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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14 09:00 수정 : 2019.12.14 14:46

[토요판] 인터뷰
단원고 수현군 아버지 박종대씨

직장 그만두고 5년여 조사
정보공개 청구만 340건
“재판 결과에 동의하지 않아
책 쓰고 연구소 만들고 싶어”

단원고 2학년 고 박수현군은 세월호가 기울어지는 마지막 순간을 담은 동영상을 남겼다. 그 동영상을 본 아버지는 “아들이 내어준 숙제”라 생각하고 아이가 언제, 어떻게, 왜 죽었는지 알아내는 데 몰두했다. 사진은 아버지 박종대씨가 지난달 28일 경기도 화성시 자택에서 구조 실패의 책임이 누구인지 설명하는 모습. 화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단원고 2학년 박수현군은 참사 6일 만인 2014년 4월22일 저녁 6시43분에 돌아왔다. 희생자 가운데 117번째였다. 아버지 박종대(55)씨는 아이가 남긴 것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수영을 잘하는 수현이가 구명조끼까지 입고도 탈출하지 못했을 때는 이유가 있었으리라.

“아이를 찾고 났는데 배 위에다가 아이 휴대폰을 얹어놨더라고요. 일부러 안 가져왔어요. 어떻게 하는지 지켜볼 심산이었죠. 장례식을 치르려고 염을 하는데 장의사가 그때야 주더라고요.”

장례식을 치른 다음날인 4월27일 새벽, 아버지는 아들 휴대폰의 에스디(SD)카드를 살펴봤다. 사진 40장과 동영상 3개가 있었다. 사고 전날 밤 10시께 불꽃놀이하는 영상과 세월호가 기울어진 직후인 8시52분29초부터 5분, 9분간 선체 내부 모습이 담겨 있었다. 점점 기울어지는 배 안에서 두려움에 떨면서도 아이들은 서로를 다독였다. 그 와중에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선내 안내 방송이 계속 흘러나왔다.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떠돌아다녔지만, 당시까지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수현이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그게 확인됐죠.”

아들이 내어준 숙제

아버지는 동영상을 처음 본 순간, “우리 아들이 내어준 숙제”라고 생각했다. 수현이가 언제, 어떻게 왜 죽었는지 알아내야 했다. “법과 정의가 살아 있는 정상적인 국가라면, 그 궁금증을 국가가 당연히 풀어줘야 하지만 국가가 그 의무를 다하지 않으니까” 자동차 부품 회사의 사무관리직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그해 7월에 직장을 그만두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세월호 관련 기록을 모으고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리는 세월호 관련 재판을 쫓아다녔다. 그리고 새벽마다 아들의 방에서 두꺼운 서류 뭉치와 씨름했다.

“계속 보니까 거짓말이 보이는데 (재판은) 흘러가는 거죠. 검사의 칼끝이 예리하고 강력했다면 이걸 확확 휘저어야 하는데 안 하고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우리(세월호 유가족)가 그 부분을 파헤치지는 못해도, 명백히 보이는 문제는 이의제기 절차를 거치려고 노력했습니다.”

2015년 아버지가 재판부에 낸 의견 때문에 항소심 판결이 바뀌기도 했다. 사고 현장에 유일하게 도착한 해경 함정인 123정 정장 김경일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됐는데, 1심 재판부는 사고 현장에 도착한 그가 “9시44분”에야 승객이 선내에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판단했다. 9시44분께 퇴선 명령을 내렸다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승객(피해자)은 56명이라고 한정했다. 아버지는 항소심 재판부에 123정장 김경일이 해경 본청과 전화통화한 9시36분 첫 현장 보고(‘사람이 갑판에도 바다에도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선박 안에 있나 보다’)를 제출하며 “9시36분께 적정한 구조 활동을 펼쳤다면 303명(123정이 사고 현장에 도착하기 전 바다에 빠져 숨진 1명 제외)이 모두 생존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 피해자를 303명으로 확대했다.

아버지에게 내미는 연대의 손길도 나타났다. 1970~80년대 간첩으로 조작돼 고문당한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꾸린 재단법인 ‘진실의 힘’과 ‘세월호 프로젝트’를 10개월간 진행한 것이다. 이들은 아버지에게 건네받은 수사·재판기록 등으로 2016년 3월 <세월호, 그날의 기록>을 펴냈다.

세월호 침몰 당시 아들의 행적도 아버지는 기록으로 더듬어봤다. “수현이 사진을 보면 10시11분까지 B-19에 있었는데 아이는 (선수 쪽에 가까운) F-4에서 나왔습니다. 구명조끼도 안 입은 채로요. ‘왜 그럴까’ 굉장히 의아했는데, 어느 날 생수병을 놓고 생각해보니 알겠더라고요. 배가 기울어지면서 물이 차오르자 수영을 잘하는 아이가 마지막 순간까지 숨을 쉴 수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한 거겠구나. 수영할 때 거추장스러우니까 구명조끼를 벗어 던지고요. 에어포켓이 있었다면, 해경이 수중 수색을 했더라면 몇명이라도 살아올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기록 공개하고 연구소 열고파

수현이는 애교도 많고 다정했다. 가족들에게 사랑해, 사랑해라는 말을 달고 다녔다. 특히 아버지와는 휴일이면 함께 카메라를 둘러메고 나들이했고, 1년에 한번씩은 설악산을 올랐다. “친구였고 동지였고 내 삶의 전부”인 아들을 떠나보내고 아버지는 ‘고 박수현이 체험했던 세상’이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열었다. 수현이를 기억하기 위한 사진, 영상,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의 글을 모은 곳이다. 수만명이 찾아왔다. 거기에는 수현이의 ‘버킷리스트’가 있었다. 수현이 어머니가 아이의 유품들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수첩에서 나온 것이다. ‘아빠 수제 기타 만들어드리기’ ‘자서전 내보기’ ‘재즈 피아노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진정으로 남을 위해 봉사하기’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책 2000권 읽기’ ‘유명한 뮤지션들 사인 받기’ ‘나 혼자서 세계 여행’ 등등 수현이가 살아가면서 이루고 싶었던 바람들이 빼곡했다.

<에스비에스>(SBS) ‘궁금한 이야기 와이(Y)’가 수현이의 버킷리스트를 방송하자 이곳저곳에서 따뜻한 마음이 모였다. 와이비(YB) 윤도현, 국카스텐, 김민기 등 뮤지션 100여명이 ‘유명한 뮤지션들 사인 받기’를 실현해줬다. 부활의 김태원은 사인과 함께 수제 기타 한대를 보내왔다. “내가 그거라도 해주면 그걸 하는 동안은 (아이가) 살아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는 그 마음이지요.”(박종대씨)

2016년 6월 이사한 경기도 화성시 집에 수현이 방을 만들고 단원고 친구들과 함께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하늘공원에 잠들어 있던 아들을 데려왔다. 수현이가 좋아하던 개와 고양이도 키우고 있다. “(고양이를) 안고 있으면 심장 뛰는 거를 느끼는데 그때 마음이 이상합니다. 수현이 생각이 나죠. 수현이가 제 팔베개를 하고 자는 걸 되게 좋아했거든요. 수학여행 가기 1주일 전에도 제 팔베개를 하고 잤던 놈이니까요.” 참 행복한 때였다. “평범하지만 일상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었는데…. 그 사건으로 행복은 다 깨지고 ‘실패한 인생’이 돼버린 거지요.”

아버지의 기록과의 싸움은 오늘도 계속된다. 2016년 직장으로 돌아간 뒤에도, 지난 7월 일터를 다시 떠나온 후에도 해경에 직접 정보공개를 청구하며 진실의 조각을 차근차근 맞춰나가고 있다. 그동안 제기한 정보공개 청구는 340건에 이른다. 집에는 아들 방으로 가는 복도에 세월호 기록 파일을 모아놓은 책장을 따로 마련했다.

왜 그토록 기록을 붙잡고 있는 것일까. “일단 검찰 수사와 재판 결과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1기 특조위(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박근혜 정부의 수사 방해로) 미완의 상태로 끝났고 <세월호, 그날의 기록>은 정리는 잘했지만, 많이 남아 있는 의혹을 푸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는 이번에 검찰이 꾸린 ‘세월호 참사 특별수사단’에서 밝혀내야 할 의문점을 조목조목 꼽았다. ‘구조 지휘는 어디서 해야 했나’ ‘해경 122구조대는 언제 도착했나’ ‘123정은 사고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은 해경을 거쳐 청와대까지 전달됐나’ ‘청와대 상황보고서 1보와 4보는 어디로 사라졌나’ 등 10가지다.

그래픽 박향미 기자 phm8302@hani.co.kr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 자신도 세월호 관련한 궁금증을 풀어낸 책 <세월호 침몰 사건의 올바른 이해>(가제)를 쓰고 있다. 내년에 출간하면 독자와의 만남도 추진하려 한다. “장기적으로 내가 모은 기록을 읽기 좋게 정리해 연구소를 만들고 싶습니다. 연구자들이나 언론이 세월호 사건을 연구하려면 그곳에서 찾아보고 팩트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말이죠. 그렇게 자료를 공개하지 않으면 박근혜 정부가 퍼뜨려놓은 허위사실만 나중에 돌아다닐 테니까요. 혼자 힘으로 안 되니까 많은 사람과 결합해서 해보려고요. 그게 나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화성/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세월호 희생자인 단원고 박수현군의 경기도 화성시 집 풍경. 거실에 수현군 사진이 붙어 있다. 화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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