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오후 경기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 지평주조의 양조장 내 ‘보쌈실’에서 직원들이 쌀과 밀을 쪄낸 술밥에 발효제인 ‘입국’을 넣어 손으로 섞고 있다. 섞는 과정이 끝나면 큰 보자기로 덮어 하루 동안 발효시킨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토요판] 르포
막걸리 순수령
▶ 수년 전 뜨거웠던 ‘막걸리 열풍’을 기억하시나요? 사그라든 듯했지만 열풍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젊은 청춘들이 양조사업에 뛰어들면서 고급 막걸리 시장이 움찔댑니다. 최근엔 음식점에서 직접 다양한 수제 막걸리를 만들어 팔도록 면허 기준도 완화됐습니다. 정부는 ‘막걸리 순수령’을 계획 중입니다. 올해로 500년을 맞은 독일의 맥주 순수령을 본떴습니다. 막걸리가 ‘순수’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의 막걸리도 세계적인 술로 커갈 수 있을까요?
차 문을 열자 시고 달차근한 찐 쌀 냄새가 ‘화악’ 풍겨왔다. 투명 비닐에 담긴 수십 통의 빈 막걸리병이 멀리 눈에 들어오던 참이었다. 온 마을의 참새와 쥐들이 떼로 몰려온대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배가 주린 이가 이곳을 지났다면 고통스러웠으리라. 양조장 건물보다 더 넓고 튼실한 술 향에, 절로 배가 고파지는 곳이었다.
90년 넘은 양조장
지난 27일 낮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 남한에서 오래기로 한 손 안에 꼽힌다는 ‘지평주조’. 서울 공덕동에서부터 1시간 반을 달린 차가 좁은 시골길 이면도로에 섰다. 막걸리를 실은 트럭이 오갔고, 노란 플라스틱 상자 십여개가 양조장 한쪽에 거꾸로 쌓였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과 함께 자란 버드나무가 그 반대편에 우람히 버티고 섰다. 한옥 한가운데 일식 목조를 심은 듯한 이 건물(면적 427.7㎡)이 한때 유엔군의 사령부였고, 등록문화재(594호)임을 알리는 비석과 문패가 건물보다 더 커버린 버드나무 가지에 가려 있었다. 문화재청고시(2014년 7월1일치)는 “한식 목구조를 바탕으로 일식 목구조를 접합하여 대공간을 구성한 절충식 구조로 당시 탁주 생산 공장으로서 기능적 특성을 건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며 시간을 거스른 건물의 모습을 설명했다. 지평주조는 이 생김새를 따 로고로 쓴다.
양조장 건물은 1939년에 지어졌다. 지평주조는 그보다 앞선 1925년에 설립됐다. 90년이 넘었다. 현 김기환 주조장의 할아버지가 창립자로부터 인수해 3대째 운영한다. 김 주조장은 세는나이로 올해 35살이다. 7년 전 지평주조를 아버지로부터 넘겨받았다. 이곳에서 났지만, 주로 서울에서 큰 그는 대학을 나와 마케팅 일을 하다 가업을 이었다.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의 오래된 흙벽은 현대식 마감재로 덮였다. 겉과 달리 평범했다. 곧장 왼편 끝방으로 갔다. 벽이 나무로 된, 증기 목욕탕 같은 방은 따뜻하고 습했다. 붉은 엘이디로 숫자를 표시하는 온도계가 ‘27.8℃’를 가리켰다. “종국실”이라고 김 주조장이 설명했다. “기계가 잘 맞춰주긴 하는데, 당직 서면서 24시간 지켜봐야 하거든요. 40℃가 넘어가면 곰팡이균이 사멸해요.”
거품이 끓어오르는 알코올 발효 단계의 막걸리를 나무 막대로 젓는 모습.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전통 세워” vs “다양성 막아”
막걸리도 순수령 한다는데
“획일적 규제 필요하지 않다”
“차별성 보여줄 키워드 필요” 순수령보다 주목해야 할 건
누구나 만드는 ‘수제 막걸리’
막걸리 열풍 사그라졌대도
의욕 넘치는 생산자들 늘어
진짜 열풍은 이제 곧 시작 막걸리도 순수령? 지평주조에서 여느 날처럼 막걸리가 익어갔을 지난 23일은 독일이 ‘맥주 순수령’(Reinheitsgebot)을 공포한 지 정확히 500주년이 된 날이었다. 독일 체신국에선 기념우표를 발행했고,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순수령 축제에 참석했다. 축제는 순수령이 처음 공포된 남동부 바이에른주에서 열렸다. 독일은 막걸리처럼 곡물 발효주인, 독일식 맥주의 오랜 전통이 순수령을 통해 확립됐다고 믿는다. 맥주 순수령은 맥주의 원료를 물과 보리(맥아), 홉만으로 제한한 법령이다. 다른 것이 섞이면 ‘맥주’라 부를 수 없다. 오래된 식품 관련 법률 중 대표 격이다. 1516년 4월23일 바이에른 공국의 공작 빌헬름 4세가 처음 공포했다. 당시엔 이를 어기면 해당 양조업자의 맥주를 압수했다. 16세기는 도시가 발달하던 때다. 맥주 소비가 늘었고 양조업자들은 향초나 향신료, 과일을 넣어 맥주를 만들었다. 알코올 도수를 높이기 위해 독초를 넣었고, 수도원에선 밀로 맥주를 만들었다. 공국으로선 식량인 밀이나 호밀 가격을 안정시켜야 했다. 조세 수입도 늘릴 수 있었다. 훗날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순수령을 독일 전역에 적용했다. 500년 동안 순수령을 지켜오면서 독일 양조업자들은 제한된 원료의 조합만으로 다양한 맥주를 만들 수 있게 됐다. 설탕이나 식용색소, 인공향 같은 유해 첨가제를 막는 효과도 있었다. 순수령이 주변국에 비관세 장벽이 된 오늘날엔 수출용 맥주나 수입 맥주는 예외가 됐다. 밀 맥주도 19세기 초 합법화됐지만, 대부분의 독일 양조업자는 여전히 순수령을 따른다. 순수령은 독일 맥주의 정체성이다. 맥주 순수령 500주년을 앞둔 지난해 말 한국의 농림축산식품부는 ‘막걸리 순수령’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맥주 순수령을 따라 국산 쌀과 발효제, 물만을 사용해 빚은 막걸리에 대해서만 품질 인증을 해주는 방안이다. 그동안은 밀이나 당분, 각종 식품 첨가물을 넣어도 품질을 인증했지만, 순수령을 시행하게 되면 순수령을 따른 막걸리 외에는 품질 인증을 받을 수 없다. 정부의 품질 인증을 받은 ‘순수한’ 막걸리와, 그렇지 않은 막걸리가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정부의 순수령 시행 방안은 한국의 대표적 전통주로 떠오른 막걸리의 인기와 무관치 않다. 유산균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유통되는 막걸리는 2010년께 ‘웰빙붐’을 타고 판매가 늘었다. 막걸리 출하량은 2009년 21만4000㎘에서 2011년 44만4000㎘로 두 배 이상 급증했다가 이후 41만5000㎘, 2013년 37만8000㎘로 줄었지만 2014년 다시 43만1000㎘로 늘면서 안정된 추세를 보이고 있다. 막걸리의 인기가 높아지자 일본에선 곡물 가루를 넣은 ‘흐린 청주’가 ‘막걸리’란 이름으로 유통되기도 했다. 김치가 ‘기무치’(キムチ)가 되는 것을 막듯, 막걸리의 정체성을 확실히 할 계기가 필요하지만 한편에선 막걸리의 다양성이 말살된단 우려도 나온다. 실제 독일도 순수령 이후 맥주의 다양한 맛이 사라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과 영국, 벨기에 등지에선 각종 첨가물을 이용한 맛 개선이 이뤄졌지만 독일 맥주는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개인이나 소규모 양조장이 생산하는 수제맥주 시장이 확대되면서 순수령이 이미 흔들린다는 지적도 인다. 농림부도 신중한 모습이다. 인소영 농림부 식품산업진흥과 사무관은 “애초 올 상반기 중 시행할 계획이었지만 막걸리뿐 아닌 다른 전통주를 포함한 인증 유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어 업계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고 파급효과를 검토하는 중”이라며 “과일 등 천연재료를 허용하는 문제를 놓고도 긍정적 검토가 필요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평주조의 양조장 건물.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지어졌다. 2014년 등록문화재(594호)로 지정됐다.
강재훈 선임기자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