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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레코드 판매상인 김창근씨가 7월30일 저녁 6시30분께 지하철 안에서 팝송을 들려주며 시디를 팔고 있다. 김씨는 “3년 전만 해도 수도권 지하철에서 이 일을 하는 사람이 30여명이었으나, 지금은 나를 포함해 4명뿐”이라고 말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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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르포] 지하철 레코드 판매상의 하루
▶ 온몸이 노곤하고, 정신이 흐리멍덩했던 하루의 끝자락에 지하철에서 골든팝송을 틀어줬던 아저씨 덕분에 위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순간 지하철 안은 무대로 바뀌었고, 솜씨 좋은 디제이(DJ)가 관객들의 감성을 건드리는 음악을 들려줬죠. 요즘은 이런 분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예전보다 단속이 강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이제 수도권 지하철에 4명만이 남았다는 ‘추억의 골든팝송’ 아저씨를 하루 동안 뒤따라 다녔습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하면서 바뀐 여러 풍경 중 하나는 지하철 안의 모습이다. 3~4년 전만 해도 지하철 안 사람들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사람들은 앉아서 신문이나 무가지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꾸벅꾸벅 졸거나, 멀뚱멀뚱 주변을 둘러보곤 했다. 종종 지하철 이동상인들이 와서 유려한 말솜씨로 물건을 소개하면 고개를 들어 쳐다보기도 했고, 이내 시선을 거두기도 했다. 요즘은 다수의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보는 사이에 점점 사라져간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추억의 팝송이나 7080 가요를 시디(CD)에 담아 파는 지하철 이동상인들이다. 2007년부터 지하철 안에서 추억의 골든팝송과 7080 추억의 가요를 팔아온 김창근(62)씨는 얼마 남지 않은 지하철 레코드 판매상 중 한명이다. 김씨는 “3년 전만 해도 수도권 지하철 노선에서 30여명이 팝송 시디를 팔았지만, 지금은 나를 포함해 4명 정도 남았다. 서로 구간이 겹치지 않도록 조율하기 때문에 누가 어디에서 장사를 하는지 서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지하철에서 음악 시디를 파는 상인들이 급격히 줄어든 이유로 김씨는 ‘스마트폰의 대중화’를 꼽는다. 김씨는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고, 지하철 안에서도 스마트폰만 보기 시작하면서 시디 판매량이 급감했다고 설명했다. 화면 밖 세상이 사람들의 시선에서 밀려나듯, 지하철 레코드 판매상도 세상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불법인데 무슨 염치로…” 처음엔 취재 거절 6년6개월간 지하철에서 골든팝송과 흘러간 가요 시디를 팔아온 김씨는 처음엔 취재에 응하기를 주저했다. 7월 중순께 막차를 타고서 우연히 만난 김씨와 연락처를 주고받은 기자는 동행취재를 여러 차례 요청했다. 김씨의 대답은 “저처럼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이 무슨 염치로 신문에 나오겠습니까”였다. 지하철에서 물건을 파는 것이 법에 저촉된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시디를 파는 사람이 몇 명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더 적극적으로 취재를 요청했고 어렵사리 설득했다. 김씨는 지하철 단속요원들로 인해 이동하는 경로가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7월30일 오후 6시, 서울 서남부 지역의 한 지하철역에서 김씨를 만났다. 김씨는 만나자마자 오디오를 얹은, 바퀴 달린 가방에서 주섬주섬 종이를 꺼냈다. 하고 싶은 말을 간단히 적은 쪽지라고 했다. 글은 이렇게 시작했다. “제 직업 명칭은 지하철 실내 디제이(DJ)입니다. 7년여 동안 생업에 종사하면서 죄송스러운 것은 자기발전을 위해 책 보시는 분과 마음이 불편하여 괴로운 분들에게 음악을 판매하기 위해 소음을 드린 것입니다. 그분들에게 죄송하게 생각하며 용서와 이해를 바랍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접할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개성있게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함께 지하철에 올라탔다. 비가 간간이 온 이날은 덥고 습한 날씨였다. 지하철 안에는 퇴근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2시간여 꽤 북적거리는지하철 두 구간을 오갔지만,
시디는 한장도 팔리지 않았다
그는 스마트폰 대중화 이후
한달 100만원도 힘들다 했다 그는 골든팝송 시디를 팔아
딸을 시집보내고
아들의 대학교육을 마쳤다
“한번 단속에 걸리면
이틀 번 돈을 다 날려요
하루 두번도 걸려봤어요”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잠시 양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들에게 선물하면 삶의 활력소가 되는, 추억의 골든팝송입니다. 지금 들려드리는 곡은 사이먼앤가펑클이 부르는 ‘더 복서’(The Boxer)입니다.” 김씨는 가방 위에 있는 오디오의 ‘재생’ 단추를 누르고, 소리를 키웠다. 꽤 큰 소리로 감미로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이 앰 저스트 어 푸어 보이, 도 마이 스토리스 셀덤 톨드~”(나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가난한 소년이지만) 김씨는 소리 크기를 줄이고, 한발씩 걸어가며 말을 이어나갔다. “1950년부터 2000년까지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던 추억의 팝송 총 144곡을 시디 8장에 담았습니다. 가격은 단돈 만원입니다. 휴가 갈 때 들어도 좋고, 집에서 들어도 좋습니다. 두번째로 들려드릴 곡은 스페인 가수 아다모가 부르는 ‘눈이 내리네’(Cae la Nieve)입니다.” 사람들이 북적거린 탓인지, 김씨는 더디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김씨는 “퇴근시간엔 장사를 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이 시간대에는 사람이 적은 구간을 주로 고른다”고 말했다. 다음 칸에서 김씨는 다시 음악을 틀었다. 이번엔 팝송이 아니라 추억의 가요였다. “안녕하세요. 7080 추억의 세시봉 가요입니다. 지금 들려드리는 노래는 2013년 올 여름휴가의 주제곡, 정태춘이 부르는 ‘북한강에서’입니다.” 김씨가 노래를 틀고서 한발짝씩 발걸음을 뗐다. 사회참여적인 노래를 불렀던 정태춘씨의 서정적인 목소리가 통기타 반주에 맞춰 흘러나왔다. “저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한 칸 60여명 있을 때가 ‘환상의 스테이지’ 김씨에게 조용히 다가가 물었다. “이 노래가 왜 올 여름휴가의 주제곡이죠?” “새벽에 강을 바라보는 느낌이 여름에 제격 아닌가요. 요즘 노래 중엔 여름휴가의 주제곡이라고 할 만한 노래가 없어요. 그냥 내 마음대로 정한 거죠.” 김씨는 다음 노래를 틀었다. 이번 노래는 젊은층에게도 꽤 익숙한 고 김광석씨의 ‘거리에서’였다. 김씨의 오디오에선 계속 노래가 흘러나왔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북적거리는 통로를 비집고 들어가는 김씨를 불편해하는 승객들도 있었다. 2시간여 꽤 북적거리는 지하철 두 구간을 오가며 판매를 했지만, 시디는 한장도 팔리지 않았다. 김씨는 판매하기 좋은 적정 승객 수가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많은 차에 올라타면 장사하기가 힘들어요. 가장 좋은 조건은 좌석에 사람들이 다 앉고서, 5~6명 정도가 서 있는 때예요. 지하철 한 칸에 사람들이 다 앉으면 54명이 앉아요. 한 60명 있을 때가 환상의 스테이지(무대)죠. 지하철 같은 칸에 올라타 좋은 노래를 틀면 사람들이 제게 집중해요. 그 눈빛만 보면 다 알아요. 저 사람은 노래를 듣고 있고, 저 사람은 감동을 받고 있고, 저 사람은 곧 지갑을 열겠구나.” 김씨는 지하철 안에서 재빠르게 눈치를 살핀다. 구매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불편해하는 사람을 파악하는 일이다. “자는 사람이 있거나,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소리를 줄여요. 간혹 음악 소리가 시끄럽다고 하시는 분이 있으면 ‘죄송하다’고 말하고 얼른 다음 칸으로 넘어가죠.” 김씨가 이 일을 시작한 시기는 2007년 2월2일이다. 그는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해 한 맥주회사의 영업과장을 하다가,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사태 당시 명예퇴직을 한 김씨는 생수 장사를 하거나 채권관리회사에 다니는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2006년 월급여가 100만원대 초반이었던 김씨는 군에서 제대한 아들의 대학 학비가 걱정스러웠다. 그때 발견한 사람이 지하철에서 팝송 시디를 파는 상인이었다. 음악을 들려주고, 즐거워하며 일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평소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무작정 그 상인을 따라다니며 한달에 얼마나 버는지 물었다. 한달에 최소 200만원은 번다는 말에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이 일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2010년까지는 장사가 괜찮았어요. 한달에 평균 200만원어치 이상을 팔았고, 최고로 많이 판매한 달엔 340만원이 넘었죠. 그런데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2011년부턴 판매량이 확 줄었어요. 요즘은 하루에 3~4개 팔기도 어렵고, 아예 못 파는 날도 있어요. 한달에 100만원 벌기도 힘들죠. 남는 시간엔 파지와 빈병을 모아서 팔기도 하는데요. 이 일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어요.” 김씨는 골든팝송 시디를 판 돈으로 딸을 시집보내고, 아들의 대학교육을 마쳤다. 그는 아들이 2년 전 국내의 한 도너츠 업체에 취직하고서야 마음이 좀 놓였다고 했다. “자식들이 이제 이런 힘든 일을 그만하라고 하긴 하죠. 그래도 놀면 뭐합니까. 노후에 쓸 돈도 모아놔야 하고요. 제가 시대에 뒤떨어지긴 했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봐야죠.” 밤 9시가 넘었지만, 시디는 단 한장도 팔리지 않았다. 지하철에 탄 사람들은 대부분 스마트폰을 봤다. 기자가 동행취재를 한 6시간여 동안 지하철 한 좌석에 앉은 7명 중에 4명 이상은 꼭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거나, 뉴스와 드라마를 보거나, 친구들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장사가 안돼도 김씨는 씩씩하게 같은 말을 반복하며 음악을 틀었고, 다음 칸으로 이동하기를 반복했다. 젊은 사람 두세명이 손에 한 도너츠 상자를 들고 얘기를 하자, 김씨는 그 상자를 여러번 보았다. 아들이 다닌다는 회사에서 만든 상품이었다. 밤 9시10분께 한 역에 정차했다. 이곳에서 파는 2500원짜리 ‘서서우동’이 김씨가 주로 먹는 저녁식사라고 했다. 김씨와 함께 이 우동을 먹었다. 김씨에게 “원래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했냐”고 물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길 안 좋아해요. 처음 장사할 땐 정말 어색했죠. 지금도 이 장사 말고 다른 걸로 사람들 앞에서 말하라고 하면 못해요. 막상 이 일을 그만두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 일을 하던 다른 친구들은 지금 비누도매업, 수입상 등을 하고 있는데 하나같이 어렵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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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김씨를 향해 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정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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