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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6.29 20:56 수정 : 2012.07.01 16:12

2009년 3월11일 부산 벡스코에서 일본인 납북자 다구치 야에코의 가족과 면담을 한 뒤 기자회견을 하는 김현희.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뉴스분석 왜?
돌아온 칼기 폭파 주인공
김현희-국정원 교감 속에 ‘1987년의 괴기’ 재현하나

역사의 상흔을 몸으로 기록한 당사자로 산다는 건 불행입니다. 그날들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는 김현희씨가 보수언론을 통해 기억을 재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쓰러웠습니다. 그런데 김씨의 분노가 뜬금없는 이유는 뭘까요. 김씨가 티브이에 처음 등장했던 1987년이나 올해 모두 대통령선거가 있는 건 우연일까요?

1987년 겨울은 따뜻할 것만 같았다. 민주주의를 위한 열망으로 가득했던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맞은 겨울이었다. 가까이로는 12월16일에 있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기대감에 차 있었고, 길게는 한 해 뒤에 열릴 서울올림픽 준비로 분주했다. 그러던 중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11월29일 오후 2시5분께 대한항공(KAL) 소속 858편 보잉 707기가 버마 안다만 해상에서 공중폭파해 추락하는 대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비행기에 탔던 20명의 승무원과 한국인 93명, 외국인 2명(인도, 아랍에미리트연합) 등 총 115명이 실종됐다. 그해 겨울 온 나라가 안보불안감에 꽁꽁 얼어붙었다.

‘가짜설’은 어떻게 일파만파 퍼졌나

그날은 공교롭게도 대통령 선거가 있기 하루 전인 12월15일이었다. 입에 하얀 테이프를 붙인 채 수사관들에게 양팔을 붙들려 비행기에서 내리던 26살 미모의 여성을 방송과 신문이 앞다퉈 보도했다. 그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일본인 하치야 마유미. 하치야 신이치라는 이름의 70대 남자와 함께 중간경유지인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렸던 탑승객이었다. 두 사람은 안기부의 추적으로 바레인 공항에서 붙잡혔다. 남자는 담배필터 속에 숨겨둔 독약 앰풀을 깨물어 즉사했지만 여자는 치사량을 삼키기 전 담배를 빼앗겨 살아서 국내로 압송됐다. 후에 용의자 압송이 선거 하루 전 극적으로 이뤄진 이유는 바레인 당국으로부터 신병인도가 늦어지면서 일어난 ‘우연’이지 일부러 전날로 맞춘 것은 아니라고 조사됐지만, 대선 전야 모든 이슈를 잠재운 건 분명했다. 거센 ‘북풍’의 결과로 여당이었던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했다. 그해 대선은 16년 만에 실시된 직접선거였고 투표율은 89.2%였다.

중국어와 일본어를 사용하던 마유미는 한국에 신병이 인도된 지 8일 만인 12월23일, 자신이 북한 공작원 김현희이며 ‘88올림픽 참가 신청 방해를 위해 대한항공 여객기를 폭파하라’는 김정일의 친필명령을 받고 저지른 테러라고 실토했다.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부녀 행세를 한 남자가 북한 공작원 김승일이라는 것도 밝혔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1988년 1월15일 이 사건을 북한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의 소행으로 보고, 이들이 여행자 휴대용품으로 위장한 라디오 시한폭탄(C4 350g)과 술로 가장한 액체폭발물(PLX 700cc)을 9시간 뒤에 폭파하도록 조작한 다음 비행기 선반 위에 두고 내렸다는 수사 내용을 발표했다.

분단·대치 상황에서 발생한 최악의 테러는 높은 관심만큼이나 많은 의혹이 처음부터 따라붙었다. 비행기 동체를 발견하지 못한 채 김현희의 자백에만 의존한 초동수사는 성급했고 허점이 많았다. 추정기사가 쏟아지고 오보가 속출했다. 예상대로 안기부의 수사발표 당일 북한은 김씨는 북한 사람이 아니며 폭파한 적 없다고 부인하고 나섰다. 그러자 일본 언론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에서 남한 군부정권의 자작극이라는 주장이 새나왔다. 사건 발생 3년이 지난 1990년 3월에야 잔해를 발견했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식 결과 폭발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고, 1995년에 폐기처분해버린 것도 의혹을 키웠다. 실종자 가족회는 △블랙박스나 유해 등 비행기 잔해가 발견되지 않은 점 △정부조사단 조기 철수 및 대통령 선거 하루 전 범인 압송 △김현희 증언에만 의존한 초동수사의 부실함 △사형선고 보름 만에 사면 후 안기부 반공교육강사로 활용되는 점 등을 이유로 사건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뭉게뭉게 피어난 의혹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생각해보면 당시는 군사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학습한 국가권력에 대한 불신을 마음속에 품고 살던 시기였다. 일본인 노다 미네오의 (2003), 진실위에서 사건의 담당 조사관이기도 했던 신동진의 (2004)라는 책과 경남대 북한대학원 박강성주의 논문집 (2007)가 나오는 등 일각에서는 이 사건의 실체가 여전히 모호하다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2003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의혹제기 기자회견 이후 문화방송 ‘피디수첩’(2003년 11월)과 에스비에스 ‘그것이 알고 싶다’(2003년 11월), 한국방송 ‘KBS 스페셜’(2004년 5월) 등 방송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방영되면서 의혹이 추가되고 확산됐다. 보수언론에서 지적하듯 ‘김현희 가짜설’이 좌파정부 출범 이후 등장했다기보다 이전에 있던 의혹들이 과거사 진실규명을 중시한 김대중·노무현 정부 들어 확산돼 재조명을 받기 시작한 셈이다.

김대중 정부 직전에 ‘잠수’
진실위 재조사 끝내 불응하더니
이명박 정부 들어서자마자
일본 방문 등 활발한 활동
급기야 종편에까지 출연해…

“북한의 극좌세력에 의해
115명 죽인 테러리스트가 됐고
남한 극우세력에 의해서
또다시 활용되는 불쌍한 사람”

“가족들한테 사과? 집행부 몇명한테만?”

의혹이 확산된 시점이나 의혹에 대한 진실 규명 시도가 시작된 시점은 모두 참여정부 들어서였다. 2005년 2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조작됐을 것으로 보이는 7대 우선조사 대상 사건의 하나로 칼(KAL)기 폭파사건을 채택했다. 국정원으로서도 안기부 시절 따라다닌 오명을 지우기 위해 민간측 조사를 수용한 측면이 컸다. 2007년 진실위에서 최종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그때까지 제기된 의혹만 350개였을 정도로 칼기 폭파사건에 대한 조작 의혹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진실위는 유사한 의혹과 무의미한 의혹 등을 추려 최종적으로 148건을 7개 분야로 분류했다. △안기부 및 제3국의 사전 인지 또는 공작 여부 △김현희·김승일의 북한 출신 여부 및 행적 관련 의혹 △김현희·김승일의 폭파범행 여부와 폭탄의 종류와 양 △잔해 수색 문제 △사건의 정치적 이용 여부 △재판 과정과 사면 이후 관리의 적절성 여부 등이었다. 진실위는 약 3년 동안 국정원 보유자료 13만쪽을 검토하고 국정원 등 관계기관의 전·현직 직원과 유족 및 사고조사 폭탄전문가·외국인 등 93명에 대해 면담을 진행하며 답을 찾아가기 위한 노력을 했다.

진실위의 결론은 칼기 폭파사건이 북한 공작원에 의해 벌어진 사건이라던 1987년 당시 안기부 수사 결과가 맞다는 것이었다. 국정원이 사건의 실체를 왜곡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 건 김대중 납치 사건,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실종 사건, 동백림 사건, 인혁당·민청학련 사건, 정수장학회 사건, 중부지역당 사건 등 7대 우선조사 대상 사건 중 칼기 사건이 유일했다. 또한 조사 결과 당시 대선정국에서 안기부가 이 사건을 여당이던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게 유리하게 조성하기 위해 12월16일 대선 이전 수사 중간결과를 발표하고 국내외 및 대북홍보계획을 수립하는 등 일명 ‘무지개 공작’대로 칼기 폭파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부터 김씨의 구제 활용방안을 검토하는 등 사건이 종결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정권 차원에서 김씨의 사면을 추진한 것도 진실위 조사로 분명히 했다.

진실위의 활동에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다. 추락한 지 20년이 다 지난 칼858기의 동체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쳐도, 김현희가 진실위 조사에 협조하지 않아 반쪽짜리 수사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당시 최종보고서 검토작업에 참여한 한 조사관은 “초반에는 진실위의 활동을 두고 국정원 내부에서 선배들 물먹인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많았다. 자연히 국정원을 통한 김씨와의 접촉이 쉽지 않았고 김씨 역시 끝까지 조사에 나서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진실위 민간측 간사였던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도 “국정원 내규에 따른 조사기구였던 만큼 조사를 강제할 권한이 없었다. 김씨의 증언이 있으면 조사의 설득력을 더 갖출 수 있기 때문에 오충일 위원장 명의의 편지까지 보냈다”고 돌아봤다.

한편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지 보름 만인 1990년 4월12일 사면된 김씨는 이후 안기부에서 반공교육강사로 활동했다. 전국을 다니며 안보강연을 하고 신앙간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1991년), <사랑을 느낄 때면 눈물을 흘립니다>(1992년)라는 두 권의 에세이집을 내는 등 활발한 외부활동을 해오던 김씨가 잠적한 것은 1997년 12월. 자신을 경호하던 안기부 직원과 결혼을 하면서부터였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설 무렵이었다. 김씨는 이후 참여정부 시절까지 약 10년의 시간을 숨어 지냈다.

개명까지 했던 김씨가 다시 등장한 것은 이명박 정부 출범 뒤인 2008년 10월. 참여정부 들어 방송사의 취재와 재조사 요구가 계속돼 피난생활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에게 보내면서부터다. 이후 김씨는 2009년 3월 북한에서 일본어를 배웠다는 일본인 납북자 다구치 야에코(리은혜)씨의 가족을 만나는 자리에 나가고, 2010년에는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7월20일부터 나흘 동안 일본을 방문해 일본인 납북자 가족을 만나는 등 공식활동을 이어갔다. 이를 보고 차옥정 실종자가족회 회장은 “115명을 죽였다는 김현희가 실형 한번 살지 않고 환대를 받는 모습에 화가 났다”며 “김씨는 가족들에게 사과했다는데 당시 집행부 몇 명만 만난 걸로 안다. 다른 가족들은 김씨로부터 사과받은 기억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2012년 대선 앞두고 어떤 의도 있는 듯

사랑하는 가족들의 주검은커녕 유품조차 찾지 못한 가족들은 사건에 대한 의혹을 계속 제기했다. 국정원 진실위의 3년여에 걸친 재조사에도 불구하고 의혹이 다 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 데에는 김씨가 진범이더라도 물증 없이는 믿고 싶지 않은 유가족의 마음이 있었다. 실종자 가족들에게는 보험금명목으로 7900만원씩 주고 모른 척한 반면 김씨를 비호한 국가에 대한 원망이 더해졌다. 가족들은 2007년 다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칼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신청해보지만, 2009년 6월 조사중이던 사건을 직접 취하했다. 진실화해위는 진실위와 달리 법에 따라 강제조사권을 가진 기구였기 때문에 김현희를 강제구인할 수 있었지만 그 전에 가족들이 신청을 취하하면서 이전 진실위 서류를 검토하는 정도에서 마쳤다. 진실위에서와 마찬가지로 김씨의 증언은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 비춰 볼 때 김씨가 지난 17~18일 양일간 <티브이(TV)조선> 프로그램 ‘최, 박의 시사토크 판’에 출연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을 두고 김씨의 피해의식을 이용해 조선일보가 자사 종편을 띄우고 종북몰이, 안보장사를 한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김씨는 프로그램에서 참여정부에서의 재조사를 두고 “국정원이 좌파정부의 하수인 역할을 한 거다. 개싸움을 시킨 거다. 안기부가 수사하고 발표한 걸 (믿지 않고 이제 와) 당시 수사한 부서의 사람을 거꾸로 가짜라고 만들도록 시킨다”라고 비판했다. 이미 사법부가 3심 한 것을 국정원 진실위가 4심을 하고, 진실화해위가 5심을 하는 행위는 인민재판이나 다름없다며 힘들어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2009년 3월 12년 만에 공식석상에 나서기 한달 전, 조갑제닷컴의 대표 조갑제씨와의 인터뷰에서 “이제 정권도 바뀌었으니, 안보를 책임진 중추기관이 망국행위를 한 것은 그냥 지나갈 수 없지 않습니까? (국정원이) 사과하고 관련자를 처벌해야지, 그래야 대한민국이 제대로 선다고 생각합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진짜가 가짜가 되고 가짜가 진짜로 바뀌니 이젠 제대로 세워야죠”라며 날을 세우던 모습과 같았다. 의혹을 제기한 사람들을 가리켜 무조건 ‘종북’이라고 낙인찍는 김씨와 조선일보의 논리가 천안함 사건을 두고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대응하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가족회와 함께해 온 김덕진 천주교 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은 “김씨가 진짜로 실종자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언론에 나와서 인권탄압을 받은 사람처럼 자신의 피해만 주장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김씨의 이런 행보를 두고 대선 승리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김씨를 활용했던 ‘1987년의 재현’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국정원 진실위에서 조사관으로 근무했던 관계자는 “과거 경험에 비춰 볼 때 김씨의 대외활동은 국정원과의 사전 교감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며 “이번 티브이 출연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내다봤다. 안병욱 전 진실화해위 위원장 역시 “김씨를 사면한 이유는 역사의 증언자로 남아 달라는 건데 조사에는 응하지 않다가 종편채널에 나타나는 것 자체가 의혹”이라며 “북한의 극좌세력에 의해 115명을 죽인 테러리스트가 됐고 남한의 극우세력에 의해서 또다시 활용되는 김씨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김씨의 ‘똑같은’ 자기 고백에는 ‘익숙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는 말이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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