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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9.21 21:23 수정 : 2012.09.25 16:30

[토요판/뉴스분석 왜?] 아사드 정권이 안 무너지는 이유

▶ 한국의 평범한 시민이 시리아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축구를 통해서뿐이다. 가장 최근에 열린 경기는 지난 6월8일 경기도 화성에서 열린 올림픽대표 평가전이었다. 오랜 내전에 빠진 조국을 떠나 한국을 찾은 시리아 선수들은 1-3의 뼈아픈 패배를 맛봤다. 문득 경기에서 한 골을 넣은 샬렘의 고향이 어디인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곧 붕괴할 것이란 모두의 예상과 달리 아사드 정권은 왜 지금껏 건재한 것일까.

러·중은 시리아 제재안 거부
이란도 무기 원조로 측면지원
해외-국내파로 쪼개진 반군은
정부 제압할 군사력 없어

정권과 반군이 서로를 완전히
제압 못하는 ‘무승부’ 상태

누가 정의이고 불의인지
구별하기 힘든 혼돈의 싸움
아랍 4자회담 시작했지만
똑부러진 결론 나오기 힘들듯

시리아 국영통신 <사나>(SANA)가 송신한 사진 속의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은 감색 양복 상의에 하늘색 셔츠를 차려입은 반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1년 7개월에 이르는 오랜 내전에 지친 듯 얼굴 표정은 어두워 보였고, 눈언저리도 움푹 패어 퀭한 느낌이었다.

아사드는 라마단이 끝난 뒤 사흘 동안 이어지는 이슬람의 명절인 ‘이드 알피트르’의 마지막날(8월19일)을 맞아 수도 다마스쿠스 무하지린 지구의 리합 알하마드 모스크를 찾았다. 그가 공개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 7월18일 다우드 라지하 국방장관, 매형이면서 시리아 정보기관을 총괄해 온 아시프 샤우카트 국방차관, 하산 투르크마니 전 국방장관 등을 폭탄테러로 잃은 뒤 한달 만에 이뤄진 것이었다. 이슬람 최대 명절을 맞아 자신의 건재를 대내외에 과시하고, 심기일전해 반군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싶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 아사드의 행보는 그가 현재 직면한 난감한 상황을 정직하게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미국 <뉴욕 타임스>는 이날 “아사드는 평소 다마스쿠스에서 가장 크고 유서 깊은 우마이야 모스크에서 기도를 드렸지만 이번만은 대통령궁에서 가장 가까운 작고 안전한 장소를 택했다”고 전했다. 아사드가 방문한 모스크 주변으로 삼엄한 경비 병력이 배치돼 차량을 통제했고, 국외 탈출설이 떠돌던 파루크 샤라 부통령 등 일부 실세들은 모습을 감춘 채였다. 아사드는 건재하긴 했지만 자신감을 크게 잃은 듯 보였고, 그의 ‘조국’ 시리아는 장기화되는 내전으로 이미 2만명이 넘는 막대한 희생자를 내고 있는 중이다.

모순 첨예하게 맞물린 ‘중동의 활성단층’

그럼에도 흥미로운 사실은 많은 이들의 예측과 달리 아사드 정권이 여전히 붕괴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2010년 12월 ‘아랍의 봄’이 시작된 뒤 23년 동안 튀니지를 철권통치했던 벤알리 대통령은 시위 시작 한달 만에, 30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던 ‘철옹성’ 무바라크 정권도 3주를 버티지 못하고 권력을 내놔야 했다. 40여년이나 리비아를 통치했던 ‘악명 높은’ 카다피가 6개월쯤 버티다 결국 반군의 손에 처참한 죽음을 맞았음을 생각한다면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시리아 사태가 1년 반으로 접어들던 지난 7월 드디어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온 듯 보였다. 7월17일 터키와 서구의 지원을 받는 자유시리아군(FSA)이 ‘다마스쿠스 해방 작전’의 개시를 선언하며 수도로 진격했고, 바로 다음날 정권의 심장부인 다마스쿠스 국가안보국 건물에서 정권 수뇌부를 겨냥한 폭탄테러가 터졌다. 그러나 헬기·전투기·탱크 등을 동원한 정부군의 맹공으로 아사드는 다마스쿠스 중심부에서 반군의 도전을 걷어내는 데 성공했고, 시리아 제1의 도시인 북부 상업도시 알레포를 둘러싸고 격전을 이어가고 있다. 20일 현재 외신을 보면, 반군이 다마스쿠스의 남부 외곽에서 다시 결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는 정권은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

왜 그럴까. 해답을 내놓은 것은 아사드 자신이었다. 지난해 12월7일 보도된 미국 <에이비시>(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시리아를 “중동의 활성단층”이라 표현했다. 다양한 민족, 종교, 종파로 구성돼 바람 잘 날 없는 중동에서도 시리아는 그 모든 모순이 첨예하게 맞물린 위험지대라는 것이다. 주변 각국의 이해가 워낙 첨예하게 얽힌 곳이다 보니, 어느 한쪽으로 쉽사리 결론이 나기 힘든 구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지도를 펴들고 시리아의 위치를 보자. 시리아는 북쪽으로는 터키, 서쪽으로는 레바논, 동쪽으로는 이라크, 남쪽으로는 골란고원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과 맞서고 있다.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는 5천여년의 역사를 지닌 인류 문명의 발상지로 아랍 세계의 중심 가운데 하나라는 데 이견을 제기하는 이는 없다.

이스라엘 건국으로부터 1970년대까지 네 번에 걸친 중동전쟁은 모두 이스라엘과 직접 살을 맞댄 이집트와 시리아 전선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한때 이스라엘과 맹렬히 맞서던 이집트(1979년)와 요르단(1993년)이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고 전선을 이탈한 뒤에도 시리아는 ‘이스라엘 타도’라는 아랍의 대의명분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

다른 한편으로 시리아는 냉전기부터 소련-러시아가 중동으로 진출하는 외교적 교두보였고, 시아파 대국인 이란의 외교적 고립에 숨통을 틔우는 유일한 동맹국이기도 하다. 시리아가 무너진다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수니파 주류 국가가 눈엣가시로 여기는 이란-시리아-레바논의 헤즈볼라를 잇는 ‘시아파 라인’은 붕괴하게 된다. 그런 시리아를 40여년 동안 이끌어온 아사드 정권이 무너지도록 러시아와 이란이 수수방관할 리 없다. 러시아와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 등이 주축이 돼 제출한 지난 세 번의 시리아 제재 결의안을 거부했고, 반군에 엄청난 군사적 지원을 쏟아붓는 주변 아랍국들에 맞서 이란은 아사드 정권의 붕괴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미국 재무부는 19일 시리아로 무기를 나르고 있는 이란 항공기 117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지난 세 번에 걸친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안 부결로 시리아 문제를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해결할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시리아 정부와 반군들이 군사적인 대결로 승부를 짓는 일이다. 그러나 다양한 정치 성향과 이해관계에 따라 쪼개진 반정부 세력이 정부를 군사적으로 제압할 실력을 갖추진 못했고, 정부도 서구와 아랍 주변국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반군과 시아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 고전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인디펜던트>의 중동 전문기자 로버트 피스크는 현재 시리아의 정세를 정권과 반군이 서로를 완벽히 제압하지 못하는 ‘무승부’ 상태로 묘사하고 있다.

‘아사드의 하야’만 빼고 정치개혁 수용

이번엔 시리아 내부로 눈을 돌려보자.

1963년부터 시리아를 이끌어온 세력은 아랍 사회주의 부흥당(바트당)이다. 이 당의 근원은 프랑스 위임통치 시절인 1930년대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좌파 지식인들의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당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바트당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두 축은 ‘아랍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다.

이들의 급진적인 사상에 공명한 이들은 시리아 내에서도 여러 억압과 차별을 받던 소수민족과 소수종파의 젊은이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이들이 그때까지 이단으로 숱한 박해를 받아왔던 소수종파인 알라위파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낮은 사회적 지위 탓에 주로 군에 입대해 경력을 쌓다가 바트당에 가입했다. 그런 바트당이 1963년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자 현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의 부친인 하페즈에게도 출세의 길이 열렸다. 하페즈 아사드는 1965년 35살의 나이로 국방장관에 오르며 시리아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고, 5년 뒤인 1970년 11월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에 성공한다. 이후 바트당은 섬유 등 주요 산업에 대한 국유화 정책을 도입하는 등 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해 나간다. 2000년 6월10일 부친의 사망으로 대통령에 취임한 아사드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포기하고 다양한 경제 자유화 정책을 추진해 적잖은 성과를 거뒀다. 2007년부터 시리아 사태가 터지기 전인 2010년까지 시리아는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고 있음에도 해마다 4~5%의 성장을 이뤄냈다. 정권은 국민들에게 무상 교육과 의료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알라위파의 사회주의 정책은 그때까지 시리아 사회의 주류였던 수니파 대지주와 상인들을 불안에 빠지게 했다. 그 배후에는 1928년 결성된 수니파 근본주의 조직인 무슬림형제단이 있었다. 아사드 정권은 집권 뒤 무슬림형제단의 체제 전복 시도가 이어질 때마다 이를 철저히 분쇄했다. 1982년 2월 시리아 중부 도시 하마에서 대규모 반정부 봉기가 일어나자 아사드 정권은 전투기까지 동원해 수니파 주민 2만~4만명을 살육하며 이를 짓밟았다. 이와 관려해 지난해 6월20일 아사드 대통령은 “30년 전 무슬림형제단과의 대결은 시리아 역사의 어두운 부분이었다”며 “지금도 그 때문에 공무원이 되지 못하고 사회보장을 받지 못하고 여권도 받을 수 없다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안다”고 말했다. 시민 봉기가 시작되자 시리아 인구의 74%를 점하고 있는 수니파 다수를 포용하려는 화해 몸짓이었다.

아사드 정권은 지금도 시리아 반군의 상당수가 무슬림형제단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살라피주의자 등 다양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알카에다 등 테러 조직들이 국내에 침입해 체제 전복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지난 8월28일 왈리드 무알렘 외무장관은 영국 <인디펜던트>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처음엔 시민들이 법률 개혁과 개헌 등 정당한 요구를 했지만 이후 외부 세력이 개입했다”며 “지구상의 어떤 정부가 외국에서 들어온 무장 테러리스트 그룹을 용인하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 5월 어린이를 포함한 주민 108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훌라 학살’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진 친정부 민병대 ‘샤비하’의 존재는 부인했으며, 그동안 아사드 정권에서 이뤄진 고문 등 수많은 인권침해 사례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아사드 정권은 ‘아사드의 하야’를 제외한 민중들의 정치 개혁 요구를 상당 부분 받아들이기도 했다. 시리아는 시민 봉기가 시작된 지 한달 만에 영장 없는 체포를 가능케 한 악명 높은 비상사태법을 폐지했다. 또 지난 2월26일에는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바트당의 일당독재를 끝내는 헌법 개정 투표를 실시했다. 그에 따라 대통령의 임기가 ‘재선, 7년’(88조)으로 정해졌고, 다른 정당에 대한 바트당의 영도를 못박은 기존 헌법 8조도 폐지돼 실질적인 다당제가 도입됐다. 물론 영국 <가디언>은 아사드 대통령이 2028년까지 권좌에 머무를 수 있게 한 개헌 조처에 대해 “사기극”이라고 비판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을 뿐 아니라 여성은 자동차 운전도 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정권타도 위해 알카에다라도 끌어들이자?

그러나 반체제 세력들은 단일 대오를 형성하지 못하고 뿔뿔이 갈라져 있다. 현재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정통성 있는 단체는 해외 시리아 명망가들이 지난해 10월2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결성한 ‘시리아 국민평의회’다. 그 밖에 국내에서 아사드 정권의 탄압에 맞서 싸워온 활동가들이 지난해 9월18일에 결성한 ‘민주개혁을 위한 국민조정위원회’(NCO)가 있다. 이 가운데 시리아 국민평의회는 아사드 정권의 타도를 위해서라면 외세의 도입도 필요하다는 태도인 데 견줘, 좌파 풀뿌리 운동가들이 모인 국민조정위원회는 시리아 혁명은 오로지 민중들의 힘에 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중동 전문가인 아오야마 히로유키 도쿄외국어대학 교수는 10월치 <세카이>(세계) 기고문에서 “시리아 민중들은 아사드 정권의 가차 없는 탄압만큼이나 정권 전복을 위해서라면 알카에다라도 끌어들여야 한다는 반군 활동가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1년 7개월 동안 거듭된 비극으로 인해 ‘시리아 내전’은 민주화를 바라는 순진한 민중과 잔혹한 독재정권이라는 도식을 벗어나 누가 정의이고 불의인지 구별하기 힘든 혼돈 속으로 빨려든 상태다. 서구 언론들도 이제는 시리아에서 암약하는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의 움직임을 우려하는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최근 유튜브를 떠도는 여러 동영상에서 확인되듯, 내전은 이미 정부군과 반군이 서로에게 보복과 학살을 일삼는 ‘증오의 전쟁’으로 변하고 말았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19일 기자회견에서 “군사적인 수단은 시리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선언한 이유다.

왈리드 무알렘 외무장관은 앞선 <인디펜던트> 인터뷰에서 “시리아를 안전했던 2년 전으로 돌려놓고 싶다”고 말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시리아인들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폭력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로버르트 세리 유엔 중동평화 특별조정관은 18일 지난달 마지막 한 주 동안에만 1600명이 숨지는 등 시리아 사태가 시작된 뒤 지난 8월에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유엔이 집계한 난민의 수는 9월 현재 25만3000명에 이르고 있다.

보다 못한 아랍 주변 4개국인 이집트·이란·사우디아라비아·터키가 17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시리아 문제 해결을 위한 아랍 4자회담을 시작했지만, 미국의 민간 전략정보분석기업인 ‘스트랫포’는 19일 각국의 입장이 너무 달라 똑 부러진 결론이 나오기 힘들다고 예측했다. 해결의 실마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데, 그 고통을 떠안아야 하는 것은 다시 한번 시리아의 민중들이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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