곤의 출발이다. 몬드라곤은 지난해 말 직원 수 약 8만5천명에 매출과 고용에서 스페인 10대 기업 중 하나다. 몬드라곤처럼 협동조합은 대표적인 노동자자주관리기업이다. 2009년 비영리 클리블랜드 재단이 출연한 자본금으로 설립된 미국 오하이오주의 에버그린 협동조합도 대표적인 예다.

1970년대 이탈리아와 프랑스, 포르투갈, 영국 등 유럽과 2000년대 초반 아르헨티나 등 남미에서도 노동자자주관리기업이 많이 나타났다. 부실 경영 등으로 인해 폐업이나 구조조정이 추진될 때 노동자들 주도로 기업을 인수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엄청난 부채를 떠안고 노동자자주관리기업이 출범했지만, 대략 87%의 기업이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노동자 주인이 되다-우진교통 사례를 중심으로’, 국제전략센터 연구보고서, 2018년 2월)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직후 주요 기업들을 해당 노동자들이 인수해 자주적으로 관리한 역사가 잠깐 있었지만, 다시 등장한 것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 사태 이후부터였다. 부도난 회사의 브랜드와 자산 일부를 넘겨받아 출발한 키친아트(2001년), 기존 회사를 노동자들이 인수한 대구의 광남자동차(2002년)가 본격적인 노동자자주관리기업 시대를 열었다. 이후, 시내버스회사인 우진교통(2005년)에 이어 진주의 삼성교통(2005년), 대구의 달구벌버스(2005년), 진주의 시민버스(2007년)가 잇따라 노동자자주관리기업으로 새 출발 했다.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면서 노동자협동조합이 많이 나타났다. 직원협동조합이라고도 부르는 노동자협동조합은 조합원과 직원이 분리되는 생협(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나 신협, 농협과는 달리 조합원이 직접 해당 기업의 직원으로 일한다. 원래 주식회사로 출발했다가 2013년 협동조합으로 바꾼 해피브릿지가 대표적이다. 쿱택시와 도우누리, 우렁각시 등도 노동자자주관리기업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노동자자주관리기업 역시 내부적인 갈등과 경영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키친아트는 초반에 경영진이 공금을 횡령했다가 퇴출됐으며, 한국택시협동조합도 지난해 초대 박계동(전 국회의원) 이사장이 불투명한 운영 등의 혐의로 해임되는 등 내분을 겪고 있다. 박강태 ‘일하는 사람들의 협동조합연합회’ 회장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노동자협동조합에서 초기의 갈등과 내홍은 한번씩 겪는 것이다. 몬드라곤도 그랬다”며 “난관을 헤치고 빨리 정착하기 위해서는 우진교통처럼 민주적인 리더십과 교육을 통한 구성원들 간의 정체성 공유 등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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