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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12 16:40 수정 : 2019.10.12 17:00

[토요판] 인터뷰
울분 연구자 미하엘 린덴 교수

통일 후 동독인 번영 기대했지만
실직과 차별, 가정해체 겪고
‘2등 시민’으로 불공정 취급당해
분노·무기력 호소…울분 유발

“열심히 일했는데 무능한 사람으로
취급당하면 외상 후 울분장애 생겨”
“불공정은 상대적…더 많이 토론해야”

울분 감정을 연구하는 정신의학자 미하엘 린덴 독일 샤리테대학 교수는 사회적 차원에서 울분을 줄이기 위해서는 공정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울분은 단순한 분노와 달리 ‘이런 처사는 부당하다’는 공정성에 대한 인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미하엘 린덴(71) 독일 샤리테대학 교수는 2003년 ‘외상 후 울분장애’(PTED)라는 진단명과 2009년 울분 자가측정 도구를 개발하는 등 울분에 대한 실증 연구를 주도한 정신의학자다. 그가 울분이라는 감정에 주목한 것은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많은 동독인이 서독과의 경제적·문화적 차이에서 느끼는 좌절과 열등감으로 극심한 심리적 혼란을 겪는 것을 보면서다. 동독인들은 번영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실직과 차별, 가정 해체 등 부정적인 사건을 겪게 되면서 분노와 무기력을 호소했다. 이들의 증상은 기존 정신장애 병명으로는 제대로 진단하거나 치료할 수 없었다.

린덴 교수는 이것이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대형 참사를 겪었을 때 생기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와 다르다고 봤다. 울분은 일상적인 생활에서 겪는 부정적인 감정이, 정의나 공정함에 어긋나는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유발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긴 울분이 심해지면 외상 후 울분장애라는 질병 수준에 이를 수 있다. 서울대학교 ‘사보행’(사회발전연구소·보건환경연구소·행복연구센터) 학술포럼(10월7~11일)에 참석하러 한국을 찾은 린덴 교수를 7일 이 대학 보건대학원 회의실에서 만났다.

불공정하거나 모욕적일 때

―울분이란 무엇인가?

“그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울분은 감정이고,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웃음) 불공정(injustice)하다고 생각하거나 모욕적인 일을 겪으면서 (이 감정이) 생긴다. 분노하고, 어쩔 도리가 없고 희망도 없다고 느끼며, 복수하고 싶은 복합적인 감정이다. 또한 매우 끈질기게 타오르는 감정이다. (기자에게) 당신은 모욕을 당했을 때 어땠나? 누가 도와주었나? 당신의 억울하고 답답한 감정을 밖으로 드러낼 수 없을 때 어떻게 느꼈나? 당신은 이미 울분을 알고 있다.”

―울분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 전이된다고 했는데, 어떻게 전이된다는 것인가?

“감정은 기본적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매우 간단하다. 정보를 알게 되면 감정이 생산되고, 울분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한국인들은 일본이 1905년에 한국에 불의를 저질렀다고 느낄 텐데, 2005년에 태어난 아이들도 1905년에 대한 정보를 통해 그 감정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일본인에 대한 울분의 감정을 만들 수 있다.”

―학술포럼 발표문에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가 울분을 느끼다가 결국 노동청에 방화하게 되는 외상 후 울분장애 사례가 나온다.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회사가 공장 문을 닫으면서 오랫동안 성실하게 일해온 노동자가 자기 일을 잃고 자기가 보기에 하찮은 일을 하게 됐다.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상사로부터 “입 다물어! 생산적인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돈 받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일하기를 원했는데, 회사는 그가 일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처럼 대했다. 그것은 그의 신념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린덴 교수는 기자를 사례로 들어 거듭 설명했다. “<한겨레>에 모든 걸 바치고 있고 스스로 최고의 기자라고 여기는데, 상사가 ‘넌 해고야. 젊고 새로운 기자가 왔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다른 한편으로, 당신은 기자인 게 좋긴 하지만 가족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족을 돌보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상사가 ‘네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바꿀게’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아마 당신은 다른 일자리를 찾고, 돈을 벌게 된다면 상관없을 것(I don’t care)이다. 상황(해고)은 같은데 자신의 신념과 정의감이 다르기 때문에, 전자는 상처를 주지만 후자는 그다지 주지 않는다.”

‘울분장애’ 연구자인 독일 정신의학자 미하엘 린덴 교수가 10월7일 오전 서울대 국제대학원 소천홀에서 통일 독일 이후 독일인들이 겪은 외상 후 스트레스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왜 불공정하다고 느끼는지 살펴봐야

―울분을 느낀다고 해서 모두 폭력적인 행위로 나타나진 않을 것이다. 외상 후 울분장애 환자가 되는 비율은 얼마나 되나?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모욕을 당했을 때 울분을 경험하게 된다. 즉, 울분이라는 감정은 100%가 느낄 수 있고, 독일의 울분장애 환자는 3%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울분장애 환자는 특정한 사람이나 사건에 울분을 일으키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별문제가 없다.”

―외상 후 울분장애는 치료하기 힘들다고 했는데, 왜 그런가? 독일에서는 울분을 줄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울분장애 환자들은 세상이 변하길 바랄 뿐 자기 마음속에 문제가 있다는 걸 보지 않기 때문에 치료가 어렵다. 사회적 차원에서 울분을 줄이는 것은 이와는 다른 문제다. 통일 후 동독 사람들은 ‘2등 시민’으로 불공정하게 취급받는다고 느꼈다. 그런 감정이 있는 한 울분은 있을 수밖에 없다. 왜 그들이 불공정하다고 느꼈는지를 들여다봐야 한다.”

린덴 교수는 이 대목에서 언론의 구실을 강조했다. “통일 당시 동독의 경제력은 서독의 40%였고, 현재는 75%다. 그동안 신문이나 방송 뉴스에서는 ‘동독은 서독의 75%밖에 안 된다’며 동독을 ‘잘 못하는 지역’으로 취급했다. 그런데 2주 전 선거 시즌에 갑자기 동독이 ‘잘하고 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숫자는 75%로 똑같은데 말이다. 이렇게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

―한국은 분단 상태에서 북한과 상호 교류가 통일 전 독일만큼 활발하지도 못하고, 북한이탈주민도 많다. 사회적으로도 울분 감정도 높아지고 있다. 조언을 해달라.

“형제자매나 사촌이 멀리 살 때는 그들을 사랑하는데, 그들이 자신의 집에 이사를 오면 전혀 다른 얘기가 펼쳐지게 된다. 한편으로는 많은 이들이 삶을 위협하는 경험에 점점 더 많이 노출되고 있다. 해고나 난민(북한이탈주민) 등 불공정함을 느낄 수 있는 사건이 많아지면 외상 후 울분장애도 늘어날 것이다. 무엇보다 공정성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토론하는 일이 필요하다. 공정성에 대한 현대 사회의 규정은 ‘상대적인 공정성’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간호사가 의사의 절반을 버는 것을 사람들이 공정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어떨까? 굉장히 철학적인 문제다. 우리는 불공정이 무엇인지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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