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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6.22 20:32 수정 : 2012.06.23 17:07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취임 이후 삼성의 ‘2인자’ 역할을 맡았던 역대 비서실장. 왼쪽부터 소병해·이수빈·현명관·이학수·김순택·최지성씨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뉴스분석 왜? / 삼성 2인자들의 영욕사
얼굴 붉히며 떠난 이학수…최지성의 미래는?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삼성의 사령탑을 지휘하며
계열사 사장단까지 좌우했지만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만 그들
두달 만에, 또는 14년 만에

유일하게 웃으며 떠난 사람은
자동차사업 진출 이끈 현명관
최지성 미래전략실장 기용은
무난한 ‘경영권 승계’ 위한 포석

삼성의 2인자는 총수를 대신해 삼성의 사령탑을 지휘하며, 계열사 사장단 인사까지 좌우하는 막강한 자리다. 이건희 회장이 25년 전 취임 이후 삼성에는 모두 6명의 2인자가 있었지만, 이 회장과 웃는 낯으로 헤어진 사람은 극히 드물다. 영욕이 극단적으로 교차한 삼성 2인자들의 역사를 추적해본다.

삼성의 김순택 부회장은 지난 6일 미래전략실장에서 경질된 직후 외국으로 출국한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의 한 고위임원은 “그동안 피로도 쌓였겠지만 많이 섭섭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한다. 김 부회장은 2010년 11월 전임 전략기획실장(미래전략실장)인 이학수 부회장을 밀어내고 깜짝 발탁됐지만, 새로운 삼성 2인자를 비추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불과 1년 반 만에 꺼졌다.

비서실장, 구조조정본부장, 전략기획실장, 미래전략실장. 삼성의 2인자 명칭의 변천사다. 과거 왕조시대의 재상을 ‘일인지하 만인지상’(왕의 바로 아랫자리이고, 온 백성의 맨 윗자리)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삼성 2인자는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삼성의 사령탑을 지휘하며, 계열사 사장단 인사까지 좌우하던 막강한 자리다. 하지만 왕조시대에도 왕의 신임을 잃으면 하루아침에 토사구팽 당했듯이, 삼성의 2인자들도 이건희 회장에 의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영욕의 역사를 살아왔다.

2인자 중에서도 쌍벽, 소병해 VS 이학수

이건희 회장이 1987년 말 취임 이후 25년 동안 삼성에는 모두 7명의 2인자들이 있었다. 최지성 신임 미래전략실장을 제외한 6명 중에서 이건희 회장과 웃는 낯으로 헤어진 사람은 현명관 실장 한명 정도에 불과하다. 이건희 회장과 얼굴을 붉히며 헤어진 대표적 사례로는 소병해와 이학수 두 실장이 꼽힌다. 그들은 역대 삼성의 2인자 중에서도 쌍벽을 이루는 인물들이다.

소 실장은 선대 이병철 회장 때인 1978년부터 시작해 이건희 회장 취임 이후인 1990년 말까지 장장 12년간 2인자의 자리를 지켰다. 그는 이건희 회장과는 부회장 시절부터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의 전직 고위임원은 “소 실장이 이건희 부회장의 뒷조사를 시켰는데, 이병철 회장에게 조사내용을 보고하지는 않았지만, 이건희 회장으로서는 아주 기분 나빴을 것”이라고 귀띔한다. 이건희 회장은 취임 뒤 3년간 회사에 나오지 않고, 소 실장에게 사실상 경영을 맡겼다. 이 회장은 그 기간 중에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라 형제들과의 상속 문제를 정리하고, 소 실장 제거를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다. 삼성의 전직 고위임원은 “소 실장을 경질해도 반발할 수 없도록 개인 비리나 약점을 조사하고 증거를 확보했다”며 “소 실장을 경질하던 당일 삼성 비서실 직원들을 소 실장의 자택으로 보내,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서류와 자료들을 모두 걷어갔다”고 회상했다. 소 실장이 회사 기밀서류를 무기로 이 회장과 맞설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재무통인 이학수 부회장은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에 앞서 삼성의 구조조정을 성공리에 마쳐, 삼성이 위기 이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또 이건희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세금을 내지 않고 경영권을 승계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삼성의 한 전직 사장은 “이 부회장은 이 회장의 의중을 잘 읽고 충성심도 강해, 이 회장의 ‘복심’이라고 불릴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건희 회장은 소 실장을 교체한 이후 비서실장의 임기는 3년을 넘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언급했지만, 정작 이학수 부회장에게는 그룹의 2인자 자리를 14년간이나 맡겼다.

이 부회장은 2010년 11월 중순 갑자기 이건희 회장에 의해 자리를 잃는다. 이건희 회장의 급작스런 변심에 대해 삼성 안팎에서는 비자금 사건으로 경영에서 물러났던 2008년 초부터 2010년 초까지 2년간을 주목하는 이들이 많다. 삼성의 한 전직 사장은 “이 회장은 대중들 앞에 나설 수도 없어 큰 상실감을 겪은 반면 이학수 부회장(당시 직함은 고문)의 힘은 더 세져서, 심지어 이 부회장이 ‘삼성의 주인’이라는 얘기가 들릴 정도였다”며 “그런 얘기를 자꾸 듣다 보면 의심이 생길 수도 있고, 이 회장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챈 주변에서 이 부회장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자꾸 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이 지난해 삼성 내부의 비리와 부정 척결을 강조한 것이 이 부회장을 겨냥한 것이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삼성에서는 지난 1년 반 동안 이학수 체제를 지탱하던 최고경영자급 인사들이 줄줄이 물러났다. 삼성전자의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지낸 최아무개 부회장, 삼성미소금융재단 강아무개 사장, 삼성생명 김아무개 사장, 삼성화재 지아무개 사장, 삼성의료원 이아무개 원장, 삼성에버랜드 최아무개 사장, 그룹 구조조정본부 출신 최아무개 부사장 등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이들 중 일부는 삼성 고위임원들이 퇴직 이후 2~3년간 급여와 사무실, 차량을 제공받는 전관예우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조시대에 비유하자면 신묘사화(2011년은 신묘년이다)로 부를 만하다.

25년간 보좌한 박명경 상무의 경질

이건희 회장의 불신과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는 자신의 비서인 박명경 상무를 경질한 데서도 알 수 있다. 박 상무는 여성으로서 1980년대 중반부터 25년간 이 회장을 보좌하며 ‘실세’로 불렸던 특이한 인물이다. 삼성 최고경영자들의 자택이 몰려 있는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에 펜트하우스 두채를 소유하고 있을 정도다. 박 상무는 이학수 전 고문과 비슷한 시기인 2010년 말께 경질됐다. 삼성의 한 전직 사장은 “엠케이(MK·박명경 상무)가 이 회장의 동향을 비서실에 보고했는데, 이 회장이 이 사실을 알고 크게 화를 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박 상무의 후임 비서로는 40대 초반의 간호사 출신이 온 것으로 알려진다.

소병해 실장의 후임은 이수완 실장이다. 그는 불과 두달 만에 경질돼 최단 임기의 비서실장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삼성의 한 전직 임원은 “재임중 특별한 일은 없었고, 그냥 회장과 코드가 안 맞았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수완 실장의 후임인 이수빈 실장은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에 반발하는 것으로 비쳐지면서 3년 만에 물러난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200여명의 고위임원을 불러 회의를 소집해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며 과거 양 위주의 경영에서 탈피해 질을 중시하는 경영을 강조했다. 삼성의 한 전직 사장은 “당시 이수빈 실장이 ‘경영에서 질도 중요하지만 양적 성장도 어느 정도 이뤄져야 한다’고 말해 이건희 회장이 격노한 대목을 나중에 녹음으로 들었는데, 이 회장이 찻잔 스푼을 내려놓는 소리가 마치 찻잔을 내던져 박살이 나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고 전했다. 이건희 회장은 고교 4년 선배인 이수빈 실장을 아주 버리지는 않았다. 이수빈 실장은 비록 실권은 없지만 삼성생명 회장직을 20년째 유지하고 있다.

이수빈 실장의 후임인 현명관 실장은 삼성 2인자들 중에서 예외적인 경우다. 감사원 부감사관 출신인 그는 삼성에서 호텔신라와 삼성종합건설 대표를 지내다가 1993년 실장으로 발탁됐다. 발탁 배경으로는 내부 개혁을 위한 외부 출신 기용설과, 이건희 회장의 숙원사업이었던 삼성의 자동차사업 관련설이 함께 제기된다. 삼성전자의 전직 고위임원은 “와이에스(YS)정권 초기 승용차사업 진출을 위해 이건희 회장이 김영삼 대통령을 직접 만나는 등 정관계 대상으로 광범위한 로비를 벌였는데, 서울고·서울법대를 졸업하고 행시 4회 출신인 현 실장의 폭넓은 인맥이 필요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삼성은 현 실장이 취임한 다음해인 1994년 말 자동차사업 허가를 받는다. 현 실장은 삼성의 부산 자동차공장 건설이 한창이던 1996년 그만뒀다. 현 실장은 2003년 삼성을 떠나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한나라당 제주도지사 후보를 지내고도 현재 삼성물산 상임고문으로 예우를 받고 있다.

김순택 부회장은 1990년 직속상관인 소병해 실장의 정리와, 20년 뒤 이학수 체제 정리라는 ‘해결사’ 역할을 두번이나 맡는 기이한 인연의 주인공이다. 삼성전자의 고위임원은 “김순택 실장은 소 실장 시절 비서팀장과 감사팀장을 맡으며 ‘오른팔’로 불렸고, 이학수 실장체제에서는 한직에 밀려 있다가 이 실장의 도움으로 계열사 사장으로 회생한 것으로 안다”며 “이건희 회장의 용병술이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순택 부회장의 경질 이유로는 건강상 부담, 씨제이(CJ)그룹과의 상속재산 갈등에 대한 대응 미흡, 글로벌 감각 부족 등 여러 요인이 거론되지만, 그는 처음부터 이학수 체제 정리용이었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친정체제 선언 뒤 ‘비서실’ 위상 약화될 듯

영욕이 극단적으로 교차하는 삼성 2인자들의 역사는 ‘총수지배체제’라는 한국 재벌의 특성과 이건희 회장의 은둔형 경영스타일이라는 삼성의 특성이 결합된 산물로 볼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은 외국 언론에서 ‘은둔의 황제’라고 부른 것처럼 1987년 취임 이후 2010년까지는 경영2선에 물러나 있으면서, 비서실과 계열사 전문경영인을 통해 그룹을 경영했다. 따라서 비서실의 책임자인 2인자의 힘이 막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김기원 방송통신대 교수는 “다른 재벌은 총수가 직접 경영하기 때문에 2인자가 큰 의미가 없다”며 “삼성 총수와 2인자 간의 갈등은 경영권을 둘러싼 일종의 권력투쟁적 성격을 갖는다”고 말한다.

또다른 요인으로는 재벌 세습경영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 한나라의 한신은 유방을 도와 중국을 천하통일하는 데 일등공신이 되어 초왕에 제수됐다. 하지만 결국 왕조 확립과 후손들에게 천하를 안전하게 물려주려는 유방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아무리 충성스럽고 유능한 2인자라도 젊은 차기 회장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일 수 있다. 이건희 회장으로서는 아들인 이재용 사장 체제를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물갈이 필요성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삼성은 매우 중요한 시점에 놓여 있다. 이건희 회장은 올해로 취임 25돌을 맞는다. 이건희 회장은 수년 전에 “사람이 60살이 넘으면 업무수행에 어려움이 있는 만큼 회사와 후진들을 위해서라도 물러나는 게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올해 이 회장의 나이는 만 70살로, 자신이 말한 경영 한계선보다 10년이나 지났다. 삼성 3세경영의 주역으로 꼽히는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도 올해로 44살이다. 내년이면 부친이 회장직에 오른 나이와 같아진다. 이건희 회장이 조기에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길 것으로 보는 이들은 많지 않다. 오히려 이건희 회장의 친정체제가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삼성의 한 고위임원은 “왕이 생전에 왕좌에서 물러나는 것을 봤느냐”며 “재벌 총수에게는 임기가 없다”고 말했다.

 이는 이건희 회장 형제들 간의 상속권 다툼과 맞물려 삼성 3세경영 체제의 불확실성을 더욱 키울 가능성이 높다. 이재용 사장의 가정교사로 불려온 최지성 실장의 기용은 경영권 승계를 무사히 연착륙시키기 위한 사전포석으로 해석된다. 최 실장은 탁월한 글로벌 감각과 뛰어난 추진력, 조직 장악력 등이 강점으로 꼽힌다. 그룹의 핵심인 삼성전자를 누구보다 잘 안다는 것과 후계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과의 관계가 좋다는 것도 장점이다. 하지만 그는 이건희 회장의 친정체제가 더욱 강화되고, 그룹 사령탑인 미래전략실의 위상이 갈수록 약해지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환경을 맞고 있다.

 그동안 삼성의 성공 비결로는 회장-비서실-전문경영인이라는 ‘3각편대 경영’이 꼽혀왔다. 하지만 2010년 이건희 회장이 친정체제를 선언한 이후 비서실(현 미래전략실)의 위상은 크게 약화됐다. 삼성전자의 한 고위임원은 “비서실이 과거처럼 그룹의 사령탑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회장의 눈치만 보고, 계열사 사장들도 마찬가지”라며 “지난해 이후 삼성에서 고위임원에 대한 수시인사 관행이 생긴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최 실장이 이재용 체제로의 단순한 가교 역할을 넘어 그룹의 2인자로서 삼성을 명실상부한 글로벌 정상 기업으로 견인하며 장수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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