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전구속영장이 기각됐다.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핵심 고리로 박근혜 대통령의 뇌물수수 혐의를 입증하려던 특검은 수사의 기초를 더 튼실하게 다져야 할 처지에 놓였다. 18일 오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앞두고 특검 사무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오른 이 부회장. 연합뉴스
|
구속은 수사의 수단이지만
그건 ‘교과서 속’ 얘기일 뿐
특검은 “구속이 정의 실현”
법원이 “소명 부족” 기각하자
언론은 “수사에 제동 걸렸다”
서울 대치동 특검 사무실엔
기자·시위대·경찰…바글바글
대기업 홍보팀도 기웃기웃
출범 한달…반환점 도는 특검
“최종 목적지는 결국 박근혜”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전구속영장이 기각됐다.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핵심 고리로 박근혜 대통령의 뇌물수수 혐의를 입증하려던 특검은 수사의 기초를 더 튼실하게 다져야 할 처지에 놓였다. 18일 오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앞두고 특검 사무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오른 이 부회장. 연합뉴스
|
[토요판] 르포
‘대치빌딩’의 3일
▶ 유례없이 현직 대통령을 수사하는 특별검사. 그 역사적인 시공간을 가보고 싶었는데 마침 또 유례없는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 경영권을 승계해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 여부가 결정되던 찰나였다. 그 귀한 장면을 놓칠 수 없어 특검 현장으로 들어갔다.
삼성에버랜드 상공에 헬기가 떴다. 비자금으로 구입한 값비싼 미술품들을 모셔둔 비밀스런 창고가 털리는 순간이었다. 수천점의 미술품들이 나왔다. 압수수색은 하루로 부족해 이틀 동안 진행됐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2008년 1월21일이었다.
이 장면을 보고 당시 삼성 특검 담당 기자들 중엔 “삼성이 드디어 망하는구나”라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다. 검찰도 법원도 건드리지 못한 삼성을 특검이 손을 제대로 본다고 생각했다. 정말 순진한 생각이었다. ‘삼성 특검’은 이건희 삼성 회장과 불법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그의 수족 노릇을 한 삼성 임원들을 배임·조세포탈·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했지만 구속하지는 않았다. 비자금 조성이나 정관계 로비, 차명 재산의 출처 등은 증거가 부족하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말이 좋아 무혐의이지 면죄부를 준 것이고,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손에 묻은 때와 먼지를 털어준 셈이었다. 4년 뒤 조준웅 삼성 특검의 아들이 삼성에 특채로 입사한 사실이 드러났다.
9년 뒤 특검과 삼성은 다시 만났다. 특검 조준웅은 특검 박영수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그의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으로 바뀌었다. 물론, 9년 전의 특검과 달리 박영수 특검팀의 ‘최종 목적지’는 이재용이 아닌 박근혜 대통령이다. 그 이름조차 장황한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구성된 박영수 특검이 21일로 출범 한 달을 맞았다. 거침없던 특검팀의 수사는 이재용 부회장의 사전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잠시 멈춰섰다. 반환점이자 전환점에 놓인 특검 사무실에 다녀왔다. 수사하는 특검팀과, 수사받는 피의자들과, 보도하는 기자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특검 건물 안팎을 에워싸고 있다. 현재 이곳은 대통령까지 연루된 국정농단 사건과 사건에 얽힌 이해관계자들의 촉각이 진실규명을 바라는 온 국민의 열망과 치열하게 충돌하는 공간이다. 한국 사회가 쏘아보낸 시선들이 가장 빽빽하게 몰려 있는 장소다.
“야, 그 앞에 차 좀 빼!”
기자들이 소리쳤다. 1월17일 오전 9시45분. 특검이 출석을 요구한 피의자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특검 사무실 건물 주차장 앞에 등장했을 때였다. 때마침 건물을 나서던 검은색 승용차가 카메라기자들의 시야를 막았다.
김 전 실장이 카메라 앞에서 ‘얘기가 되는’ 말을 할 가능성은 적다. 입이라도 열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취재기자들이 걱정해야 할 몫이다. 카메라기자는 다르다. 승용차에서 내려 특검 사무실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빠짐없이 김 전 실장의 모습을 담아야 하는 게 그들의 업이다.
그런 찰나에 기자들의 시야를 막았으니 그 검은색 승용차는 오도 가도 못 하는 꼴이 됐다. 기대와 우려대로 김 전 실장은 기자들의 질문에 입을 굳게 다문 채 특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 검은색 승용차는 김 전 실장이 사라지고 주차장 앞 출입구로 몰려든 시위대들이 정리된 이후에야 건물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차 안엔 박충근 특검보가 타고 있었다. 거물급 피의자가 출석하는 귀한 ‘그림’을 선임 특검보가 망칠 뻔한 순간이었다. 여기저기서 기자들의 볼멘소리가 들렸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선릉역 1번 출구 앞 대치빌딩에서 지난 12월21일 이후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상이다. 김 전 실장처럼 카메라가 불을 뿜으며 사진과 영상에 담는 주요 피의자들은 3층 주차장으로 들어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17~19층 특검 사무실로 올라간다. 20층 높이의 대치빌딩 앞쪽은 지상층이 1층인 반면 지대가 높은 건물 옆쪽은 지상층이 3층이고 여기가 주차장 입구다. 기자들은 3층 엘리베이터 앞에 진을 치고 주차장 입구에서부터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피의자들의 표정과 목소리를 담는다.
수사팀 인력만 105명인데 그 수사팀보다 더 많은 기자들이 빌딩 13~14층 곳곳에서 취재를 벌이고 있다. 17~19층 3개 층을 쓰는 특검 사무실의 월 임대료만 6000만원이 넘는다. 언론사들도 14층 브리핑실에 의자와 책상 하나를 잡는 데만 100만원씩을 냈다. 13층엔 언론사별 부스가 들어서 있다. 과거 어느 법무법인의 사무실로 쓰던 곳이다보니 각 방 문엔 아직 변호사 문패가 붙어 있는 곳도 있다. 3명 정도 쓸 수 있는 책상과 의자가 비좁게 붙어 있는 이 방을 사용하는 비용도 월 100만원이다. 이런 조건이 탐탁지 않아 특검 사무실 부근 오피스텔을 임대한 언론사도 있다. 아예 숙식까지 해결하는 공간으로 쓴다.
사람과 차들로 분주한 선릉역 교차로지만 특검 사무실 건물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이재용 부회장이 나오면 “이재용을 구속하라”는 사람들이,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나오면 “김기춘을 구속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언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가끔 고함소리가 들리며, 경찰들에 둘러싸인 건물이 보이면 틀림없이 대치빌딩이다.
말끔한 양복을 입고 특검 사무실 주변을 배회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대기업 관계자라고 봐도 된다. 미르와 케이스포츠재단에 출연금을 낸 재벌사 홍보팀도 바쁘다. ‘우리 회장님’은 언제쯤 부를까, 우리 회사 기사를 취재 중인 언론사는 어딜까, 한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기자들과 점심 약속을 잡는다. 헤어질 때 그들은 이런 인사말을 남긴다. “오늘 우리 만난 일 없는 거예요.”
이들이 전부가 아니다. 하루 중 가장 추위가 덜한 오후 2시가 되면 “특검을 탄핵하라”는 보수(처럼 보이는) 단체들이 집회를 연다.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이 열린 18일엔 이들의 목소리가 더 우렁찼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마지막 저녁자리에 참석했던 가수 심수봉의 노래로 분위기를 띄운 집회는 애국가 4절을 완창한 뒤 “특검이 무리한 구속수사로 국가 경제를 위협한다”로 이어졌다. “오늘따라 유독 심하네.” 14층 기자실까지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들의 집회가 끝나자 이번엔 “박근혜를 구속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테헤란로 2개 차선을 가득 메웠다.
이재용의 구속을 둘러싼 고민들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영장이 청구되고 기각되는 과정은 짧은 듯 길었고 험난한 듯 뻔했다. 본인인 이 부회장에게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이를 보도하는 기자들에게도 만만치 않은 시간이었다. 박근혜-최순실 앞에서 진폭이 좁았던 언론들의 태도가 특검 사무실과 법원 앞에 이재용 부회장이 나타나자 돌멩이 떨어진 연못처럼 쪼개졌다. 그의 구속을 놓고 보도의 결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검이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청구한 다음날인 17일 <한국경제>가 ‘총대’를 멨다. 1면 머리기사에 “경제 파장보다 ‘광장 정서’ 선택한 특검”이란 제목을 붙였다. ‘국가 경제에 영향을 미칠 텐데 굳이 글로벌 기업인을 구속 수사해야 하냐’는 얘기였다. 같은 날 <동아일보>는 “법조계에선 논란이 분분하다”고 운을 뗀 뒤 박근혜-최순실이 이익 공유 관계라는 걸 입증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며 “법원은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고 전했다.
두 신문의 ‘선빵’에 자극을 받았는지 <조선일보>는 18일 “삼성 앞에 ‘미 부패방지법 리스크’”라는 기사를 1면에 썼다. ‘이 부회장의 영장 (발부도 아닌) 청구는, 부패 기업에 강한 벌칙을 가하는 미국의 부패방지법 적용 대상으로 삼성이 찍히게 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이 부회장이 사법처리 되면 삼성이 해외에서 동네북이 될 수도 있다는 협박 같은 걱정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언론들이 예외없이 (이재용 구속에) 신경을 더 쓰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설령 ‘구속의 당위성’을 주제로 기사를 쓰더라도 그 대상이 이재용이라 더 꼼꼼하게 보고 빈틈이 있진 않을까 걱정한다.”(ㄱ기자) 사망선고를 받은 정치권력보다 죽지 않는 자본권력을 대하는 ‘자기검열’이 개별 언론사뿐 아니라 기자 개인에게도 작동한다는 얘기다.
<조선일보>의 ‘주문’이 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일 새벽 5시 서울중앙지법 조의연 판사는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포털 검색어 순위에 ‘기각의 뜻’이 올랐다. 언론들은 일제히 ‘특검의 수사에 제동이 걸렸다’고 보도했다. 조 판사는 “뇌물범죄의 요건이 되는 대가관계에 대한 소명 정도를 볼 때 구속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한국 형사소송법엔 피의자가 도망치거나 증거를 없앨 위험이 있을 때만 구속을 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조 판사의 결정은 이를 따랐을 것이다. 이 부회장을 구속하지 않는다고 그를 수사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왜 삼성에게만 유독?’이라는 궁금증을 떨치긴 어렵다. “조 판사 판단대로라면 이번 특검이 구속한 사람들, 전부 영장 기각됐어야지. 죄다 얼굴 알려진 사람이고 주거 분명한 사람들인데”라는 ㄴ기자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조 판사가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시작하고 기각 결정을 알려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18시간. 법원은 ‘사안이 중대해서’라고 하겠지만, 당사자에게 중대하지 않은 구속영장은 없다. 이재용 부회장이 아니었다면 그리 긴 시간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특검은 국민이 임명했다
“아 몰라, 망했어.”
특검의 향후 항로를 두고 ㄷ기자는 19일 이렇게 말했다. 피의자 구속영장 하나 기각됐다고, 그래서 혹 특검의 동력이 약해졌다고 기자가 망할 일이 뭐 있을까만, 이미 특검과 (다수의) 언론과 국민 또는 여론은 한배를 타고 가는 중이다. ‘#박영수특검힘내라’는 해시태그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퍼지는 것도 그런 이유다. 당일 특검 사무실엔 시민들이 배달시킨 ‘특검 응원 꽃다발들’이 답지했다.
특검은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국가 경제를 생각했지만 정의를 세우는 일이 우선이라 판단해 결정했다”고 밝혔다. 특검이 말한 ‘정의’는 여론이라고 보는 게 이해하기 쉽다. 특검법 자체가 유권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국회가 만든 법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그 가신들의 불법 행위에 힘입어 지금의 자리에 오른 이재용 부회장이 또다시 불법 행위에 가담한 사실을 국민들은 용서할 수가 없다. 특검은 국민을 대리하는 중이다.
매일같이 “딱 맞는 코트에 머플러로 악센트”(<조선일보>)를 준 이규철 특검보가 언론을 상대로 브리핑을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번 특검법엔 ‘피의사실 외의 수사 과정에 대해 언론 브리핑을 실시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대국민 보고 조항이 특검법에 들어가긴 처음이다. 현직 대통령이 수사 대상인 유례가 없는 특검인데다 피의사실공표죄 논란을 피하기 위한 조항이다.
“박영수 특검은 (수사할) 여건이 좋아. 정권은 힘이 빠질 대로 빠졌고 여당, 야당은 물론이고 <한겨레>도 <조선일보>도 <제이티비시>도 빠짐없이 모두가 수사를 지지하잖아. 수사의 목표도, 박근혜 딱 하나, 분명하잖아. 의욕이 넘치고 분위기가 좋아서 자제를 해야 할 정도야.”
ㄹ기자가 이 말을 한 건 이 부회장의 구속 여부가 결정되기 전이었다. 결국 구속영장은 기각됐다. 모르쇠는 기본이요, 증거 인멸과 말 맞추기로 ‘무장’한 박근혜-최순실 일당을 상대하는 특검에 구속영장은 강력한 ‘무기’였다. 이재용은 그 목적지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산이었는데, 거침없이 산을 오르던 특검팀이 법원이 놓은 돌부리에 걸렸다. 물론 이재용의 구속영장 기각이 국민연금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의혹의 불법성을 부인하는 건 아니다. 어차피 특검팀이 오를 산꼭대기엔 박근혜 대통령이 있다.
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
|
박영수 특검팀은 수사 인력만 105명인데 그 수사팀보다 더 많은 기자들이 빌딩 13~14층 곳곳에 진을 치고 있다. 기자들 역시 브리핑실에 의자와 책상 하나씩을 잡는 데만 100만원을 냈다. 연합뉴스
|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이 있던 18일 오후 2시가 되자 “특검의 탄핵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박현철 기자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