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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7.01 20:04 수정 : 2016.07.02 15:10

[토요판] 르포
탄생 100돌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

1970년대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과에서 토기들을 살펴보는 최순우 전 관장(오른쪽)과 정양모 학예관.
혜곡 최순우. 한국 회화사 연구의 권위자인 가헌 최완수(74) 선생은 스승이던 그를 “우리 전통미술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가장 먼저 느껴보고 퍼뜨렸던 사람”이라고 떠올렸습니다. 올해로 탄생 100돌을 맞는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1916~1984)는 32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이가 뛰어난 안목으로 이 땅의 문화유산들에 부여해준 의미와 가치들은 지금도 한국인들에게 소중한 안목의 나침반이 되고 있습니다. 예술과 삶이 하나 되는 ‘문화열락’의 경지를 좇았던 그의 품격 넘쳤던 삶을 되돌아봅니다.

정갈한 사랑방 아랫목의 방석에 앉아 문 들머리를 올려다보았다. 천장 가까이 걸린 깔깔한 필체의 현판 글씨가 눈에 바로 들어왔다. 19세기 조선 말기의 대학자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 ‘매죽수선재’(梅竹水仙齋)다. 매화와 대나무와 수선화가 있는 방이란 뜻이다. 서안과 보료가 있는 아랫목 왼쪽 벽에는 수화 김환기와 박수근의 소품 복제그림들이 걸려 있다. 이 방 주인은 옆으로 우리 근대 그림을 보고 정면으로 추사의 추상 같은 전통글씨들을 주시하면서 우리 근현대 전통미술사의 기품과 정신들을 접했을 것임에 분명하다. 삼층탁자와 문갑이 정연하게 놓인 사랑방에서 집의 앞뜰과 뒤뜰로 통하는 사랑방의 用(용)자 살창을 여니 초여름 살가운 바람이 흘러 들어온다. 뒤뜰에는 산수유, 소나무, 자목련, 모과나무, 감나무가 문인석, 향로석, 괴석과 소박하게 어우러진 작은 정원이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주종 불사하는 주당, 예민한 미식가

지난 23일 서울 성북동 언덕의 경신고교 아래 골목길을 돌아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의 옛집(등록문화재)을 찾았다. 탄생 100돌을 맞는 올해에도 옛집 마당과 본채, 안채에는 향기롭고 고즈넉한 문향이 넘쳐흘렀다. 1930년대 초 지어져 혜곡이 1976년부터 1984년 타계 때까지 살았던 30여평짜리 한옥. 2002년 다른 이에게 팔릴 뻔했다가 시민 모금으로 문화유산 보존단체 내셔널트러스트에서 사들여 2004년 복원했다. 그 뒤 등록문화재가 되어 11년째 개방되고 있다. 사랑방이 있는 안채와 사무실, 서고가 있는 바깥채가 서로 맞닿아 이뤄진 ‘ㅁ’자형의 수더분한 가옥 얼개와 툇마루에 놓인 푸근한 함지박의 모습들이 마음을 풀리게 했다. 사랑방이 있는 안채의 앞뜰 쪽 현판에는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이라는 고인의 친필도 보였다. 76년 입주 당시 일일이 한옥을 자신의 구상대로 고치면서 직접 써넣었다는 문구다. ‘문을 닫으면 곧 깊은 산중’이란 뜻의 이 글씨가 생전 전통과 예술이 삶과 하나 되는 경지를 지향했던 혜곡의 의지와 생각들을 말해주는 듯하다. 뒤뜰로 통하는 툇마루 위쪽엔 ‘낮잠 자는 방’이란 뜻의 ‘오수당’(午睡堂) 현판 글씨도 걸려 눈길을 끈다. 단원 김홍도의 글씨 첩에 실려 있는 글씨를 새로 파서 매단 것이다. 그는 60년대 이 서첩에 대한 연구와 고증으로 조선미술의 거장 단원 김홍도가 1745년 태어났다는 것을 밝혀낸 바 있다. 이런 성과에 대한 자부심과 단원 그림에 대한 애착을 판각 현판으로 담아냈던 셈이다.

성북동 자택 사랑방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 말년의 혜곡 최순우.
생전 성북동 자택은 나라를 대표하는 숱한 문인 화가 묵객 학자들의 품격 높은 아지트였다. 국립중앙박물관장과 한국미술사학회 회장을 함께 맡으며 나라의 문화예술계를 이끄는 영수로 인정받았던 혜곡은 집에 지인들을 불러 전통문화와 예술의 열락을 논하는 술자리와 집담회를 자주 벌이곤 했다. 혜곡은 주종을 불사하는 주당이자 입맛이 예민한 미식가였다. 특히 개성 요리에 일가견이 있던 부인 박금섬씨가 제철 재료를 골라 내놓는 안주들은 최고의 별미였다. 정월엔 조랭이떡국과 만두가, 여름엔 편수가, 가을엔 신선로가 주연에 올라 구미를 당겼다. 회화, 공예, 민예품 등 문화유산들은 물론 이 땅 곳곳의 경치와 음식, 건축물 등에 얽힌 감상과 품평이 새벽까지 이어졌다. 1966년 그의 주선으로 수집가 간송 전형필이 세운 성북동 보화각에 들어가 간송미술관의 터전을 놓은 최완수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도 고인의 가장 가까운 술친구들 중 하나였다. 최 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혜곡 집으로 간송 전형필의 아들 전영우 선생과 종종 쳐들어갔지요. 일반인들은 짐작하지 못하는 별세계에서 그림과 꽃 등을 주제로 선문답을 하듯 이야기꽃을 피웠지요. 화초, 음식, 경치, 그림 등에 대한 품평과 정담을 잇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통음했어요.”

부립개성막물관 말단 서기로 시작
해방 뒤 국립박물관 40년 봉직
1984년 타계 때까지 살던 성북동 한옥
문인 화가 묵객들 즐겨찾던 아지트
시민모금으로 사들여 2004년 복원

누구도 따라가지 못한 뛰어난 감식안
부석사 무량수전, 달항아리 등 재발견
대학 안 나온 탓에 학계 평가 인색한 편
탄생 100돌에도 조촐한 행사뿐
그가 남긴 업적 학문적 재조명 숙제

개성 출신의 혜곡은 1943년 한국미술사학의 비조 우현 고유섭이 관장을 맡은 부립개성박물관에 말단 서기로 들어가 박물관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해방 뒤 국립박물관에서 학예관과 미술과장을 거쳐 74년 관장을 맡았고, 84년 순직할 때까지 40년을 봉직했다. 한국미술 2000년전, 한국미술 5000년전 등 서구와 일본을 순회해 절찬을 받은 기념비적인 해외 전시와 ‘한국명화근오백년전’ ‘한국초상화’전 등의 중요 기획전을 차렸다. 64년 한국 도자사 최초의 발굴조사인 전남 강진 사당리 요지 발굴조사를 시작했고, 60년대말에는 송광사를 시작으로 전국 사찰불화조사 등의 선구적 학술사업을 벌여 미술사학계의 연구기반을 닦았다. 꼭 해야 할 말만 하는 스타일에, 당대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뛰어난 감식안으로 스승 우현 고유섭과 일본 학자들의 논고를 들추며 묵묵히 학계의 저변을 넓혀갔던 것이 그의 사명이자 과업이었다. 세간에서 널리 퍼진 명품 문화유산에 얽힌 감상의 요점이나 미의식들은 그가 처음 느끼고 퍼뜨려 정설이 된 것들이 많다. 부석사 무량수전, 달항아리, 조선시대 목가구, 반가사유상의 미학 등이 그렇게 혜곡이 재발견한 문화유산들이다. 불화의 경우 지금은 고려불화, 조선초 불화 등이 각광 받지만, 그가 처음 사찰 불화를 주목해 조사하던 60년대 중반만 해도 폐품처럼 굴러다니던 유물들이었다. 생전 글에서 ‘흰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 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이라고 극찬했던 달항아리도 그이의 미감으로 되살아났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관에서 열리고 있는 ‘혜곡 최순우가 사랑한 문화재들’전의 유물들에는 감칠맛 나는 혜곡의 감상기가 붙어 있다. 고려시대의 물가풍경무늬 정병의 아름다움을 ‘맵자하다’(날씬하고 세련된 모양새를 띠다)는 표현 하나로 집어냈고, 조선시대의 나전칠 봉황 꽃새 소나무무늬 빗접은 ‘대나무 가지와 소나무 가지가 아래위에서 엇갈려…멋가락을 피워 주고 있다’고 묘사했다. 고려시대의 10세기 철제불상 머리에서는 ‘앳된 얼굴의 그윽한 미소 속에 스며진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참사랑의 간절한 뜻’도 읽게 된다.

평생 차려주는 데만 힘쏟은 인격자

문화재 동네 사람들에게 혜곡은 평생 얻어먹지 않고 차려주는 데만 열심이었던 인격자로 기억되곤 한다. 남의 말을 끝까지 듣고 속내를 헤아려주는 성품 덕분에 따르는 후학들이 많았다. 까탈스럽기로 유명했던 황수영, 김원룡, 김재원 전 관장에 비해 그는 박물관 후배들에게 단연 살가운 선배였다. 교수가 아니어서 강단 학파를 만들지 않았지만,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과 최완수, 강우방, 문명대, 이원복 등 지금 도자사, 회화사 학계의 주요 학자들과 학연을 맺었고 화가 이우환씨와 건축거장 김수근도 함께 답사하고 전시를 감상하면서 감식안을 키웠다. 감식안을 함께 나누었던 화가 김환기와 어릴 적부터 내왕한 화가 김기창, 고인이 “화려한 슬픔을 지닌 화가”라고 화풍의 속살을 집어냈던 천경자는 평생 교감한 절친한 벗들이었다.

지난 4월27일은 최순우 선생이 탄생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생일이었다.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은 최순우의 생일인 27일 성북구 최순우 옛집에서 시민들과 문화예술인들이 모인 가운데 조촐한 ‘생일잔치’와 음악연주회를 차렸다. 6월4일에는 한국미술사연구소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혜곡의 생애와 학문 세계를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학계나 문화계 일각에서는 뭔가 허전하다는 반응도 없지 않았다. 그가 생전 역대 국립중앙박물관장들 가운데 초대 김재원 관장(25년)에 이어 두번째로 오랜 10년간이나 재직했고, 그 시기 4년 동안 한국미술사학회 회장도 역임했는데, 탄생 100돌이라는 기년치고는 행사들이 너무 조촐하지 않았냐는 지적들이 나왔다. 박물관이나 한국미술사학회에서 기념행사를 맡아 대대적으로 고인의 학자적 발자취를 재조명하는 기회를 마련했어야 했다는 의견들이었다. 학술대회는 혜곡의 회화, 불교조각, 석조각, 공예 등에 걸친 분방한 학문적 발자취를 조명하는 자리였지만, 그가 가장 애착을 보였던 도자사가 빠진데다, 원론적 차원의 접근에 머물렀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최순우가 사랑했고 그 가치를 처음 알렸던 달항아리. 노형석 기자
혜곡은 대중에게 문화유산 애호가, 미문가로 알려져 있다. 잡지, 학술지, 저서 등에 실렸던 문화유산 관련 수필글들을 간추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란 베스트셀러가 문화유산 분야의 필독서일 정도로 이름을 얻은 영향이 크다. 그러나 그가 심혈을 기울였던 불교회화사나 도자사, 회화사 관련 연구성과들이 학문적으로 재조명된 적은 별로 없었다. 최완수 소장은 국내에서 다방면에 달통했던 대가들은 나중에 특출한 한 부분만 주목받아 종합적인 평가를 못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추사 김정희가 불세출의 학자인데도 글씨에 가려 넓고 깊은 학문적 성취가 오늘날 주목받지 못하는 것과 비슷해요. 혜곡도 다방면에서 뛰어난 감식안으로 중요한 미술사적 업적을 쌓았는데도, 글맛과 감식안에 가려 진면목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해요. 타계 30년이 지나도록 미술사학자로서의 평가가 진척되지 못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까닭에 그는 송도고등보통학교를 나온 고졸이다. 혜곡을 바라보는 학계의 시선은 지금도 냉랭한 일면이 있다. 미문가로서의 글솜씨와 안목은 인정하지만, 체계적인 이론이 부족하고, 감상주의에 치우쳤다는 시각들이 적지 않다. 동향인 개성 출신이자 박물관 동료였던 황수영, 진홍섭씨와 함께 고유섭 휘하에서 공부한 개성 3걸 혹은 3총사로 불렸지만, 다른 두 사람과의 교분은 별로 없던 편이었다고 후학들은 말한다. 그가 활동했던 한국미술사학회에서도 주된 발언은 황수영, 진홍섭, 김원룡 등이 했고, 그는 물러나 묵묵히 얘기를 듣고 학회 일을 도맡아 하는 쪽이었다. 지난달 학술대회를 주관한 문명대 교수는 “학벌의 한계 때문에 혜곡은 국립중앙박물관장과 한국미술사학회 회장도 황수영, 김원룡이 역임한 뒤에야 맡을 수 있었다”며 “학벌에 대한 자의식이 평생 따라다녔을 것”이라고 했다.

학덕으로 교분 쌓는 풍류 가치 중시

미술을 치열한 공부의 산물로만 생각하지 않았던 게 혜곡의 관점이었다. 생활 속에 예술과 기예를 하나로 녹이는 자연스러운 노력, 타고난 미에 대한 감각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그는 보았다. 구수한 큰맛, 자연스러움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전통 미술은 그런 과정 속에서 숙성됐다는 게 혜곡의 통찰이었고, 그래서 공부 못지않게 유적과 유물을 자주 답사하고, 꽃나무나 곤충 등의 자연을 보고 느끼면서 감식안을 닦으며, 많은 이들과 학덕으로 교분을 쌓으며 즐기는 풍류의 가치를 중시했다. 특히 혜곡은 심미안의 기반이 된 문인 정신을 전시장과 자신이 살았던 한옥의 공간 속에서 구현하려 애썼다. 옛것에서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창출하는 법고창신의 기풍이야말로 고인의 일생을 관통했던 화두였다. 생전 교분이 남달랐던 천경자, 이우환 작가의 위작 파문이 사회적 이슈가 되어 입에 오르내리는 요즘, 예술과 삶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던 고인의 발자취가 한결 절실하게 느껴진다.

60년대 그가 남긴 수필 ‘가정과 생활미술’의 글머리는 서늘하다. 이 시대 미술인들과 미술학도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한국미술의 또다른 일면이 아닐까.

“미술이라면 보통 잘 아는 듯하면서도 정말은 잘 모르는 수가 많고, 그 반대로 모르는 듯하면서도 어느 사이 올바르게 느끼고 아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말이나 글로써 그 정의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정말 정확하게 미술을 잘 알고 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실상 미술이란 것이 말이나 글로써 정확하게 그 정의를 밝힐 수 없는 예술이기도 합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도판 내셔널 트러스트·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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