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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4 09:11 수정 : 2020.01.04 22:06

2019년 1월23일 경북 구미 삼일문고에서 열린 심리적 심폐소생술 워크숍 ‘당신이 옳다’의 현장 모습. 해냄출판사 제공

[토요판] 커버스토리
충고·조언·평가·판단 않는 ‘다정한 전사’ 되기

행동 아닌 마음을 물었더니
학교폭력 피해 털어놔
친구 따돌리던 8살 상처엔
온 체중을 실어 사과·화해

부부 동반 독서모임 열었더니
마음 나누며 남편들 눈물 글썽
“불완전한 나 수용할 동행자 있어
오늘 넘어져도 내일 일어난다”

2019년 1월23일 경북 구미 삼일문고에서 열린 심리적 심폐소생술 워크숍 ‘당신이 옳다’의 현장 모습. 해냄출판사 제공

▶“자격증 있는 사람이 치유자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치유자다.”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만 안 할 수 있어도 공감의 절반은 시작된 것이다.” 심리치유서 <당신이 옳다>에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와 심리기획자 이명수씨는 이렇게 썼다. 30여년간 1만2천여명의 속마음을 듣고 나누었던 정혜신씨는 현장 치유 경험을 바탕으로 소멸해가는 사람을 구하는 ‘심리적 심폐소생술(CPR)’을 내놓았다. 충조평판 하지 않고 온 체중을 실어 공감하는 것, ‘지금 마음이 어떠세요?’라고 묻고 또 묻는 것이다. 이 간단한 방법으로 일상에서 소리 없이 쓰러져 심정지 상태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이 다시 뛴다.

‘거리의 치유자’인 정혜신씨의 손에 이끌려 <당신이 옳다>를 읽고, 심리적 심폐소생술 워크숍에 참석하고, 카카오의 ‘100일 공감 실천하기’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심리적 심폐소생술을 실천하는 공감자들이 있다. 이들은 충조평판 하지 않으면서 삶이 극적으로 변화했다고 말했다. <한겨레>는 공감자 3명을 취재했다. 2020년 새해에는 그들의 동행자가 돼 ‘충조평판 하지 않기’에 도전해보면 어떨까.

그는 어릴 적에 엄마한테 혼나지 않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다쳐도 싸워도 혼나니까 몰래 숨어서 나뭇잎으로 지혈하고 친구한테 맞춰주기만 했다. 용돈 달라는 말을 못 해서 중학교 때부터 전단을 돌렸다. 순종적인 딸로 하루하루 견디다 그는 20대 중반에 원형탈모가 생겼다.

그가 무서운 엄마에게 내 마음을 얘기하자고 결심한 것은 <당신이 옳다>(2018·해냄)를 만나면서다. 그는 엄마와의 대화를 1년 넘게 준비했다. 인생을 쭉 돌아보면서 할 말을 다 적었다. 스스로가 안쓰러워 엉엉 울기도 했다. 너무 많이 연습해 외우다시피 한 채로 그는 엄마를 만나러 갔다.

“도망가고 싶을 만큼 무섭고 두려웠어요. 바들바들 떨리는데도 몸을 추스르며 용기를 냈어요. ‘엄마, 오늘 딱 하루만, 내 말 끊지 말고 들어줘. 내가 두 손 모아 빌게.’”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이 들어오면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어린 시절, 자신이 싫어졌던 청소년 시절, 엄마가 여전히 무서운 현재를 이야기했다. 엄마를 비난하는 말은 없이 자신의 마음만 얘기했다. “이제 달라지고 싶어. 우리 서로 상처 주지 말고 사랑하며 살자.”

붉으락푸르락하던 엄마는 “자식 키워봤자 아무 소용없다”고 매섭게 말했지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변화는 그에게 더 크게 다가왔다. 엄마의 말에도 화가 나지 않고 마음을 털어놨다는 데 홀가분함을 느끼며 진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엄마가 안쓰러웠다.

엄마는 사흘 만에 전화해 힘들고 외로웠던 삶을 고백했다. 그리고 말했다. “예전에는 그냥 딸이었는데, 이제는 ‘너’로 보인다.” 엄마와 딸이 개별적 존재로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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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마법 발견

정신과 의사 정혜신씨가 쓴 심리치유서 <당신이 옳다>를 읽고 충조평판 하지 않고 ‘나’와 ‘너’에게 공감하는 삶을 살면서 극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정혜신·이명수 부부가 진행하는 ‘심리적 심폐소생술(CPR) 워크숍’과 카카오 프로젝트100 ‘100일 공감 실천하기’에 참여해 ‘충조평판 의식하기’를 실천했다. 또 공감이 필요한 순간에는 온 체중을 다 싣는 다정한 공감자이지만, 공감을 방해하는 사람이나 상황을 마주할 때는 전사처럼 싸우는 ‘다정한 전사’를 꿈꾼다. 고등학교 교사 김선희(48)씨, 독서모임 리더 김태희(37)씨, 사회복지학 박사과정생 권신정(35)씨에게 충조평판 하지 않으면서 달라진 삶을 들어봤다.

교사 김선희씨는 ‘요즘 마음이 어떠냐’는 물음이 마음의 빗장을 여는 하나의 마법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학교 아이들과 그 학부모와 개별적이고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한 어머니가 학부모 상담에서 말했다. “우리 아이가 선생님을 참 좋아해요. ‘엄마, 선생님은 행동보다 마음을 먼저 물어봐. 누구랑은 참 다르지?’라고 하더라고요.” 그 학생은 같은 학교 아이에게 폭력 피해를 당하는 정황이 있는데도 ‘같이 놀다 보니 좀 맞은 거다’라며 피해 사실을 축소·은폐하고 있었다. 선희씨는 그 어머니에게 학교에서 열리는 정혜신·이명수 부부의 ‘심리적 심폐소생술’ 특강에 참석하라고 권했다. 어머니는 특강이 끝나고 말했다. “강의 내내 아이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오늘 가서 아이의 마음을 물어야겠어요.”

다음날 아침에 어머니의 폭풍 문자가 왔다. “그간 제가 얼마나 충조평판을 날렸으면 아이가 (학교폭력) 피해를 당하고도 혼자 괴로워하고 있겠어요. 특강에서 들은 대로 몇번을 사과했어요. ‘허우대 멀쩡한 놈이 친구한테 맞았다고?’ ‘그걸 왜 이제야 말해?’ 같은 충조평판을 참으니 술술 말하더라고요.”

지난해 어느날 자정에 담임을 맡은 반 학생이 뜬금없이 전화를 했다.

“정말 감사해요. 제가 선생님 덕분에 올 한해 무사히 잘 자랐어요. 제가 봐도 정말 많이 자랐어요.”

“그게 왜 내 덕이야. 네 의지가 강한 거지. 이렇게 의미 있는 시간에 샘 떠올려줘 정말 고마워.”

전화를 끊고 선희씨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이보다 더 깊은 위로가 있을까.’ 아이는 상처투성이였다. 부모의 불화, 믿어주지 않는 교사들에게 겹겹이 상처를 받았다. 보듬어주는 어른 하나 없이 물 위에 떠 있는 풀처럼 흘러다니던 그를 선희씨가 믿고 기다렸다. 그리고 1년 뒤 화답을 했다.

충조평판 하지 않는 대상에는 타인뿐 아니라 ‘나’도 포함된다. 아니, ‘나’가 먼저다. 왜냐면 공감이란 다른 사람한테 집중하는 동시에 자기도 주목받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 보호와 자기 경계에 민감하지 않으면 심리적 탈진(번아웃)을 경험하게 된다.

선희씨의 경우 헌신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겠다는 가치관을 세웠지만, 예전에는 “쪼글쪼글 말라비틀어져 겨우겨우 버텨내고 있었”다고 했다. ‘너’에게만 너무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팽팽하고 성성하게 성장하고 있다”. 삶의 중심이 ‘나’에게 맞춰져 있어서다. “‘마음이 어떠니’라는 질문을 ‘나’에게도 하면서 덜 외로워졌다. 특히 나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자녀에게 여유로워졌다. ‘너도 살다 보면 다 방법이 있겠지’ 싶어지더라.”

과거에는 자녀의 사정이 있다는 생각을 못 했다. 엄마가 도와달라는데도 아이가 ‘게임 중’이라고 미루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나를 존중하다 보니까 아이한테도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더라. 지금은 아이가 ‘10분만 시간을 줘’라고 명확히 표현한다. 억지로 하다가 화를 내지 않는다. 평화로워졌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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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들도 눈시울 붉히며 속마음 꺼내

독서모임을 여럿 이끌었던 김태희씨는 자녀들과의 대화 방법이 확연히 달라졌다. 8살짜리 첫째 아이 친구들과 키즈카페에 갔을 때 한 친구가 “너랑은 안 놀 거야”라며 첫째 아이를 밀어냈다. 속상하면서도 태희씨는 친구에게 물었다.

“네 마음이 궁금해서, 같이 놀기 싫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머뭇거리던 친구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쟤가 내 인사를 안 받아줬단 말이에요. 나를 무시했단 말이에요.” 태희씨의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당황스럽고 미안해 그는 온 체중을 다해 사과했다. “그랬구나, 몰랐구나. 너무너무 미안해.”

멀찍이 있던 첫째 아이도 쭈뼛쭈뼛 다가와 “나, 인사했는데”라고 말했다. 하지만 친구가 못 들을 만큼 너무 작은 소리로 인사한 것임을 알았다. 그 뒤 아이는 친구에게 큰 소리로 인사하고 있다.

태희씨가 남편, 이웃과 함께한 <당신이 옳다> 독서모임은 치유의 홀씨가 되어 퍼져나가고 있다. 약사인 남편 하태섭(39)씨는 직원 2명과 7개월간 독서모임을 했다. 가족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속마음을 공감한 덕분에 일터가 행복해지고 능률이 올라갔다. “신뢰가 돈독해지고 관계가 좋아지니까 서운함이 없어졌다. 배려해주는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니까.” 태희씨는 부부 동반 독서모임도 이끌었고, 그 모임에서 남편들은 눈시울을 붉히고 속마음을 꺼냈다.

부부관계는 어떨까. “내 입장에서 들어줄 것이라는 안도감이 생겼다. 충조평판을 당하더라도 ‘그것 하지 말고 그냥 들어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대화를 가로막는 허들(장애물)이 낮아졌다. 아내가 싫어하는 이야기라도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숨기지 않고 하게 됐다.”(하태섭)

2019년 12월 <당신이 옳다> 심리적 심폐소생술(CPR) 워크숍이 끝나고 뒤풀이에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오른쪽 셋째)씨, 심리기획자 이명수(오른쪽 넷째)씨와 함께 김선희(왼쪽 둘째), 김태희(왼쪽 넷째), 권신정(맨 오른쪽)씨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하현정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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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산을 다양한 길로 오른 느낌”

서울, 대구, 부산, 경남 거제, 김해, 양산 등에서 열린 ‘심리적 심폐소생술 워크숍’에 8차례나 참여한 권신정씨는 “아름다운 산을 다양한 길로 오른 느낌”이라고 말했다. 매번 워크숍에 참여하는 사람도, 상담 내용도 달라졌지만 “충조평판 없이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어 안전감을 느꼈다”고 했다. 질의응답이 끊이지 않아 동네서점과 도서관 등이 문을 닫는 밤 10시, 11시까지 워크숍은 이어졌다. 특히 전남 고흥군에서 열린 1박2일 워크숍은 새벽 4시까지 8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참가자들이) 마음을 드러내고 들여다보는 데 두려움이 별로 없었다. 내 마음이 그런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전폭적 공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의 치유자가 되는 ‘치유적 공기’가 형성돼 있었다. 또 피드백을 받고 홀가분하게 살아나는 모습도 봤다. 깨끗한 산소를 공급받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나도 내 아픔을 짚어가며 마음을 흩어놓았고 존재와 경험은 개별적이지만 다들 고군분투한다는 걸 확인하면서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안심하기도 했다.”

워크숍에서 전수한 심리적 심폐소생술을 신정씨는 일상에서 실천해나간다. 어른의 관점을 벗어던지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전제에서 10살짜리 아이의 감정을 묻고 대화를 나누는 게 대표적이다. “지난가을 아이가 모기에게 눈을 물렸다. 퉁퉁 부어서 친구들이 놀릴 거라며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아이는 울었다. ‘다친 것도 아닌데 학교에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다그치려는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하지만 신정씨는 참았다. 대신 “친구가 놀려서 부끄러우면 바로 나와. 엄마랑 같이 놀러 가자”고 말했다. 순간 아이가 놀라더니 안심을 했다. 그리고 눈물을 닦더니 교실로 올라갔다. “등 떠밀려 올라간 게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 거니까 애들이랑 잘 놀더라. 내가 아이의 감정을 모른다는 생각에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니까 아이도 주눅 들지 않고 말을 한다. 아이지만 깊이 있는 대화를 하는 경험이 쌓여가고 있다.”

사회복지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신정씨는 공감과 경계를 활용해 ‘사회복지사 소진 예방 프로그램’과 관련한 공부를 해볼 작정이다. “(사회복지사는 대학) 학부 때부터 의뢰인에게 공감해줘야 한다고 배우는데 그게 자칫 감정노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공감과 경계의 개념을 적용해서 그 한계를 보완할 방법을 연구하고 싶다.”

이들은 충조평판 하지 않고 공감하는 일상을 실천하다가도 우르르 무너지는 날을 맞는다. 하지만 서로의 동행자가 되어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난다. 서로가 “치유의 곳간을 채워주는 뒷배”가 되는 셈이다. “불완전한 존재인 내가 휘청대더라도 동행자가 충조평판 없이 받아줄 것이라는 느낌이 생겼다. 작은 성공이 늘어나면서 이 믿음은 더 커지는 것 같다.”(김태희)

오늘 받은 공감 덕분에 우리는 내일도 공감할 수 있다. 공감은 ‘나와 너 모두에 대한 공감’의 줄임말이니까.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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