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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9.14 20:57 수정 : 2012.09.25 17:00

[토요판] 뉴스분석 왜?
페루의 박근혜, 게이코 후지모리

▶ ‘박정희의 딸.’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을 따라다니는 꼬리표입니다. 남미 페루에는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딸’ 게이코가 있지요. 두 사람은 ‘독재자’ 또는 ‘경제를 살린 지도자’란 상반된 평가를 받는 아버지로 인해 늘 역사 논쟁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싫다’고 부모를 바꿀 수는 없는 법, 딸에게 아버지의 죄를 짊어지라면 부당하겠죠. 하지만 아버지의 ‘오명’을 어떻게 씻을 것인지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5년이, 더한 미래가 그 답 안에 있을 테니까요.

1992년 친위쿠데타로 의회와
대법원·사법부까지 해체하고
3선개헌에 납치·살인 자행한
페루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
당시 퍼스트레이디로 활약한
첫째 딸 게이코의 말 바꾸기

상황 불리할 땐 “과거 사과”
제1야당 대표로 차기 대선 노리며
다시 독재자의 딸로 돌아가
아버지의 인도적 사면 압박

“20년 전 9월12일은 살인·학살을 자행했던 ‘빛나는 길’의 지도자 아비마엘 구스만이 체포된 날입니다. … 구스만의 체포로 범죄·테러 단체인 빛나는 길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죠. … 위대한 전투 승리는 단 하나의 작전이 아니라 위대한 전략들의 결과로 얻어집니다. (구스만 체포에는) 총체적인 전략이 있었고, 다방면에서 테러와 싸워온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이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알레한드로 톨레도 대통령 정부는 정치적 옹졸함 때문에 이런 전략들을 포기하고 테러리스트들을 석방시키는 특혜를 줬습니다. (그 결과) 빛나는 길은 오늘날 ‘사면 및 기본권을 위한 모임’(MOVADEF) 등의 이름으로 세력화해, 페루 정부가 테러를 저지른 이들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거는 되풀이돼선 안 됩니다. 빛나는 길의 위협을 (다시금) 느끼는 지금, 페루의 주적인 테러 앞에서 우리 페루인들은 차이를 넘어 힘을 합쳐야 할 것입니다.”

알베르토 후지모리(오른쪽) 전 페루 대통령이 2000년 조기 사임 발표 이후 딸 게이코와 함께 대통령궁 앞에 나와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페루의 과거사

페루 의회의 제1야당인 ‘푸에르사 2011’(130석 의회에서 6개 정당 중 37석 차지)의 대표인 게이코 후지모리(37·이하 게이코). 2011년 대선 결선투표에서 오얀타 우말라 후보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줬던 그가 지난 12일 자신의 페이스북(KeikoSofiaFujimoriHiguchi)에 이 글을 올렸다. 알베르토 후지모리(74·이하 후지모리)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1990~2000년), 반정부적 공산 게릴라 조직 ‘빛나는 길’을 소탕해 페루의 고질적인 치안 문제를 해소했음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게이코는 후지모리의 네 자녀 중 큰딸이다. 그의 페이스북엔 아버지와 함께한 사진 등 정겨운 ‘기억’으로 가득하다. 어린 시절, 남동생 히로의 생일날 아버지와 형제들이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서 어린 게이코는 행복하게 웃고 있다. 페루의 독립기념일(7월28일), 아버지의 생일이기도 한 이날엔 아버지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띄우기도 했다. 아버지가 5번째 설암 수술을 받자 병원 앞에 모여 쾌유를 빌어줬던 아버지의 지지자들에 감사를 표하는 글도 있다. “제 아버지의 건강 악화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지속적인 애정을 보여주신 데 대해 가족을 대표해 감사드립니다.”(9월4일) 게이코가 페이스북을 통해 기록하는 아버지는 ‘가정적인 아버지’이며 여전히 추앙받는 ‘페루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이다. 하지만 그의 자랑스러운 아버지는 페루 현대사에서 ‘독재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한때 자신이 만든 정당(Cambio 90)의 이름처럼 페루 ‘변화’(Cambio)의 상징이었다. 12%도 안 되는 백인이 정치·경제를 독점했고 우파와 좌파 모두 신뢰를 잃은 상황 속에 치러진 1990년 대선에서 “당신과 같은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는 일본계 2세 후지모리에게 페루인들은 열광했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20%대로 잡아 마이너스이던 경제성장률을 최대 12.9%(1994년)까지 끌어올렸고, 빛나는 길이나 투팍아마루혁명운동(MRTA) 등 반정부 무장게릴라 소탕에 성공했다. 하지만 무리수를 두기 시작하면서 그는 독재의 길로 내달았다. 후지모리는 1992년 친위 쿠데타로 헌법 기능을 정지하고 의회를 해산했다. “정당에 의한 민주주의는 끝났다”며 이른바 ‘신독재’를 선언한 것이다. 대법원과 사법부도 예외 없이 해체됐다. 게릴라 소탕이라는 명분 아래 만든 비밀 암살조직 ‘콜리나’를 만들어 납치와 살인 교사 등 무차별적인 인권 탄압을 자행했고, 공금 유용 등 부정 축재도 서슴지 않았다. 재선에 성공하는 데 만족하지 못한 그는 1996년엔 헌법을 개정해 3선 연임의 길을 열어뒀다. 아내 수사나 히구치(62)마저 그를 “독재자”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등을 돌렸다. 2000년, 그의 뜻대로 3선에 성공했지만,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위헌 시비 속 반정부 시위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그의 ‘오른팔’이었던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 전 국가정보국(SIN) 국장이 야당 의원을 매수하려고 뇌물을 주는 비디오가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는 그가 선택한 것은 ‘도주’였다. 그해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아펙) 정상회의 참석차 브루나이로 출국했던 후지모리는 부모님의 나라 일본으로 도망쳤다. 며칠 뒤 그의 대통령 사임장이 팩스로 도착했다. 일본으로, 칠레로 떠돌던 ‘도망자’ 후지모리는 2007년 페루로 송환됐고 2009년 25년형을 받아 복역중이다. 1979년, 대통령 암살로 끝난 ‘한국적 민주주의’와 닮은 후지모리의 ‘신독재’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리는 듯했다.

사형제 등 아버지의 정책 잇기에 충실

‘살아 있는 과거’의 그림자는 ‘현재’까지 드리워진다. 그의 딸 게이코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페루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의 나이 서른한살 때의 일이다. 부모님의 이혼 뒤, 19살부터 7년간 퍼스트레이디를 했던 게 정치 경험의 전부인 그는 2006년 전국 최다 득표로 화려하게 의회에 입성했고, 5년 뒤엔 대선에 출마해 결선투표까지 진출했다. 선거 때마다 전면에 아버지를 내세운 그는 그저 ‘또다른 후지모리’였을 뿐이었다. 의원 시절이던 2006~2011년에도 그는 독자적인 여성 정치인이었다기보단 그저 ‘후지모리의 딸’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판사들이 상습범들에게 최고형을 주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을 제출하는가 하면, 친 후지모리 의원들과 함께 흉악범죄 대부분에 사형을 구형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만들려고 했던 게 대표적이다. 그는 1990년대 아버지가 추진했던 정책들을 이어가는 데 전력을 다했다.

게이코에게 대선 도전은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한 대장정이기도 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아버지를 사면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얘기했다. 그의 대선 캠프는 아버지의 측근들로 가득했다. 캠프를 진두지휘한 하이메 요시야마는 아버지의 친위 쿠데타 이후 헌법을 썼던 장본인이며, 보건장관을 지냈던 알레한드로 아기나가도 선거 참모로 활동했다. “(후지모리의 3선 개헌은) 우리가 테러와 초인플레이션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특별하고 예외적인 상황”이었다며 아버지의 유산을 적극 끌어안는 행보를 보이는 게 이상할 게 없었다. 게이코의 이런 퇴행적 행보가 먹혀들어 갔던 건 “경제성장이 높아지는 만큼 불만도 높아지는 페루의 역설”(마이클 시프터 인터아메리칸다이알로그 회장의 말) 상황에서 중도 후보들이 분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1년 4월, 대선 1차 투표에선 3~5위 중도 후보들이 절반에 가까운 42%를 득표해 과반을 얻은 후보가 나오지 않았다. 결선투표에서 맞붙게 된 1·2위 후보 우말라와 게이코는 여론조사에서 오차범위 내 지지율 격차를 보이며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했다. ‘중도 및 부동표를 누가 잡느냐’에 승리가 달려 있었다. 그때 게이코가 꺼내든 비장의 카드는 ‘과거사 반성’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재임 시절 일어났던 잘못을 인정하고 페루 국민들에게 사죄한다”고 했다. “대통령에 당선돼도 아버지를 사면하지 않겠다”고도 약속했다. “나는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아니다.” 거듭된 아버지와의 거리 두기에 나섰다. 언론 환경은 그에게 우호적이었다. 36년 만에 좌파 집권을 우려한 대다수 우파 매체들까지 게이코 편향 보도를 쏟아냈다.

2011년 페루 민심은 그의 사과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우파 지식인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등은 게이코가 당선되면 분명 후지모리를 사면할 것이고, 이는 “페루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바르가스 요사와 마찬가지로 민심은 우말라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돌아섰다. 한치 앞도 예측하기 힘들었던 그해 6월 대선 결선투표. 우말라는 고작 3%포인트(51.5%-48.5%)의 격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바르가스 요사의 말대로 “독재로 회귀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한 선거였다.

우말라 대통령 위기 속에 ‘과거 재소환’

‘과거의 재림’을 막은 페루 대선이 끝난 지도 1년여가 지났다. 급진좌파 차베스가 아닌 중도실용좌파 룰라식 개혁을 표방했던 대로 우말라 대통령은 전임 정부의 경제 정책을 계승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다시금 사회적 불안이 고개를 들며 정세 불안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페루 북부 카하마르카에선 우말라 정부가 추진하는 ‘콩가 프로젝트’(중남미 최대 규모 금광 개발)를 둘러싸고 수질 등 환경오염에 반대하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져 시위대 일부가 사망한 게 대표적이다. 또한 구스만 체포 이후 힘을 잃어가던 ‘빛나는 길’이 다시금 세를 얻어가고 있다는 징후도 포착되고 있다.

게이코는 이런 상황 속에서 ‘살아 있는 과거’를 재소환하는 데 집중하는 모양새다. 그는 대선 이후인 지난해 연말부터 우말라 정부를 향해 후지모리에 대한 “인도적 사면”을 압박하고 있다. 후지모리의 사면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47%(2011년 11월)에서 49%(12월)로 오른 데 이어 53%까지 올라갔다는 <페루21>의 여론조사 결과를 페이스북 등에 언급(1월13일)하면서 여론전도 펴고 있다. 후지모리가 5번째 설암 수술을 받았던 지난달에는 “아버지는 위독한 암 환자인데도 정부는 인도적 사면을 발표할 의향이 전혀 없다”며 우말라 정부의 “잔인함”을 비난했다고 <코메르시오>가 전했다.

나아가 아버지가 “결백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난 7월13일 페이스북에 “알베르토 후지모리에겐 (숨겨놓은) 자산도, 계좌도 없다. 병약한 그는 부당하게 투옥돼 있다”는 글을 올리며 “결코 침묵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바리오스 알토스 민간인 학살 사건 등 일부는 반인도적 범죄로 볼 수 없다며 몬테시노스 전 국장 등의 형량을 낮춰준 최근 법원의 판결을 환영하며, 같은 혐의에 대해 아버지의 재심을 청구하겠다는 뜻도 내비친다.

지난 대선 국면, 사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제1야당의 대표로 차기 대선을 노리는 게이코의 이런 ‘효심’ 어린 행보는 후지모리 시절을 그리워하는 지지층을 끌어안고 가겠다는 정치적 행위기도 하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짖는 게이코에게 앞으로 페루 민심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먼 나라 페루의 상황은 그저 남의 얘기 같지가 않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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