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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9.28 16:12 수정 : 2012.09.29 10:37

[토요판] 뉴스분석 왜?/ ‘전과 25범 비강도’ 최갑복 이야기
경찰은 면회 막고, 언론은 ‘신출귀몰’만 봤다

▶‘비강도 최갑복’. 경찰서 유치장을 탈출한 최씨는 경남 밀양의 한 고추농가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도둑질은 했지만, 폭행이나 협박으로 남의 재산을 빼앗는 ‘강도질’은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었다. 경찰도, 언론도 ‘전과 25범’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비강도 최갑복’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오직 ‘희대의 탈주범’ 혹은 ‘흉악범’ 최갑복이었다.

최씨가 상해를 가했다는 김씨
김씨는 “맞은 적 없다”고 했다
“(최씨가) 나한테 오지게 맞아
현관 옆에 쓰러져 있었어
나도 멍해 그냥 서 있었지”

23년8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범죄는 절도가 대부분이었다
한데 권리행사도 적극 했다
인권위에 접수한 진정만 43건
이번에도 “억울하다”고 한다

골목을 돌아나온 경찰 호송차량이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기우뚱 기울었다. 언론사 취재 차량 6대가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지난 25일 오전 11시 대구광역시 동구 각산동 동부경찰서 앞 도로에서 추격전이 벌어졌다. 전과 25범의 탈주범 최갑복(50)씨의 도주경로 현장검증을 나선 경찰과 이를 취재하는 언론이었다. 현장검증 도중 최씨는 언론을 향해 “나는 억울하다”고 소리쳤다. 경찰이 서둘러 그의 입을 막았다.

‘배식구 탈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최씨가 애초 경찰에 붙잡힌 것은 지난달 12일이었다. 경찰은 지난 7월8일 자신이 세들어 살던 주인집에 침입했다 달아난 그에게 ‘강도상해’ 혐의를 적용했다. 최씨는 자신의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최씨는 ‘탈출’을 선택했다. 경찰서 유치장 입감 5일 만인 17일, 최씨는 경찰 감시가 소홀해진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상반신에 연고제를 칠갑한 그는 가로 45㎝, 세로 15㎝의 배식구를 빠져나온 뒤 경찰서에서 도망쳤다.

그 밤 최씨는 왜 주인집에 침입했을까

언론의 관심은 가로 45㎝, 세로 15㎝의 좁디좁은 배식구에 쏠렸다. ‘사람의 몸이 세로 15㎝의 배식구를 통과할 수 있는가?’ 한 방송에서는 유연한 몸으로 유명한 ‘통아저씨’(본명 이양승·59)를 불러 모형 배식구 탈출 실험을 하기도 했다. 이씨는 실패했다. 몸이 원체 유연해 ‘요가왕’이라는 탈주범 최씨가 알고 보니 전과 25범의 범죄 경력까지 갖췄으니 ‘뉴스 인물’로는 손색이 없었다. 언론은 ‘전과 25범 탈주범 최갑복’ 관련 기사를 앞다투어 쏟아냈다. 최씨는 그렇게 ‘괴물’로 다시 태어났다.

탈주 기간은 길지 않았다. 22일 오후 4시40분께, 경찰은 경남 밀양의 한 아파트 옥상에 숨어 있던 최씨를 다시 붙잡았다. 이번에는 강도상해 혐의에 절도 3건과 도주 혐의가 추가로 붙었다. 지난 27일 경찰이 최씨 사건을 검찰로 송치한 뒤 그를 둘러싼 치열한 보도 경쟁도 끝났다. 최씨가 왜 세상을 향해 ‘억울하다’고 외쳤는지, 그 사연도 묻혔다. 지난 7월8일 최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구 효목동에 사는 김아무개(78)씨는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김씨는 최씨에게 1층 창고를 임대해준 집주인, 그러니까 최씨가 저질렀다는 강도상해 사건의 ‘피해자’였다. 김씨의 말을 들어보면, 1층 창고에서 먹고 자던 최씨는 사건 당일 새벽 2시30분께 방범창을 찢고 김씨가 살던 2층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날이 더워 창문 쪽에서 자고 있던 김씨의 부인이 놀라 “도둑이야”라고 외쳤다. 건넌방에서 자던 김씨가 소리를 듣고 뛰어나왔다. 거실에서 맞닥뜨린 최씨와 김씨가 뒤엉켰다. 체구가 작은 최씨는 김씨에게 맞고 쓰러진 뒤 그대로 꽁무니를 내뺐다. 김씨는 창 너머의 가로등 불빛 사이로 최씨 얼굴을 알아봤다.

지난 25일 기자와 만난 김씨는 경찰 발표와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줬다. 당시 사건의 핵심 쟁점이라 할 수 있는 폭행 여부에 대한 이야기부터 경찰과 김씨의 말이 엇갈렸다. 경찰은 사건 관련 보도자료에서 “(최씨가) 소지하고 있던 골프채를 휘둘러 피해자에게 진단 3주의 상해를 가했다”며 강도상해 혐의의 내용을 밝혔다. 김씨는 “맞은 적 없다”고 말했다.

“누가 다쳐요? 맞지도 않았고 (최씨가) 뭘 휘둘렀는지 난 정신이 없었어. 다음날 보니 골프채가 부러져서 주방에 굴러다니고 있는 걸 보고 알았지. 우리는 골프채를 안 쓰니까, (최씨가 가져왔을 텐데) 그놈이 그렇게 진술했대. (최씨가) 벽에 휘두르든지 했겠지.” 만약 최씨가 김씨를 때린 게 아니라면 강도상해 혐의가 아닌 주거침입, 특수절도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 최씨 변호인의 주장이다. 강도상해는 최하 징역 7년(피해자와 합의하면 3년6월)이고, 주거침입은 최대 징역 3년으로 형량이 다르다.

“(최씨가) 나한테 오지게 맞아서 현관 옆에 쓰러져 있었어. 나도 멍해서 1m 옆에 그냥 서 있었지. 그놈이 더는 못 덤비겠으니까 장갑 낀 손을 들어 올리면서 ‘칼이다 칼’이라면서 부들부들 떨어. 내가 보니 칼은 없더라고. 그런데 이놈이 빠르긴 빨라. 내 앞으로 쌩하고 뛰어가더니 들어온 창으로 다시 나가. 보니까 전깃줄을 잡고 ‘사빡’ 주저앉는데 무릎에 ‘바운스’(반동)를 주더라고. 운동신경이 좋고 굉장히 빨랐어.” 자식뻘 되는 성인남자를 상대로 한 몸싸움에서 지지 않은 김씨는 나이에 비해 허리가 곧았다. 키는 최씨(165㎝)보다 큰 170㎝ 정도.

세입자 최씨는 왜 주인 김씨 집에 침입했을까. 김씨는 “최씨가 자신의 상가건물 1층 창고(7~8평)에서 페인트 가게를 한다는 말에 세를 줬는데 시너를 쌓아두자 위험하고 불법이라는 생각에 최씨를 내보내자 앙심을 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건 발생 20여일 전인 6월 중순이었다. 이에 대해 최씨는 지난 26일 경찰이 공개한 자필편지에서 “김씨가 점포를 비우라 해서 어쩔 수 없이 길가에 모든 살림살이를 내놓았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또 “(김씨가) 오히려 골프채를 뺏어 (자신을) 때렸다”고 적었다.

이웃들의 눈에 비친 ‘이상한 사람’

최씨가 금품을 훔치러 갔는지 여부도 논란이다. 경찰은 최씨가 “금품을 가지러” 갔다고 밝혔으나, 최씨는 임대차계약서를 가져가려 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경찰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노인 둘이 사니까 뭐라도 훔치러 들어온 거겠지. 지랑 나랑 하나씩 나눠 가진 계약서를 왜 가지러 오냐고.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세입자가 나가면 그 계약서는 집주인인 내가 돌려받으면 받았지 세입자가 가져야 할 이유가 있겠어? 그걸 그 밤중에 왜 가지러 오냐 이 말이지.”

“맞은 적 없다”는 김씨의 증언에 대해 경찰은 28일 “김씨가 경찰에서는 ‘뒤엉켜 싸우는 과정에서 서로 주먹이 오갔는지는 모르겠다’며 폭행당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고 주장했다. 강도상해 혐의 적용에 대해서도 경찰은 “임대차계약서를 훔치러 들어간데다, 그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했기에 단순 절도가 아닌 강도상해라고 본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웃 주민은 최씨에 대해 “평범하지는 않았던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나무합판에 매직으로 쓴 ‘신라페인트’가 최씨 가게의 간판이었다. 주렁주렁 달린 은색의 시디(CD)와 알록달록한 그림들이 간판을 장식했다. 실내는 커튼을 쳐서 안쪽 주거공간과 바깥 가게를 구분했는데, 탁자에는 <선데이서울> 같은 지난 잡지를 깔아뒀다. 최씨의 옷차림이나 행색은 초라했다.

‘이상한 사람’ 최씨는 늘 혼자였다. 경찰과 변호인, 주변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최씨의 삶은 고단했다. 최씨는 1962년 8월 부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직업 군인이었는데 행방불명되고, 어머니도 사망한 걸로 알려졌다. 형과 누나는 행방불명 상태다. 가정불화로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던 최씨는 유년기를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의 외가에서 보냈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잘했다는 최씨는 핸드볼을 했는데 코치한테 많이 맞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일, 뱃일 등 육체노동을 많이 했다. 교도소를 드나들면서도 멸치가게, 노점 등을 해봤지만 수완이 좋지 않았다. 대구에서 카바레를 출입하며 여성들에게 춤을 가르쳐주고 약간의 돈을 얻어 생활해왔다.

만 50살의 최씨는 인생의 절반을 감옥에서 지냈다. 약 23년 8개월이다. 범죄는 절도가 대부분이었다. 형량이 낮은 편이었는데 누범(금고 이상의 형을 받아 그 집행이 끝나거나 면제를 받은 사람이 3년 내에 다시 금고 이상에 해당하는 범행을 행한 사람)이 되면서 점차 형량이 늘어갔다. 최씨는 만 15살이 된 1978년 3월24일 절도로 단기 8월(장기 10월)을 선고받고 첫 징역을 살았다. 이후에도 최씨는 1980년 9월부터 2008년까지 야간주거침입과 절도, 사기, 특수도주, 준강도 등으로 크고 작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최씨는 2008년 가출 미성년 강간상해 및 사기,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4년과 벌금 50만원형을 선고받은 적이 있었다. 언론이 앞다퉈 소개한 최씨의 여중생 성폭행 범죄로 1993년 5년형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 가장 무거운 처벌이었다. 최씨는 지난 2월 그 4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25번의 전과 가운데 실형을 선고받은 건 12번이었다.

“호랑이 안 무서운데 가난이 무서워”

대구 달서구 두류동에 위치한 건물 지하 상가, 지난 26일 오후 2시 최씨의 지인 이광술(56)씨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씨는 지난 4월부터 7월 사건 발생 직전까지 최씨에게 선글라스, 여성용 모자, 칼갈이 등을 팔아 수익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등 서로 거래관계를 유지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언론에 보도되는 최씨가 너무 불쌍했다며 이씨가 말했다.

“(동네에 이사온 최씨가) 교도소에서 나온 지 한달도 안 됐다며 소주 한잔하고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그러면서 ‘교도소 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카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는 호랑이도, 레슬링 선수도 안 무서운데 가난과 배고픔, 딱 두가지가 무섭다’ 이카더라고요.”

이씨의 사무실에는 최씨 개인 물건으로 보이는 민사소송법 책과 댄스스포츠 책, 수저 한 벌, 먹다 남은 새우깡 반봉지 등이 있었다. 이씨가 계속 말했다. “(최씨가 전과자라고) 취직도 안 되지, 노동일 해보려 해도 요즘은 산재처리한다고 신원을 밝히라 하니까 잘 안 받아준다 아닙니까. 장사하려 해도 돈이 없고, 친구들도 전부 다 자기랑 똑같은 입장이라고 울었어요. 그래서 여기서 일할 수 있겠냐 하니까 ‘내 같은 것도 받아줍니까’ 하고 좋아하더라고요. 전에는 모르지만 저랑 같이 일할 때는 참 열심히 했어요.”

법의 심판을 받아온 최씨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권리 행사에 적극적이었다. 최씨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한 진정만 총 43건. 대부분 교도소와 경찰을 상대로 한 진정, 권리침해에 대한 불만이었다. 2006년 4월 대구 남구 대명동의 한 금은방에서 시계를 훔쳐 나오던 최씨가 주인과 엉겨붙어 싸우다 붙잡혀 준강도혐의로 1년6월의 실형을 살고 나온 사건도 그랬다. 최씨는 인권위에 사건 당일 경찰에 자신도 금은방 주인으로부터 폭행피해를 당했다며 고소장을 작성해 제출했지만 경찰이 이를 묵살했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냈다. 당시 인권위는 최씨의 이런 진정에 대해 국민이 범죄피해로부터 자신을 보호받거나 구제받고자 국가기관에 고소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지 않은 점은 헌법이 보장하는 적법절차 원칙을 위반했다며 경찰서장에게 해당 경찰관을 주의조치할 것을 권고했다.

경찰이 최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씨는 A4 용지 5장에 쓴 자필편지에 자신의 강도상해 피의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를 밝혔다. 최씨 사건을 담당한 동부경찰서 관계자는 전과가 많은 범죄인의 특징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에게 불리한 범죄사실은 부인한다며 최씨의 주장을 일축했다. 면회도 23일 오후 5시 최씨의 여자친구 이아무개(74)씨와 그의 딸만 허용하고 기자들과의 접촉을 통제했다. 경찰 수사를 비판해온 대부분의 언론도 최씨의 자필편지 내용은 짧게 보도하거나 아예 보도하지 않았다.

자신을 ‘비강도’라 밝힌 최씨의 변이 사회로 향했다. 국선변호인 윤정대 변호사는 최씨가 출소 후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던 점을 강조했다. “전과가 많은 사람들은 형을 다 살고 나와도 생계를 꾸릴 수가 없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계속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높은데, 최씨는 가족이나 친지 등 돌봐줄 사람이 전혀 없었다.” 대구/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한겨레>는 다른 매체들이 최씨의 실명을 그대로 쓰는 가운데서도 범죄 피의자에 대한 무죄 추정 원칙에 따라 익명 보도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대구 현지 취재로 최갑복씨가 처한 상황과 입장을 충분히 보여주는 이 기사까지 익명보도하는 것은 오히려 독자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 기사가 최씨의 명예를 훼손할 우려가 없다는 언론학자의 자문과 담당 변호사의 허락을 얻어 이번에 한해서만 실명을 그대로 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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