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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 직업재활시설인 강화도 우리마을 설립자인 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우리마을 촌장)와 발달장애인들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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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다시 시작하는 우리마을
발달장애인 공동체 강화 우리마을
지난달 7일 콩나물 공장 화재로
연매출 18억원 50명 밥줄 잃어
특수학교 졸업 뒤 갈 곳 없어
김성수 성공회 주교가 설립
노후에 쉴 요양원 계획도 차질
일할 때 행복하다는 장애인들
이웃들의 따뜻한 손길에 힘내며
일터 떠난 친구들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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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 직업재활시설인 강화도 우리마을 설립자인 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우리마을 촌장)와 발달장애인들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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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가장 행복해요?”라고 물었더니 이나경(40)씨는 “콩나물, 일할 때”라고 했다. 말을 잘하지 못하는 나경씨의 짧은 대답이다. 김성태(36)씨는 “콩나물 생각나서 마음이 힘들어요”라고 말했다. “좀 울었어요. 밥줄 놓쳤다고…”라고도 했다.
두 사람은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발달장애인(지적·자폐성 장애) 공동체인 ‘우리마을’ 콩나물 공장에서 일했다. 지난 20일 만난 이들은 주택용 분전반(두꺼비집) 단자 조립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작업대에 앉아 단자대 양쪽에 와사라는 부품을 넣고 스프링을 끼운 뒤 10개씩 고무줄로 묶어 작은 상자에 넣는 단순한 작업이다. 40분씩 세차례, 하루 2시간 일한다. 단자 1개당 7원을 번다.
성태씨가 “앉아서 일하는 게 답답”하게 된 것은 지난달 7일 불이 나 콩나물 공장이 몽땅 타버렸기 때문이다. 새벽에 콩나물을 배송하는 기사가 공장 1층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발견했고 4시44분께 신고를 해 7분 만에 소방차가 출동했지만, 불길은 샌드위치 패널을 타고 공장을 삼켰다. 누전 탓이었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우리마을 직원들은 4시간 동안 연면적 1100㎡ 2층 건물이 전소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속수무책이었다. 다행히 발달장애인 주거시설은 공장과 떨어져 있어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이날부터 콩나물 공장 발달장애인 20명은 단자 조립장으로 옮겨와 동료 30명과 함께 일하고 있다. 이들 50명의 ‘밥줄’이었던 콩나물 공장은 지난 22일 철거가 끝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우리마을 짓고 콩나물 길렀더니
콩나물에 얽힌 사연은 2010년 공장 준공 10년 전인 2000년 3월 우리마을 개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마을은 김성수(90)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가 만든 곳이다. 그는 1964년 사제 서품을 받고, 1974년 한국 최초의 지적장애인 특수학교인 성베드로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썼다. “졸업장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아이들이 갈 곳, 발달장애인들의 일터를 만들기 위해 우리마을을 설립했다. 부모한테서 물려받은 고향 땅 1만626㎡(3천평) 등 사재를 털었다.
처음엔 상추와 느타리버섯, 닭 등을 키웠다. 수경재배한 상추는 곱게 따야 상품이 되는데, 발달장애인들을 훈련시켜도 잘 따지 못했다. 마당에는 병아리가 왔다 갔다 했다. 눈에 보이는 달걀만 가져올 뿐 닭이 품고 있는 알은 가져오지 못해서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김 주교와 직원들은 “옛날에 어머니들이 시루에 물 주어 기르던 콩나물”을 떠올렸다. 처음엔 콩나물을 비닐봉지에 담아 동네 식당으로 팔러 다녔고, 2003년 생협과 거래를 시작하면서 점차 판로를 넓혀나갔다. 콩나물 공장이 된 데에는 풀무원의 도움이 컸다. “풀무원 사장이 우리 수동 기계를 보더니 요즘은 다 자동으로 하는데 왜 안 하느냐고 했어요. 돈이 없어서 못한다고 했더니 얼마나 드냐고 물어서 2억5천만원이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1억원을 기부할 테니 나머지는 콩나물 길러서 갚으라고 했어요.”
2010년 11월 준공된 콩나물 공장에서는 발달장애인 20명이 일했다. 우리마을 안 그룹홈(공동생활가정)이나 자신의 집에서 오전 9시까지 출근해 1층 작업장에서 콩나물 씻기, 봉지에 담기, 봉지를 기계로 찍기, 상자에 담기, 나르기 등 저마다 주어진 일을 했다. 나경씨는 “박스 붙이는 거”를 했고, 성태씨는 옆 사람이 콩나물을 봉지에 담아주면 “기계로 찍는 일”(밀봉)을 했다. 근로능력에 따라 6시간을 일하는 이들은 월 130만원을, 4시간 일하는 이들은 90만원을 벌었다. 이곳에서 생산된 친환경인증(2004년) 콩나물은 아이에스오(ISO) 22000 식품안전경영시스템 인증(2015년), 농산물우수관리(GAP) 경진대회 장관상 수상(2017년) 등 맛과 품질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정은 우리마을 사무국장은 “장애인들의 손을 처음 잡아줄 때는 불쌍하다는 마음일 수 있는데, 계속 손을 잡고 있으려면 품질이 중요하다. 장애인 생산품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었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장애인도 최고의 품질 기준을 맞출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콩나물 공장은 화재 직전까지 하루 2톤의 콩나물을 생산했고 풀무원과 아이쿱생협, 두레생협 등 10여곳에 납품하면서 연평균 매출이 18억원으로 쑥쑥 컸다.
눈에 띄는 것은 콩나물 공장의 수익과 일자리를 나누는 방식이다. 근로사업장인 콩나물 공장에서 거둔 수익은 발달장애인 50명 모두에게 돌아간다. 두꺼비집 단자를 조립하는 보호작업장에서 일하는 30명의 매출은 1인당 월 3만원 정도에 그치지만, 콩나물 공장의 수익금으로 최저임금(주5일 2시간 근무)을 맞춰 월 36만원을 받는다. 이정은 국장은 “콩나물 공장 규모로 보면 5명 정도의 일자리다. 발달장애인의 일자리를 만드는 게 우리마을의 목표이기 때문에 애초 10명이 일했고, 20명으로 늘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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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0일 오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우리마을 콩나물 공장이 다 타버린 채로 출입통제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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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좋은 일터’가 된 이유
성태씨에게 콩나물 공장은 “많이 좋은” 일터다. 그는 가족이 없다. 충남의 한 보호시설에서 살다가 성인이 된 뒤 서산의 장애인 직업재활시설에서 농사일을 했다. 2010년 10월 우리마을에 왔을 때 어깨가 망가진 상태였다. 얼마 뒤엔 세무서와 건강보험공단 등에서 밀린 세금과 보험료를 내라는 고지서가 날아왔다. 성태씨가 사업장 대표로 등록돼 있었고, 사업장이 폐업하면서 사용자 부담금 1천만원을 모두 떠안게 된 것이다. 글을 모르고 수 개념이 없는 성태씨는 그런 사실을 모른다. “그때는 좀 별로였어요. 일만 시켰어요. 콩나물 공장 여기 와서 돈 벌어서 사고 싶은 것도 사고 저축도 해요. 핸드폰으로 음악도 듣고, 같이 영화도 봐요.” 나경씨가 옆에서 “에어로빅, 에어로빅” 하며 거들었다. 월·화요일마다 강사에게 배우는 에어로빅이 제일 재미있다는 얘기였다. 나경씨는 핸드폰으로 우리마을 밴드(네이버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들어가 글을 올리는 것도 좋아한다.
이들에게 일자리는 경제적 의미 이상이다. 우리마을 원장 이대성 신부는 “발달장애인에게 노동은 단순히 돈을 번다는 의미를 넘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과정”이라며 “단순작업이고 소액이라고 하더라도, 생산하는 일을 하고 그 일의 가치를 느끼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마을은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사회복지재단이 운영하지만, 종교와 관계없이 발달장애 성인이 입소를 신청할 수 있다. 이곳을 일터 삼은 발달장애인들은 대부분 중증에 해당하는 장애 1~2등급(등급 폐지 전 기준)이고, 30대가 절반이 넘는 28명이다. ‘시설 이용자’라는 공식 명칭을 쓰지 않는다. ‘근로인’ ‘대상자’ 등의 명칭도 없다. 모두 ‘친구’라고 부른다. 한 마을에 모여 함께 사는 친구들이라는 뜻에서다. 일을 마친 ‘친구’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노래방에서 놀거나 당구를 치기도 하고, 아로마테라피·게이트볼 등 문화체육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한달에 한번 단체로 공연도 보러 간다. 자치회 회의도 중요한 일정 가운데 하나다.
이들의 주거 공간을 지을 때 김 주교는 ‘장애인들도 펜션 같은 집에서 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나무로 지은 집을 주문했다고 한다. 조병수 건축가가 설계한 주거시설은 원형으로 빙 돌아가는 외관이 특이할 뿐 아니라, 실내 공간도 장애인시설 기준 면적보다 넓고, 2000년 개원 당시 인덕션을 구비할 만큼 세심하게 배려했다. 그러나 발달장애인에게 좋은 일터는 여전히 찾기 어려운 곳이다. 2018년 현재 발달장애인은 22만6천명(지적장애 20만1천명, 자폐증 2만5천명)으로 전체 장애인의 10% 가까이 된다. 해마다 3.6%씩 늘어나고 있다. 고용률은 22.9%에 그친다. 그나마 규모가 영세한 보호작업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 50인 미만 사업체 종사 비율(77.7%)이 다른 장애 유형(지체장애 67%, 청각장애 64% 등)에 견줘 높다. 다른 장애 유형의 평균임금은 100만원대 중·후반이지만, 발달장애는 73만원이다(2017년 장애인경제활동실태조사).
김 주교는 일터 만들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5~6년 전부터 우리마을에 발달장애노인 요양원 짓는 일을 구상하고 있다. 최소한의 근로능력마저 잃거나 정년퇴직할 ‘친구’들을 위해서다. 성베드로학교 학생들이 갈 곳이 없어 학교를 떠나지 않으려 했듯이, 이곳 일터를 떠나게 되면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이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마을의 정년은 60살로, 발달장애인과 일반 직원의 차이를 두지 않았다. 발달장애는 노화가 비장애인보다 20년가량 이르게 진행돼 40대에도 근로능력을 잃는 경우가 많아 정년을 40~45살로 규정한 직업재활시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우리마을에서는 58살 정혜인씨, 57살 신말순씨, 56살 이철수(가명)씨, 51살 박옥자씨 등이 고령층으로, 모두 단자 조립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대성 신부는 “정년 60살로 운영하는 게 솔직히 힘들다. 하지만 여기서 겨우겨우 정년을 맞더라도 이후에는 어디로 보내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요양원 설립 구상은 그동안 노인복지법과 장애인복지법 사이에서 출구를 쉽게 찾지 못하고 있다. 현행법은 노인복지법과 장애인복지법에서 각각 노인과 장애인 관련 시설 규정을 두었을 뿐 장애 노인을 염두에 둔 시설 규정은 없다. 예컨대 노인시설은 5인 초과 1인당 필요한 추가 면적이 6.6㎡고, 장애인은 그 절반이다. 이 신부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노인에게 필요한 면적보다 좁은 곳에서 살든지, 아니면 노인시설을 이용하라는 건데,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발달장애 노인이 일반 노인시설에서 함께 사는 게 쉽지 않고 그에 대한 사회의 준비도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리마을은 2021년 첫 삽을 뜨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지난해 초 ‘노인발달장애인 전문시설 추진위원회’를 꾸렸고, 어디에도 없는 이 요양원 설립을 두고 정부와 협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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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들은 일을 마치면 각종 문화·체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여가를 즐긴다. 매주 월·화요일에 열리는 에어로빅 활동 모습. 우리마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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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 주고받아야 ‘우리’ 마을이 된다
불이 나고 얼마 동안은 모두 슬펐고, 다들 정신이 없었다. 직원들은 사고를 수습하고 복구 계획을 세우느라 머리를 쥐어짜며 뛰어다녔고, 콩나물 공장에서 일하던 이들은 단자 조립 일을 새로 배웠다. 이번 불로 콩나물 22톤과 공장 건물, 기계·장비 등이 모두 타버려 피해액이 20억원에 이른다. 이들의 월급 통장에는 12월부터 90만원, 130만원이 아니라 36만원이 찍히게 된다. 4대 보험에 가입해 퇴사하면 이보다 많은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지만, 대부분 남았다. 갈 곳이 없거나 보호자들이 돌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월급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2명은 퇴직을 선택했다.
지난 27일 우리마을을 두번째 방문했을 때 발달장애인들은 소형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고 있었다. 이정은 국장은 “적은 금액이라도 친구들이 만들어 팔 수 있는 아이템을 찾아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말이면 후원자들에게 감사 선물로 보냈던 텃밭 고구마도 올해는 어쩔 수 없이 팔았다. ‘친구’들은 그나마 줄게 된 월급을 공장 복구 비용으로 쓰라고 내놓았다. 박재연(32)씨는 월급 통장에 찍힌 돈을 고스란히 송금했다. 가족들과 상의해 앞으로 월급 전부를 후원금으로 내기로 했다고 한다. 10월에 제주도 여행을 갈 예정이었던 이철수씨와 유준성(41)씨는 지난봄부터 9월까지 부은 적금으로 점퍼와 티셔츠를 하나씩 사 입고 나머지 돈을 기부했다. 안준형(46)씨는 손수 만들어 동전을 모으던 저금통을 마을 사무실에 두고 갔다. 수 개념이 없는 성태씨는 “100만원을 내겠다”고 주장하다 직원들이 말려 20만원을 냈다. 우리마을은 콩나물 공장을 내년 10월에 다시 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인천시와 보건복지부가 건축비를 지원하고, 풀무원은 설계를 맡아주었다. 화재보험금 6억원과 후원금 등을 자동화 기계와 생산설비 구축, 원두(기름콩)와 부자재 구매, 장애인 급여 지급 등에 쓸 예정이다.
우리마을이 조금씩 더 힘을 내게 된 것은 화재 소식을 듣고 따뜻한 마음으로 위로하고 응원해오는 이웃들 덕분이다. 기존 후원자뿐 아니라 1400명의 개인·단체 후원이 이어졌다. 인천소방본부는 지난 8일 소방의 날에 ‘119원의 기적’ 프로젝트의 첫 수혜자로 우리마을을 선정해 1천만원을 기부했다. 소방관들이 화재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어려운 이웃을 도우려고 하루 119원씩 모으는 프로젝트다. 인천소방본부 서영재 주임은 “우리마을 영상물에서 장애인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만든 작은 기적으로 그 웃음을 돌려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마을 ‘친구’들에게 이런 후원은 경제적 의미 이상이다. 우리마을은 설립 당시 지역사회의 반대 없이 순조롭게 조성됐다고 한다. “강화군수가 길상면 이장들을 모아놓고 장애인시설 들어오는 데 반대하는 사람 손 들고, 찬성하면 들지 말라고 했더니 아무도 안 들었대요. 그런데 당시엔 장애인에게 별로 관심도 없었어요. 또 여기가 동네랑 좀 떨어져 있거든.” 김 주교가 웃으며 말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우리마을 사람들은 ‘우리마을이 아무리 좋아도 섬처럼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미사에 참여하는 발달장애인들이 낸 헌금을 전부 지역아동센터와 대안학교에 기부하고, 무료급식소에 봉사활동을 다닌다. 우리마을에서 열리는 문화 행사에 지역 주민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며 함께 즐긴다. 이대성 신부는 “장애인은 불쌍하고 도움만 받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사회의 주체로 도움을 주며 살 수 있고, 지역사회와 소통하고 교류하며 온전한 구성원으로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화재 이후 길상면 발전위원회가 온수리 시장에서 우리마을을 돕기 위한 음악회를 열어 보내준 후원금 1400만원이 특히 소중하다. 이 신부는 “우리 친구들이 공동체 일원으로 인정받고 존중받았다고 생각하니 정말 감사하다. 각 지역에서 장애인시설을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성태씨는 불탄 공장에 가보았을 때 “내 심장도 탔어요”라고 말했다. “불나서 두 명은 집으로 갔어요. 헤어져서 슬펐어요. 그런데 콩나물 공장 다 지으면 다시 또 온다고 했어요.”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친구’를 이곳을 떠날 수도 없는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후원을 원하시는 분은 우리마을 (032)937-8691~2로 전화하시거나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사회복지재단 계좌(신한은행 140-010-327944)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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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나기 전 우리마을 발달장애인들이 콩나물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 우리마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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