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0일, 퇴근하는 그들처럼 푸른색 장안스피존 간판을 나선다. 오후 6시, 게임은 끝났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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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르포
박유리의 서울, 공간 ⑧ 화상경정·경륜장
▶ 서울에 스며든 그림자를 바라봅니다. 이 도시에 깃든 고독과 꿈, 욕망과 우울, 좌절과 설움, 사랑과 고립을 그리려 합니다. 낯선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갑니다. 먹고산다는 것, 살아낸다는 것, 생존한다는 것의 아름다움과 비루함을 적어보려 합니다.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 물살을 가르는 모터보트, 광명시 경륜장을 달리는 자전거가 실내 화상 경정·경륜장 ‘스피존’으로 들어옵니다. 서울 장안동 스피존에서 돈을 걸고, 따고, 잃었습니다. 돈을 좇아 달렸습니다.
그때 우리는 열광하였다. 두 눈들은 칼끝처럼 화면에 꽂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많던 수백 개의 눈은 순례도 방황도 없이 물보라 일으키는 푸른 물의 경주만을 향해 행진하였다. 혈관이 잡히도록 주먹을 쥐고 뒤흔들며 화면을 향해 고함치며, “씨발, 아, 씨발!” “그렇지! 쭉 가라고!” “아휴, 저 미친!” “씨발, 병신이냐?” “대가리 잡아, 대가리!” “휘감기, 휘감기!” 핏대를 세워 원하고 원망하였다. 우리는 뜨거웠다. 열광은 사람을 타고 상승하여 또 다른 사람을 타고 달아올라 공간을 붉게 전염시켰다. 정신이 팔려 열광하는 그때, 누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훔쳐갔대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같은 종이를 손에 꼭 쥐고서 함성을 질렀다. 우리가 선 곳은 혁명의 광장이 아니다. 빵을 달라, 일자리를 달라, 기회의 평등을 달라, 외치지 않았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개가 아니다, 돈의 노예가 아니다, 선언하지 않았다. 1분, 2분이었다. 2주회 1200m 푸른 물의 경주가 끝나자 함성이 멎었다. 틀린 번호 경주권이 바닥에 버려졌다. 낙엽처럼 후두두 종이가 바닥에 쌓였다. 종이는 우리의 돈. 우리의 돈이었던 종이. 번호를 맞힌 주인들은 은행 창구 같은 곳에 일렬로 길게 줄을 섰다. 차분한 얼굴로, 그렇다고 기쁜 얼굴도 숨긴 채 매너 좋은 시민들처럼 순하게 일렬로 차례를 기다렸다. 전당포처럼 유리로 막아놓은 창 아래 뚫린 구멍으로 손을 집어넣어 경주권을 들이밀면 창문 너머 유니폼 여자가 표정 없이 종이를 받곤 재빨리 돈을 돌려주었다. 그 돈을 지갑에 집어넣는다. 불과 1분50초~2분이었다. 세계 스포츠대회를 응원하듯 열광에 빠진 우리는 1분50초~2분 만에 승자와 패자로 가려져 한 남자가 종이를 버리고, 다른 남자는 돈 창구 앞에 줄을 섰다. 한 남자가 잃은 돈을 다른 남자가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우리의 함성은 조루만큼 뜨겁고 짧다.
20분의 기다림, 2분의 질주
또다시 20분이 시작된다. 기다림의 시간. 하루 16회 경주가 이어진다. 1분50초~2분의 경주가 끝나면 20분간 다음 질주를 대기한다. 화상 경정장 벽에 붙은 여러 화면이 돌아간다. 주식 전광판처럼 끝없이 깜빡인다. 우린 쉴 수가 없다. 다음 라운드 선수들이 경기 전에 시범 항주를 보여준다. 모터보트를 탄 1번부터 6번까지 선수들이 순서대로 경기장을 한 바퀴 돈다. 시범 항주가 끝나면 기록이 나온다. 선수의 오늘 컨디션을 보여준다. 변수는 늘 발생한다. 화면 속 전자시계는 이제 20, 19, 18분 줄어드는 시간을 깜빡인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머리를 굴린다. 돈을 따려고. 게임하러 와서도 돈을 벌어야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돈을 벌어야 한다. 벌러 오지 않았다가 벌기 위해 고민한다. 돈은 우리에게 일을 시킨다. ‘쾌속정’ ‘미사리’ 같은 경정 잡지들을 펼친다. 하루 전 선수들의 훈련 내용이 적혀 있다. ‘4번, 강한 맛이 없음. 아웃코스에서 한 차례 기습 시도. 관심 요망! 의욕적 스타트와 1턴 전개 나서며 선전 펼침. 시속에 비해 전술 운영 밋밋. 스타트 포인트 잡지 못함. 1번, 총알급 스타트. 위력적인 시속 유지하나 전술 소극적. 관심 요망! 인빠지기와 휘감기로 선두 꿰참. 컨디션 점검에 집중함. 노련미 부족으로 선두권 진입 실패. 2번, 첫 연습에서 출발 지체 후 스타트 재정비. 스타트 꽝! 자신감 부족으로 훈련 내내 손을 못 씀. 스타트와 전술 모두 밋밋. 승부 포인트 노리면서 기복 보임.’
우리는 전광판을 보며 눈치 싸움을 벌인다. 단승, 쌍승, 연승, 복승, 삼복승. 다양한 방식으로 돈을 건다. 1등만 맞히거나, 1등과 2등을 맞히거나, 2등 안에 들어오는 아무나 맞히거나, 1등 또는 2등을 맞히거나, 1~3등에 들 세 사람을 맞혀야 한다. 선택지들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이젠 눈치 싸움이다. 앞에 보이는 각각의 화면은 베팅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복승 베팅 화면에 ‘1번, 4번’ 조합 배당률 숫자만 유독 깜빡인다. 2등 안에 들어올 두 사람을 맞히는 복승에선 1, 4번 배당률이 제일 낮다는 말이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몰렸다는 뜻이다. 남들도 저렇게 예상한다는 의미다. 20분, 10분, 5분 시간이 줄어들면서 ‘1, 4번 복승’ 배당률이 2.0 밑으로 떨어져간다. 10만원을 걸어도 20만원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70, 80을 넘어서는 다른 숫자들이 유혹한다. 베팅한 돈의 70~80배를 준다는 뜻이다.
20분간 여유롭게 경주권을 살 수 있지만, 다들 배당률 때문에 선택을 미룬다. 모험이냐, 안전이냐, 분산 베팅을 하느냐. 한 손에 컴퓨터용 사인펜을 들고 또 다른 손에 마킹해야 할 경주권을 쥐고 눈은 배당률을 보여주는 화면과 경정 잡지를 쉼 없이 오간다.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지는 화상경정장엔 행진곡이 울려퍼진다. 1분쯤 남겨놓고 행진곡은 고음으로 치달으며 불안을 자극한다. 장내 안내방송이 나온다. “1분 남았습니다.” 경주권 자동발매기와 대인창구 앞이 발 디딜 틈 없이 미어터진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창구에서 경주권을 사고 나오는 사내와 사려는 사내의 어깨가 부딪친다. 15초, 14초, 13초…. 화면은 시간이 사라지고 있다고 재촉한다. 3, 2, 1, 0초. 줄을 선 사람들 앞으로 여직원은 창구의 커튼을 내린다. 마법처럼 직원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100원부터 10만원까지내 돈들이 걸린 보트 6대가
미사리 경정장을 달리면
전국 17곳 실내 경정경륜장엔
열광과 욕설 한숨과 탄식 1분50초~2분의 질주 뒤엔
틀린 경주권이 낙엽처럼 떨어져
이제 20분간 배당률 전쟁을 한다
경주권 창구 앞 사내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돈을 걸고
2월5일 서울 장안동 스피존 벽면 화면마다 배당률이 돌아가고 있다. 돈은 사람들을 고민에 빠뜨린다. 배당률 화면을 바라보는 사람들. 박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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