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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07 09:59 수정 : 2019.09.07 14:52

[토요판] 커버스토리
당신의 호칭은 안녕하십니까?

스타트업 왓챠, 카카오 등 영어 호칭
회의 땐 인턴도 대표도 직함 안불러

한화·KT·포스코, ‘매니저’ 호칭 쓰다
업무 혼선 빚자 기존 직함으로 돌아와
외국계도 상사 스타일 따라 천차만별
사장님 ‘SAJANGNIM’ 표기하기도

가족간에도 호칭 혁명 실험 중
아주버님·동서를 ‘○○씨’로 불러
‘씨’나 ‘이름’ 부르는 부부도 많아

대학가, 선배를 ‘씨’ ‘님’으로 호칭
“평소 선배라는 말 거의 쓰지 않아”
신은초, 교사도 학생도 서로 ‘님’

호칭은 상대방을 저울에 올려놓고 잰 무게를 언어에 담는 행위다. 우리는 매일 누군가를 호칭할 때마다 ‘나와 너는 어느 정도 중요한 관계’라고 선언하는 셈이다. 그림 김중화 작가
“저기요.” 서점 직원 이동진(감우성)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유은호(손예진)를 쳐다본다. 책을 찾아달라는 은호의 부탁을 들어주며 둘의 인연이 시작된다. 동진과 은호는 서로를 “은호씨” “동진씨”로 부른다. 결혼 뒤 둘의 호칭은 “자기야”로 바뀐다. 첫아들 동이의 사산을 계기로 갈라선 둘은 서로의 빈자리를 메우려 티격태격하면서도 만난다. “너” “어이” “인간아”.

2006년 방영한 드라마 <연애시대>는, 헤어지고 시작된 부부의 이상한 연애를 그린다. 주인공 부부의 호칭은 첫 만남의 “저기요”에서 이혼 뒤 “어이”까지 변주한다. 드라마 마지막 회에서 동진과 은호가 재결합을 약속할 때 은호는 동진을 “당신”이라고 부른다.

2005년 출간된 책 <한국 사회와 호칭어>는 머리말에서 ‘한국인은 이름을 호칭어로 사용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한다’고 분석했다. 이름 호칭을 꺼리다 보니 드라마 <연애시대>에서 보듯 같은 사람끼리도 관계의 변화에 따라 호칭이 수시로 달라진다. 그런데 최근 본인 이름이나 영어 이름을 활용한 수평적 호칭을 쓰려는 변화의 움직임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호칭 변화를 이끄는 회사와 가족, 학교, 다중이용시설(서비스·공공기관)의 호칭어를 통해 2019년 ‘호칭 세태’의 현주소를 들여다봤다.

직함이 뭐예요?

“티팍, 이 콘퍼런스 어떻게 할까요?” 루카스는 며칠 전 회사 공식 계정으로 들어온 콘퍼런스 주최사의 참석 요청 전자우편을 확인하고 티팍에게 메신저로 의견을 구했다. “루카스, 그거 꼭 (제가) 갈 필요 있을까요?” 루카스는 참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티팍은 “그럼 일단 스케줄 한번 더 체크해보고 얘기해줄게요”라고 답했다.

티팍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Over The Top) 왓챠플레이 운영사인 왓챠의 박태훈 대표다. 루카스는 회사에 갓 입사한 직원이다. 루카스는 처음엔 영어 이름이 어색했지만 지금은 익숙하다. 소통도 훨씬 수월해졌다. 왓챠는 전 사원이 서로 영어 이름을 부른다.

왓챠가 영어 이름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누군가의 발언이 권위나 지위가 아니라 그 내용 자체로 판단돼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루카스는 “매주 한 차례 회사 전 직원이 참여하는 전체회의를 보면 누가 팀장이고 누가 이사인지, 누가 인턴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기 의견을 말한다”고 말했다.

지난 7월 왓챠의 전체회의가 열린 대회의실. 티팍이 회의를 마치기 전 “하실 말씀 있는 분?”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입사한 지 한달 된 캐서린이 번쩍 손을 들었다. “티팍, 입사 면접할 때 든 생각인데요. 지원자들도 왓챠의 이용 고객이잖아요. 불합격하더라도 왓챠에 좋은 인상을 가질 수 있도록 현재 인터뷰 방식을 개선하면 어떨까요.” 이에 즉석에서 서로의 경험이 자유롭게 오갔고 티팍은 가이드라인을 만들기로 했다.

정보통신(IT)·게임 업종, 스타트업 중에는 왓챠처럼 수평적 호칭을 쓰는 곳이 많다. 네이버는 ‘님’ 또는 ‘매니저’를, 게임업체인 넷마블·넥슨코리아·데브시스터즈·엔씨소프트는 ‘님’을 이름에 붙여 호칭한다.

카카오도 영어 이름으로 서로를 부른다. 카카오 여민수·조수용 대표도 ‘대표님’이 아니라 각각 ‘메이슨’ ‘션’으로 불린다. 영어 이름을 쓰면서 경력과 연차, 나이에 관계없이 직원들이 솔직하게 의견을 낸다.

지난 4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카카오 판교오피스에서 열린 신규 서비스 기획 태스크포스(TF) 팀 회의. 개발자와 기획자, 디자이너 등 업무가 다른 6명의 팀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신규 서비스 오픈 시점에 맞춰 어느 정도의 기능을 탑재할지 각론이 벌어졌다.

팀장 ‘제니’가 “몇 가지 주요 기능을 먼저 선보인 뒤 이용자 반응에 맞춰 업데이트하는 게 좋겠어요”라고 입을 열었다. 개발자 ‘칼’은 생각이 달랐다. “제니, 서비스 완성도를 위해서는 주요 기능에 덧붙일 부가 기능을 함께 선보여야 해요.” 칼은 제니를 계속 설득했다. 기획자 ‘에밀리’는 부가 기능 추가 문제로 서비스 출시 일정이 지연되면 안 된다고 ‘제니’ 편에 섰다. ‘제니’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칼, 서비스 완성도는 포기 못 하겠다는 거죠?” ‘칼’은 “그건 가장 우선순위로 고려해야 할 가치예요”라고 맞섰다. 제니는 팀원들의 의견을 종합적으로 모아 예정된 일정을 다시 조정해 부가 기능을 덧붙여 서비스를 출시하기로 결정했다.

카카오 커뮤니케이션팀의 ‘린지’는 “동등한 영어 이름으로 호칭하다 보니 회의에서도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아이디어나 논리 중심으로 결정된다. 팀장 눈치 봐서 팀장이 제시한 방안으로 팀원들이 따르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

국내 대기업 중 가장 처음 수평적 호칭 제도를 도입한 곳은 씨제이(CJ)그룹이다. 씨제이는 2000년 1월1일부터 인턴사원부터 회장까지 전 임직원이 사내에서 이름에 ‘님’을 붙여 부른다. 명함에도 소속 부서와 이름만 있다. 씨제이 한 부장은 “내부 직급은 있지만 신입사원도 나도 서로를 ‘○○님’으로 부른다”고 말했다.

다른 기업들도 호칭 변화 바람에 합류하고 있다. 에스케이(SK)그룹 각 계열사는 ‘님’ ‘매니저’ ‘피엘’(PL·프로젝트리더), 삼성전자는 ‘님’ ‘프로’, 제일기획은 ‘프로’, 신세계는 ‘파트너’, 아모레퍼시픽·엘지(LG)유플러스·유한킴벌리·웅진코웨이는 ‘님’ 호칭을 쓴다.

스타트업과 정보통신(IT) 업종 기업 중에는 직급에 따른 호칭 문화를 깨고 신입사원부터 대표까지 누구나 동등하게 ‘님’이나 영어 이름을 쓰려는 곳이 늘고 있다. 그래픽 김은정 기자 ejkim@hani.co.kr

수직적 조직 문화도 함께 변해야

국내 기업 중에는 수평적 호칭 제도를 도입했다가 다시 직급 호칭으로 돌아간 곳이 여럿 있다. 케이티(KT)는 2009년, 포스코는 2011년, 한화그룹은 2012년 ‘매니저’로 호칭을 통일했으나 몇년 안 돼 제도를 없앴다. 바뀌지 않는 수직적 조직 문화, 업무 책임의 불명확성, 호칭 문제로 인한 다른 회사와의 업무 혼선, 승진 의욕 저하 등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일부 직원 사이에서는 모시는 상사의 호칭이 ‘부장’에서 ‘○○씨’로 바뀌기만 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지난해 5월 구인·구직 중개 업체인 ‘사람인’이 기업 962곳을 대상으로 ‘기업 내 직급·호칭 파괴 제도’를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65.4%가 ‘효용성이 낮다’고 답했다.

최근 직장 내 호칭 문화 개선 움직임은 과거와 견줘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1960~70년대 남자 직원은 ‘김형’, 여자 직원은 ‘미스 리’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대한항공 여자 승무원들과 항공정비사들이 서로 ‘아가씨’ ‘아저씨’로 불러 입씨름이 벌어졌다는 기사(<경향신문>)도 있다. 과거보다는 크게 개선되긴 했지만 직장 내 호칭 문화가 평등한 쪽으로 한 단계 더 올라서려면 호칭과 함께 상하 위계질서에 익숙한 인식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엘지 계열사의 한 부장은 “엘지도 사원, 선임, 책임으로 직급 체계를 단순화하고 호칭도 서로 ‘선임님’ ‘책임님’ 등으로 부르도록 했다. 현실에선 윗사람이 ‘님’을 빼고 ‘김 책임’으로 부른다. 그냥 ‘김’이라고 성만 부르기도 한다. 중요한 건 호칭과 함께 서로를 대하는 문화도 수평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에스엠씨앤씨(SM C&C)의 한 부장은 “광고업은 문화 자체가 보수적이고 직급에 따라 일의 중요도가 다르다 보니 실제 일할 때는 직책을 부른다. 위계질서가 그대로인데 호칭만 서로 똑같이 불러준다고 뭐가 달라지겠나”라고 말했다.

국내 한 기업 대표로 있는 ㄱ씨는 과거 다른 기업을 다니다 임원으로 이직했다. 이 회사는 ‘님’ 호칭을 쓴다. ㄱ씨는 직원들과 첫 상견례를 했는데 신입사원이 ㄱ씨에게 대뜸 ‘○○님’으로 부르며 말을 건넸다. ㄱ씨는 순간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석달 정도 지나서야 ‘님’ 호칭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가끔 당혹스러운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라고 했다.

영어 이름 호칭이 보편화한 국내 외국계 회사의 경우 상급자가 외국인이더라도 위계질서를 따지는 스타일이면 꼬박 존칭을 쓰기도 한다. 특히 전자우편 등으로 공식 문서를 보낼 때는 영어 이름 옆에 한글을 영어로 표기한 직급 호칭을 붙여준다고 한다. 이사님은 ‘ISN’(ISANIM의 줄임말), 사장님은 ‘SJN’(SAJANGNIM의 줄임말) 등이다. 한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김아무개씨는 “외국인 중에도 권위적인 사람이 있다. 국적이 아니라 사람 스타일에 따라 호칭은 달라진다. 한국 직원들 사이에선 신입이 호칭 바꾸란다고 곧장 ‘○○님, 자료 보내주세요’라고 하면 솔직히 싹수없다는 인식이 생긴다”고 말했다.

수평적 호칭을 쓰는 기업이 직급 호칭을 쓰는 기업 사람들과 회의나 식사를 할 때 불편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한 기업의 부장은 “협력사가 자기들끼리는 위아래 구분 없이 ‘프로’라고 부른다. 업무상 식사를 하는데 그쪽 사원이 자기 부장을 ‘김 프로’라고 부르더라. 그런데 그 부장이 나와 직급이 같다 보니 나까지 동급이 되는 기분이 들어 불쾌했다”고 말했다.

‘나는 당신들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아주버님, 형님, 잘 부탁드려요.” 남동생이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라며 누나 부부에게 소개하는 자리. 배윤민정씨는 올케가 될 ㄴ씨가 자신은 ‘형님’, 자신의 남편은 ‘아주버님’이라고 부르자 새로운 호칭을 제안했다.

“우리 서로 ‘○○씨’라고 부르죠.”

ㄴ씨는 “‘언니’까지는 괜찮은데 ‘○○씨’는 너무 힘들 거 같아요”라고 했다. 호칭 줄다리기 끝에 배윤씨는 ㄴ씨를 ‘○○씨’로, ㄴ씨는 배윤씨를 ‘언니’로 부르기로 합의했다. 이제 배윤씨 남편과의 호칭 문제가 남았다. 가족관계 호칭상 서로 ‘아주버님’ ‘처남댁’이 맞지만 배윤씨는 언뜻 듣기에도 어감이 균등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결국 남편은 ㄴ씨를 ‘○○씨’, ㄴ씨는 ‘아주버니’라고 호칭하기로 했다.

배윤씨는 지난 6월 책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를 펴냈다. 이 책은 시가 구성원들에게 수평적으로 가족 호칭을 바꿔보자고 했다가 격렬한 반대에 부닥친 경험들을 소개한 자전적 에세이다. 그는 가족 호칭에 깔린 가부장 중심의 위계와 권력,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여성 차별과 억압의 문제를 제기했다.

“호칭 대신 이름에 ‘님’ 자를 붙여 부르면 어떨까요?” 이야기의 시작은 배윤씨가 시댁에서 내놓은 이 한마디에서 비롯됐다. 배윤씨 남편의 형 부부가 강한 거부 반응을 보여 갈등을 빚었고, 아직 만족할 만한 호칭은 찾지 못했다.

배윤씨와 시아버지, 시어머니는 서로 ‘아버지’ ‘어머니’ ‘민정아’로 부른다. 시어머니가 “너는 모두를 ‘님’으로 부르는데 정작 너는 ‘님’으로 불리지 못해 속상하겠다”며 호칭 변화에 동의했다고 한다. 남편의 형 부부는 배윤씨를 아직도 ‘동서, 제수’로 부르고, 배윤씨는 호칭을 ‘아주버님, 형님’에서 ‘○○씨’로 바꿨다.

배윤씨는 “상대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씨’라고 부르는 건 가족 호칭의 불편함을 모두가 공유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족 전체가 이 불편함을 공유하다 보면 언젠가는 더 만족스러운 호칭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통 중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름을 부르는 호칭 문화가 확산하면 좋겠다. 가족 안에서 아버지, 며느리 등의 역할로 만나는 것보다는 하나의 인격체로 만나면 훨씬 더 행복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근 일부 가정에선 부모에게도 이름에 ‘씨’를 붙여 호칭하기도 하지만, 대다수 가정에선 항렬, 나이, 서열, 성별 차이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질서로 이해된다. 여성의 경우 결혼한 뒤에는 남편의 가족에 편입되다시피 해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따라서만 의존적으로 호칭이 발생하는 경향이 짙다.

과거 언론 기사들을 보면 이런 인식이 각 가정에 얼마나 예전부터 깊이 자리잡고 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1966년 <동아일보>에 실린 ‘네살배기 애기씨’라는 제목의 한 미혼 독자 기고를 보면, 7형제 집 맏며느리로 시집간 한 친구가 4살짜리 시누이를 ‘애기씨’로 불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독자는 ‘하녀가 아닌 바에야, 동생들을 도련님, 작은아씨라고 부르는 것보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가족적이고 친근하지 않을까?’라고 썼다. 이 말을 자기 어머니에게 하자 ‘그 시고 떫은 소리 말아라. 우리도 다 그렇게 살아왔다’는 말이 되돌아왔다고 한다.

1980년 3월 <동아일보>의 ‘핵가족 여파 호칭 애매해졌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선 1970년대 남편 호칭이 ‘아빠, 주인, 큰애기, 영감’ 등으로 사용됐다고 나온다. 1993년 9월 <경향신문>의 ‘남편 칭할 때 예법’이란 제목의 기사에서는 시부모에게 남편을 칭할 때는 ‘지아비’로 부르는 게 예법에 맞는다며 결혼한 지 1년 된 김효정씨가 설날에 시부모님 앞에서 남편을 ‘영찬씨’라고 불렀다가 야단을 맞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가정에서 가부장적 질서가 뿌리 깊다 보니 부부끼리 편한 호칭을 써도 시가 쪽에서는 여자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경우가 많다. 시어머니, 시아버지를 각각 엄마, 아빠로 부르는 직장인 정은수(가명)씨. 동갑내기 남편과도 “은수야” “승민아”라고 호칭한다. 그런데 집안 어른들이 함께하는 자리에서 정씨는 남편을 “승민아”라고 부를 때마다 보이지 않는 압력을 느끼고, 잔소리를 들을 때도 있다. 반면 남편은 그런 자리에서 “은수야”라고 불러도 불편한 적이 없다고 했다.

40대 초반 이승진(가명)씨는 남편과 서로 이름에 ‘씨’를 붙여 부른다. 이씨 남편은 연애 시절부터 존중의 의미로 ‘승진씨’라고 호칭했다. 남편은 이름을 불러야 나이 들어서도 누구의 엄마로 기억되지 않는다고도 했다. 이씨는 처음엔 직장 동료같이 딱딱한 느낌이라 싫었지만 결혼하고는 오히려 듣기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나이 많은 지인들이나 시가 어른들 앞에서는 서로 ‘여보’로 부르기로 했다. 이씨는 “괜히 한소리 들을까봐 불안하게 서로를 부르느니 어른들 정서에 맞추는 게 마음 편하다”고 말했다.

요즘 대학가에서는 친하지 않은 선배나 조별 모임에서 만나는 선배를 부를 때는 ‘씨’ 호칭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서강대 뮤지컬 극단(동아리) 마이티(MITY)의 회의 모습. 마이티 제공

대학가에 부는 ‘~씨’ 바람

지난 5월 서울의 한 대학 수업에서 만난 조 모임 학생들이 발표를 앞두고 카카오톡에서 대화를 시작했다. 16학번 선배 김민아(가명)씨가 18학번 후배 박지선(가명)씨에게 말을 건넸다. “지선씨, 맡은 부분 정리되셨나요?” 지선씨가 답했다. “네, 민아씨, 제가 구글 닥스에 공유할게요. 주현씨는 자료 조사 다 하셨어요?” 17학번 이주현씨는 후배 지선씨에게 “그건 지선씨한테 전자우편으로 보낼게요”라고 했다.

요즘 대학가에서는 친소 관계가 없는 선배에게는 ‘선배’보다는 ‘○○씨’ 또는 ‘○○님’이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라고 한다. 물론 친한 선후배 사이에서는 오빠, 언니, 누나, 형으로 부르고, 선후배 질서가 엄격한 학과는 선배 호칭이 여전하다. 하지만 수업 때 알게 된 사이나 같은 학과라도 어중간한 관계면 대체로 ‘씨’와 ‘님’을 쓴다. 상대를 낮추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서로 존중하는 뜻에서 예우를 갖춘다는 것이다.

대학생 이아무개씨는 “선배라는 단어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말이다. 미디어학부 등 위계질서가 센 곳은 아직 선배라고 하지만 다른 학과는 거의 못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제대 뒤 복학해 8학기째인 대학생 정아무개씨는 “애매할 때는 서로 ‘○○씨’ 부르는 게 선배 입장에서도 편하다. 요즘은 후배가 ‘씨’라고 한다고 뭐라 하면 꼰대 소리 듣는다. 솔직히 호칭에 돈 드는 것도 아니지 않나”라고 말했다.

조혜정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가 쓴 ‘남녀공학문화’(1986년)라는 제목의 논문은 대학가의 시대별 호칭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있다. 1960년대는 동성 간엔 언니 또는 형, 이성 간엔 ‘○○○씨’로 호칭이 통용됐다. 1970년대 후반 들어 남녀 간 상호작용이 잦아지며 이성 간에 ‘형’이란 호칭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학생 수가 많이 늘어난 1980년대는 동급생, 이성 간에도 반말이 일반화했고, 이성 선배를 ‘오빠’라고 부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남학생 후배는 이성 선배를 ‘누나, 선배, 언니, 마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선배’라는 호칭이 대학가에서 많이 쓰였다.

지난 2일 열린 서강대 뮤지컬 극단(동아리) 마이티(MITY)의 정기회의. 회장이 팀별 브리핑을 요청하며 “조명팀부터 시작할게요, 조명감독님 나와주세요”라고 회의 시작을 알렸다. 조명감독은 준비 상황을 보고하다가 “무디(무대디자인의 줄임말) 팀장님! 실습에 무디팀 참관이 가능하실까요?”라고 물었다. 무대디자인 팀장은 “그건 무대감독님께 따로 여쭤보셔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이들은 서로 친분이 두텁지만 회의 시작 뒤부터는 팀장님, 감독님, 회장님 등 직책만 호칭으로 사용했다. 마이티 소속 오유민씨는 “회의 때는 엄격하게 직책으로 부른다. 메신저 동아리방에서 대화할 때도 마찬가지다. 일로 만날 때는 언니, 오빠, 형 등 위계가 내포된 표현은 안 쓴다”고 말했다.

수평적 호칭을 쓰는 초등학교도 있다. 올해 1~2월 서울시교육청은 권위주의적 문화를 없애겠다며 교사와 학생을 포함해 학교 모든 구성원의 호칭을 ‘○○쌤’ ‘○○님’으로 통일하는 수평적 호칭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가 반발 여론이 거세게 일자 학교 자율에 맡기는 쪽으로 물러섰다. 서울 양천구 신은초등학교는 서울시교육청 권고안과는 무관하게 2011년 개교 때부터 교사가 학생을 부를 때, 학생과 학생 사이에서 이름에 ‘님’을 붙여 호칭하도록 했다.

신은초 쪽 관계자 이야기를 종합하면, 8년 전 학교가 문을 열 때 교직원 모임인 ‘다모임’에서 학교 폭력을 예방하려고 이런 호칭 문화를 쓰기로 합의했다. 교사가 학생을 부를 때 ‘다솜님’ 등으로 부르고, 학생들은 ‘선생님’으로 부른다. 일부 학생들은 선생님을 친근한 의미로 ‘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학생들은 학년에 상관없이 서로 이름에 ‘님’을 붙여 부른다. 신은초의 한 교사는 “학생 간 다툼이 확실히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학부모들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야쿠르트 아줌마’에서 ‘프레시 매니저’로

한국야쿠르트는 지난 3월 전국을 누비는 방문판매원의 호칭을 48년 만에 ‘프레시 매니저’로 바꿨다. 어릴 적 한번쯤 불렀을 법한 ‘야쿠르트 아줌마’란 호칭은 공식적으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동안 회사 안에서는 ‘여사님’으로 불러왔다. 한국야쿠르트의 한 관계자는 “프레시 매니저들을 예우하고 대외적 가치를 높이려는 측면에서 호칭을 바꿨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다중이용시설에서는 상대를 생략해 부르는 ‘저기요’ ‘여기요’, 친족어인 ‘어머님’ ‘아버님’ 또는 ‘이모’ ‘삼촌’, ‘아줌마’ ‘아저씨’ 등 호칭이 여전하지만, 객관적 호칭을 선호하는 공감대가 서서히 확산하고 있다. 일례로 대형마트·백화점은 ‘파트너’ ‘매니저’ 등 공식 호칭이, 미용실은 별칭 또는 ‘별칭+님’ 호칭이 많아졌다.

이런 현상은 지난해 11월 국민권익위원회와 국립국어원이 ‘일상 속 호칭 개선 방안’을 설문조사해 분석한 자료에서도 나타난다. 식당·마트 등 서비스기관과 주민센터·병원 등 공공기관에서 손님·방문객을 부를 때 적절한 호칭을 물은 결과(1734명 복수 응답), ‘손님·고객님·회원님·환자분’이 37.6%로 가장 높은 응답 비율을 보였다. 이어 ‘이름+님’(32.5%)과 ‘이름+씨’(12.4%), ‘선생님’(10.9%) 순서대로 답했다. 반대로 같은 시설에서 손님·방문객이 기관 직원을 부를 때 적절한 호칭을 물은 결과, 직함(30.1%)과 ‘선생님’(19.4%), ‘이름+님’(17.3%), ‘여기요·저기요’(11.6%), ‘이름+씨’(10.4%), ‘사모님·사장님’(6.2%) 차례로 높은 답변 비율을 보였다. 국민권익위와 국립국어원은 “손님과 직원 사이에는 객관적·직무적 호칭을 가장 선호하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국립국어원은 2011년 만든 ‘표준 언어 예절’(일상생활에서 호칭어 등과 관련해 혼란을 덜고자 마련한 언어 예절 길잡이)을 시대 변화와 대중 요구를 반영해 개선한 세부안을 지난해 마련했다. 이 내용이 담긴 ‘사회적 소통을 위한 언어 정책 연구’란 제목의 자료는 전통적 호칭과 함께 언중이 새롭게 쓰고 있어 ‘불러도 가능한’ 호칭을 정리해 제시했다. 예컨대, 전통 예절로는 ‘도련님’ ‘서방님’ ‘아가씨’ 호칭이 사용되지만 ‘○○씨’ ‘동생(님)’으로도 사용 가능하다고 돼 있다. 김미현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는 “‘가능한 호칭’으로 제시된 호칭들은 반드시 바꿔 쓰라는 것은 아니다. 언중이 자유롭게 사용하기 편한 쪽으로 취사선택하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김정필 기자 fermat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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