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3.16 09:10
수정 : 2019.03.16 09:31
[토요판] 커버스토리
재일 한국인 양심수 구명운동사
처음에는 대학교수 등 지식인 중심
70년대 중반 일반시민 참가로 확산
|
재일한국인 정치범 구원운동의 산증인인 요시마쓰 시게루 목사(오른쪽)가 지난 7일 도쿄 오지역 앞 공원에서 와타나베 가즈오 ‘한국 양심수를 지원하는 전국회의’ 대표와 함께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
재일 한국인 ‘정치범’ 구원운동은 대학교수와 종교지도자 등 일본의 지식인에 의해 시작됐다. 요시마쓰 시게루(86) 목사가 대표적이다. 도쿄 기타구 오지의 작은 교회에서 오랫동안 목회활동을 한 요시마쓰 목사는 1960년대 말에는 베트남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어린이 돕기 운동을 주로 했다.
그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화가 도미야마 다에코가 이케부쿠로에 있는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운영하는 지식인 공부모임에서 김지하에 관한 얘기를 들으면서부터였다. 이후 1971년 가을 서승·서준식 형제를 위한 구원집회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포항제철소 건설과 관련한 기술자문에 응하다 간첩 혐의로 구속된 김철우 박사의 재판을 방청하는 등 재일 한국인 정치범에 대한 활동에 참가했다.(<조국이 버린 사람들>, 김효순 저)
당시 일본에서의 구원운동은 대부분 개별적인 모임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사형 집행 저지 등을 위해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으려면 일본 의회나 정부를 움직여야 하는데 개별 구원회로는 그런 힘이 부족했다. 이에 요시마쓰 목사는 전국적인 모임을 추진해 1976년 6월 ‘재일 한국인 정치범을 지원하는 전국회의’를 결성했다. 전국회의 대표로는 국제법 전문가인 미야자키 시게키 메이지대 교수가 선출됐으며, 요시마쓰 목사는 사무국장을 맡았다. 이후 그는 전국회의의 대표를 하다가 1993년쯤 최철교 구원회를 이끈 와타나베 가즈오에게 바통을 넘겼다.
전국회의가 결성된 뒤 구원운동의 규모는 훨씬 커졌다. 전국회의는 1977년 9월 도쿄 한국대사관 맞은편 건물 벽에 ‘양심수에 대한 사형과 중형 판결에 항의’하는 대형 펼침막을 내건 데 이어 한국대사관 주변에서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열었다. 또 일본 정부에 재일동포 양심수들에 대한 긴급 인권구제를 요청했으며, 도쿄 등 일본 전역에서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한국 민주화가 이뤄진 뒤인 1999년 전국회의는 ‘한국 양심수를 지원하는 전국회의’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일본의 구원운동이 이처럼 활발했던 것은 일반 시민들이 운동의 중심에 나서면서부터였다. 서승 형제 사건 때만 해도 지식인이 중심이었으나, 1975년 재일동포 모국 유학생 17명이 구속 기소(11·22 사건)된 뒤에는 피해자들의 학교 동창이나 동네 이웃, 학부모, 교사 등 평범한 시민들이 앞장서 구원회를 구성했다. 최철교 구원회의 주요 회원 중 한 사람인 고치 도루는 최철교 집에서 가까운 병원의 원무과 직원이었다. 이동석 구원회를 이끈 다무라 고지는 대학생 출신의 공장 노동자였다. 이철 구원회 역시 이시이 히로시처럼 중·고교 동창이 주축을 이뤘다. 이철 구원회는 지금까지도 조직을 유지하면서 친목 도모와 함께 재일 한국인 등과 관련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학연과 지연 등으로 얽힌 이들은 연대의식이 강해서 각종 구원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들의 풀뿌리 활동에 힘입어 여러 지방의회들은 양심수 석방 결의서를 채택하기도 했다. 구마현의 기초단체 몇곳에서 1976년 ‘이철 구명 탄원 결의’를 한 것, 오사카시의회가 ‘이동석씨의 조속한 석방에 관한 요망 결의’(1976년 6월), ‘이동석의 석방과 조속한 귀일을 요망하는 결의’(1980년 7월), ‘윤정헌씨의 조속한 석방을 요구하는 요망 결의’(1985년 7월) 등이 대표적이다.
요시마쓰 목사는 재일 한국인 양심수 구원운동을 했던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2년 전 은퇴한 뒤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93)를 혼자 돌보고 있다. 지난 7일 오전 도쿄 오지역 앞 카페에서 만난 요시마쓰 목사는 “5·18 광주항쟁 직후 한국대사관 앞에서 데모를 하다가 기동경찰에 붙잡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하는 등 때때로 힘들고 괴로웠지만, 싸움 자체는 즐거웠다. 더구나 그들이 다 무사히 돌아온 것은 기적이다. 우리의 운동이 조금은 힘이 됐을 것이다”라며 “일부 사람들은 구명 대상인 사람의 인간됨이 어떻느니, 그가 돌아온 뒤에 어떻게 변했느니 하면서 구원운동의 성과를 낮춰 평가하기도 하는데 저는 그들이 살아온 것 자체가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생명이 중요한 것이지 석방 뒤에 어떻게 변하는지는 우리가 상관할 바가 못 된다. 본래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 저는 구원운동에 감사한다. 덕분에 타락한 목사가 안 됐다”고 말했다.
도쿄/글·사진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
1974년 군보안사령부에 붙잡혀 간첩으로 조작된 최철교씨의 부인 손순이(오른쪽 둘째)씨와 자녀 5명 등이 도쿄에서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일본의 진보적 월간지 <세카이>(1980년 12월호)에 실린 사진.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