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02.10 20:26 수정 : 2012.04.18 10:31

‘이전에 못 봤던 투어’라는 손팻말을 들고 관광객을 기다리는 홈리스 가이드 비브. 윤병준(런던 웨스트민스터대 사진예술과)

[토요판] 르포
런던의 ‘홈리스 투어’
노숙인이 상속받은 공원 등 거리·건물 이야기 흥미진진
올림픽 앞두고 단속 강화, 변두리로 거처 옮기는 중

“저 아줌마가 서 있는 곳이 내 벤치였어요.”

지난달 29일 영국 런던 템플역 부근의 빅토리아 임뱅크먼트 공원에 선 비브(56)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올해로 12년째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홈리스’다. 하지만 이날 그는 잠자리를 찾으러 온 게 아니라, 일명 ‘이전에 못 봤던 투어’(Unseen Tour)의 가이드로 공원을 찾았다. 독일에서 온 대학원생 몇몇과 기자의 가족이 참여한 투어는 이렇게 비브가 6개월간 잠자리로 쓰던 공원 벤치에서 시작됐다.

이 공원의 벤치는 모두 8개인데, 저마다 주인이 있다. 새로운 홈리스가 들어오려면 누군가의 ‘초청’을 받아야만 한다. 안전하게 밤을 같이 지새우기 위한 이들만의 엄격한 ‘룰’이다.

“날씨가 추운 겨울엔 어떻게 하나요?” 낯설기만 한 노숙지 풍경에 학생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비브는 담담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갔다. “저기 보이는 블랙프라이어스 다리 밑으로 옮겨갔어요. 찬바람을 피할 수 있는 좀더 ‘아늑한’ 공간이 있었거든요. 마치 캠핑장과도 같았죠. 차를 끓여 마시며 몸을 덥히기도 했으니까요.”

길거리가 ‘집’인 홈리스들만큼 런던의 거리를 잘 아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2010년 8월에 첫선을 보인 홈리스 투어는 다소 역설적인 발상이 출발점이었다. 홈리스를 돕는 자원봉사자 네트워크 ‘삭몹’(Sock Mob)의 아이디어에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는 ‘언리미티드’(UnLtd)의 펀딩이 보태졌다.

“도심 한가운데서 고립된 홈리스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과 좀더 친해지자”는 삭몹 자원봉사자들의 소박한 바람이 홈리스 투어로 결실을 맺는 과정이었다. 때때로 절망에 휩싸였던 본인들의 삶을 터놓기까지 홈리스들에게는 적잖은 준비가 필요했다. 이들이 가이드로 당당히 관광객들과 만날 수 있으려면 자신감을 되찾는 게 급선무였다. 이 때문에 배우 출신의 한 자원봉사자는 홈리스들에게 퍼포먼스 기술을 가르치는 데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다섯명의 홈리스 가이드 중에서 비브가 코번트가든 일대를 안내하게 된 것도 그의 주된 잠자리가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출신인 그는 남편과 이혼한 뒤에 갈 곳 없는 홈리스로 전락한 경우다. 주거비용이 비싼 런던에선 결혼생활의 파탄이 종종 이런 결과를 초래한다.

투어는 인터넷이나 책에는 나와 있지 않은 홈리스의 삶이나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거리의 이야기들로 채워진다. 버킹엄궁전 앞에서 근위병 교대식을 기다리는 것으로 상징되던 종전의 런던 관광에 견준다면 그야말로 ‘파격’에 가깝다.

이 때문에 투어 참가자들 중에는 외국인 관광객도 있지만, 영국 사람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킹스칼리지 런던의 지리학과 교수들도 종종 투어를 즐긴다고 비브는 귀띔했다.

때마침 킹스칼리지 런던에 다다르자, 이번엔 비브가 질문을 던졌다. “나이팅게일이 이곳에다 간호학교를 세운 것은 여러분도 다 아는 이야기일 테고…. 그럼 메리 시콜에 대해선 어떤가요?” 자메이카 출신의 메리 시콜은 크림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나이팅게일 간호단의 면접을 봤지만 단지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떨어지고 만다. 그럼에도 최전방에서 홀로 병원을 차리고 죽어가는 병사들을 돌봤지만 끝내 별로 주목받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이 ‘검은’ 나이팅게일의 이야기가 홈리스 투어를 통해 새삼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이 긴 여운을 남겼다.

흥미진진한 길거리 역사는 빼놓을 수 없는 홈리스 투어의 묘미다. 아마추어 오페라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길거리 공연이 끊이지 않는 런던 최고의 관광지 코번트가든이 예전에는 ‘홍등가’였다니! <슈렉> 뮤지컬을 상영중인 로열극장에 세워진 파란색 기둥은 거리의 여인들이 다리를 드러내놓고 남자들과 흥정을 벌이던 곳이었다.

투어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따라가다가도 이내 홈리스의 시선에 맞춰지곤 했다. 런던 사보이호텔 부근 ‘셸멕스(Shell Mex) 하우스’ 건물의 처마밑에서 비브의 목소리가 다시 숙연해졌다. 런던의 최고급 호텔을 지근거리에 둔 이곳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꼽은 최고의 노숙지다. 공간이 넉넉해 많을 때는 200명까지도 잠을 잤다는 이 처마밑은 비바람을 피하는 장소인 동시에 홈리스들끼리 음식과 옷을 얻기 위해 정보를 공유하는 ‘광장’이었다.

과거엔 런던 경찰들도 집단노숙을 암묵적으로 용인해주곤 했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건물주가 바뀐 뒤 최근 몇년간은 오후 5시만 되면 높이가 무려 2.5m나 되는 철문을 내리기 때문에 더는 홈리스들의 보금자리로 사용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도심에서 홈리스들을 쫓아내려는 건물주와 시당국의 움직임은 이전보다 강화됐다. 건물 주변에 쇠창살을 두른 난간과 화단이 들어서는 것은 다반사고 공원 벤치를 잠자리로 쓰지 못하도록 중간에 팔걸이도 세워졌다. “그들(시당국)은 우리를 몰아내고 도시가 깨끗하게 보여지길 원하는 거죠.” 오는 7~8월 올림픽을 앞두고 런던 중심가에 머물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잠자리를 잃고 변두리로 거처를 옮기고 있다는 게 비브의 설명이다. 강력한 단속에도 관광객이 많은 도심 한복판을 다시 서성일 수밖에 없는 홈리스들의 이야기는 성대한 축제를 앞둔 런던의 ‘불편한’ 진실이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쯤 도착한 ‘링컨스 인 필드’(Lincoln’s Inn Field) 공원은 런던 홈리스들에겐 남다른 사연이 있는 공간이다. 이 공원 땅을 소유해온 어느 여성이 세상을 떠나면서 런던의 홈리스들에게 이곳을 물려줬다. 하지만 1990년대 초에 공원에서 지내는 홈리스가 2000명을 넘어서자, 이들을 몰아내려는 관할 구청과 인근 주민들이 점유권 소송을 내게 된다. 결국 구청 쪽이 승소하면서 홈리스들은 모두 쫓겨나야 했다. 유언장에 이름이 명기되지 않은 게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비록 홈리스들은 쫓겨났지만 이 공원 앞에선 매일 저녁 홈리스를 상대로 종교단체에서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비브는 오늘 어디서 자는 걸까. 영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홈리스의 범주가 넓다. 흔히 노숙인으로 부르는 ‘러프슬리핑’(Rough Sleeping)만 떠올려선 곤란하다. 빈집을 무단 점유한 뒤에 새 주인이 이사오기 전까지 그곳에서 지내는 ‘스쿼팅’(Squatting)과 친구 혹은 친척집에서 일시적으로 얹혀사는 ‘소파서핑’(Sofa-Surfing), 저렴한 숙박시설을 전전하는 ‘스테잉 인 호스텔’(Staying in hostel) 등도 있다. 요즘 비브는 공원에서 만난 파트너의 조카 집에서 ‘소파서핑’을 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조카가 이사를 가거나 가족이 늘면 곧바로 다른 거처를 알아봐야 한다.

가이드로 나선 홈리스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고 있다. 비브의 경우, 홈리스들의 자활을 돕는 잡지인 <빅이슈>만 팔던 때는 한 주에 30~40파운드밖에 벌지 못했지만, 투어를 시작하면서 수입이 세배가량 늘었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또다른 홈리스 가이드인 엘리자베스는 저널리즘 공부를 해보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됐다.

지금까지 2000명 이상이 다녀간 홈리스 투어는 영국 바깥으로도 확산될 조짐이다. 삭몹의 자원봉사자인 페이 실드는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비슷한 프로젝트가 진행중이고 폴란드와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교장선생님이었던 한 여성을 거리에서 만난 적이 있어요. 누구나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집과 가족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해요.” 비브의 진솔한 이야기는 그와 투어 참가자들 사이에 둘러쳐진 ‘장벽’을 어느새 허물고 있었다. 런던/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한때 자신의 잠자리였던 빅토리아 임뱅크먼트 공원을 보여준 뒤 다음 투어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윤병준(런던 웨스트민스터대 사진예술과)

▶‘노숙 사연’과 코스 확인한 뒤 예약

런던 홈리스 투어에 참여하려면, 예약(sockmobevents.org.uk)은 필수다. 날씨가 좋은 여름철엔 투어 참가자가 많게는 50명까지 모인 적도 있다. 한 지역에 예약이 몰리면 다른 지역의 홈리스들이 도우미로 나선다.

투어 코스는 모두 다섯 구역으로 나뉜다. 템스강변 골목 구석구석을 훑는 런던브리지 투어부터 이주민들의 삶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쇼디치, 거리의 예술가들로 북적대는 코번트가든, 헤지펀드 밀집지역인 메이페어, 빈티지숍·벼룩시장으로 유명한 브릭레인까지.가이드를 맡을 홈리스들의 프로필을 먼저 보고 코스를 고르는 것도 방법이다. 다섯명의 투어 가이드가 어떤 사연으로 노숙을 시작했는지, 이들이 보여주려는 런던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한 예로, 메이페어의 고급 식당에서 수습 요리사로 일하다가 같은 장소에서 홈리스로 전락했던 비니는 런던 최고급 주택가에 공존하는 부유층과 빈곤층의 양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투어는 금요일에는 오후 7시, 토·일요일에는 오후 3시부터 시작된다. 짧게는 1시간30분에서 길게는 3시간까지도 계속될 수 있다. 참가자들이 얼마나 많은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요금은 학생 7파운드(약 1만2000원), 성인 10파운드(약 1만7000원)다. 대부분의 수익은 홈리스 가이드들에게 돌아가지만 이 가운데 일부는 투어 가이드와 코스를 확장하는 데 쓰인다. 런던/황보연 기자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르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