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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남대문로2가 한진빌딩 9층에 있는 한국일보 회장실 앞에서 14일 노조 조합원들이 ‘부당인사 철회’ 등을 요구하며 항의하고 있다. 회사는 지난 10일 이영성 편집국장을 업무방해 혐의로 경찰에 고발한 데 이어 22일 징계위원회를 열겠다고 밝혔다. 한국일보 노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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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한국일보 잔혹사
▶ 15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2가 한진빌딩에 있는 한국일보사를 찾았습니다. 같은 기자지만 잠시 취재현장을 떠나 회사와 싸우고 있던 선배들은 “기사 잘 써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 격려 문자를 보냈던 <한국일보> 후배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이날은 <한겨레>의 25번째 생일이었습니다. 25살 <한겨레>와 59살 <한국일보>가 앞으로도 함께 좋은 기사로 독자들과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1954년 중립·비판지 표방하며태어난 한국의 첫 ‘상업신문’
언론사 최초로 기자 공채를 하고
고졸 채용하는 등 인재를 아껴
‘기자사관학교’로 불렸던 신문
그 신문이 대위기를 맞았다 월요일 휴간을 최초로 없앴다
주당 지면도 언론사 최대였다
조석간 발행 실험도 최초였다
더 많은 신문을 찍기 위해
돈을 무한정 빌리기 시작했다
사주의 부패·무능까지 겹쳤다 ‘가장 오랜 역사의 후광도, 최대 발행 부수의 후광도 없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한, 우리 사회를 움켜쥔 ‘큰손’의 완전한 포로나 동맹자가 된 적은 없다. 세태에 휩쓸리지 않고 사회의 중심을 잡는 신문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시는 독자라면, 한국일보에 힘을 보태주시기를 간청드린다.’ 2005년 6월9일치 <한국일보>에 실린 고종석 당시 객원논설위원의 ‘이런 신문 하나쯤은…’이란 칼럼의 일부다. 이 시기는 2002년부터 워크아웃(기업 재무구조 개선) 상태였던 한국일보의 장재구 회장이 채권단과 약속한 500억원 중 300억원의 증자를 3년째 하지 않아 논란이던 때였다. 게다가 임금 삭감 등의 내용이 담긴 경영정상화 방안을 사쪽에서 제시해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창간 60년을 1년 앞둔 한국일보의 올해는 6년 전 못지않게 어둡다. 4월29일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일보사지부(노조)’는 장재구 회장을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업무상 배임) 혐의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발했다. 회사는 5월1일 이영성 편집국장을 창간 60주년 기획단장으로 발령하는 보복성 인사를 발표했다. 2일자 한국일보 1면에 ‘인사 거부’ 성명서를 발표한 한국일보 노조 비상대책위원회의 소속 기자들은 이영성 편집국장을 중심으로 한 기존 편집국 체제 속에서 신문을 제작하고 있다. 한때 ‘1등 조간신문’의 위상을 자랑했던 한국일보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한국일보의 수난은 권력과 자본에 휘둘렸던 한국 신문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회사 나갔어도 언제든 돌아오라” “교열도 일일이 직접 보고, 부장도 대놓고 혼내고, 회사에서 먹고 잘 만큼 좋게 말하면 열심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간섭이 심했죠. 그래도 사람을 아낄 줄 알았고 기자를 존중해줬어요. 회사를 나갔어도 언제든 다시 돌아오라고 했었죠.” 1973년 한국일보에 입사한 조성호 전 지역신문발전위원장이 기억하는 한국일보 사주 고 장기영 회장의 모습이다. 1954년 5월9일 ‘신문은 누구도 이용할 수 없다’를 내세우며 한국 사회에 등장한 한국일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신문이었다. 당시 ‘여당지’였던 <경향신문>, <서울신문>과 ‘야당지’인 <동아일보> 사이에서 한국일보는 중립·비판지를 표방했다. 한국일보는 1960년 4월19일, 하루 전날 일어난 고려대 학생들의 데모를 과감하게 1면 톱으로 보도했다. 신생 중도지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1954년 3만8000부던 발행부수가 1959년 16만6300부로 훌쩍 늘어났고, 1969년 보급부수는 동아일보(28만7094)에 이어 2위(22만1086)를 기록했다. “정상이 보인다”며 동아일보를 추격하던 1964년 장기영 전 회장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으로 박정희 정부에 입각하자, 보급률이 크게 줄 만큼 외면당한 것도 이런 이미지와 무관치 않았다. 장기영 전 회장은 사장·발행인·편집국장을 겸임했다. 1962년 ‘사회노동당 필화사건’으로 구속된 상태에서도 신문 제작을 지휘할 만큼 편집권까지 장악했던 경영자였다. 편집권의 개념이 미약하기도 했지만, 장 전 회장이 한국일보 기자들을 크게 구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성호 전 위원장은 “한국일보는 다른 신문사보다 덜 가부장적이고, 개인의 자유가 보장됐으며, 선후배 간의 끈끈한 정을 바탕으로 토론이 활발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장 전 회장은 1954년 7월 언론사 최초로 기자 공개채용을 실시해, 능력만 있으면 고졸 학력자도 채용할 정도로 인재를 아꼈다. “우수한 신문을 만들려면 우수한 기자가 필요하다”며 글 잘 쓴다는 사람을 기자로 채용하거나 글을 쓰게 했다. ‘기자 사관학교’라는 별명도 이때 생겼다. 그러나 한국일보도 박정희 독재정권의 언론 통제를 벗어날 수 없었다. 정부기관원이 회사에 상주하며 기사를 검열했고, 툭하면 기자를 연행·구속했다.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는 쓸 수 없었던 언론의 부끄러운 과거에서 한국일보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도 ‘보도지침’을 만들어 입맛에 맞는 기사만 쓰게 했다. 1980년 언론사 통폐합 땐 자매지인 <서울경제>가 강제로 폐간되면서 사세가 기울었던 아픔도 겪었다. 그래도 한국일보 기자들은 1971년, 1974년, 1980년 언론자유수호 운동을 펼쳤다. 1986년에는 ‘두꺼비’를 연재했던 안의섭 화백이 ‘대통령을 모독했다’며 안기부(현 국정원)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뒤 1년 7개월간 활동이 중단됐다. 같은 해 김주언 당시 한국일보 기자(현 <한국방송>(KBS) 이사)는 제5공화국 시절 정부가 언론통제를 위해 각 언론사에 시달하던 제목과 기사의 가이드라인인 보도지침을 폭로해 감옥살이를 했다. 1987년 6월항쟁 뒤인 10월29일 언론사 중 최초로 노조를 부활한 곳도 한국일보였다. 출혈경쟁 가장 선도하더니 가장 피해 봐 1987년 6월 이후 언론기본법이 폐지되고 까다로웠던 신문사 설립조항 등이 완화되면서, 언론사가 난립하기 시작했다. 1987년 30여개였던 일간신문이 1년 만인 1988년 65개로 늘어나면서, 언론사들은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한 무한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 중심에 한국일보가 있었다. “1980년에 8면이었던 신문이 1990년대 들어선 40면으로 늘어났어요. 가장 눈에 띄게 다른 신문과 차별화를 둘 수 있었던 게 당시는 증면이었거든요.” 김주언 이사가 말했다. 증면의 배경엔 1989년 7월3일부터 발행한 월요판도 있었다. 당시 신문사는 월요일자는 발행하지 않았는데 한국일보가 언론사 최초로 ‘휴간 없는 신문’을 발행했고, 다른 신문사로도 확대됐다. 언론사들의 증면 경쟁은 대통령까지 나서 자제를 부탁할 정도로 치열해졌다. 1989년 44만4259t이었던 전체 신문용지 소비량이 1994년에는 87만3825t으로 늘어났다. 1995년 3월엔 돈을 주고도 신문용지를 구하지 못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이 신문을 인쇄하지 못하는 일도 벌어졌다. 몸집 불리기가 한계에 부딪히자 1991년 12월16일부터 한국일보는 조·석간 동시 발행을 시작했다. 12월2일에 실린 사고에서는 “조석간 동시 발행은 한국 신문사의 혁명”이라고 자평했다. 1993년 12월1일 석간 발행을 중단할 때까지 어느 신문사도 이 실험을 따라오지 않았다. 물량 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국일보는 전국 동시인쇄를 최초로 시행했다. 더 많은 신문을 찍기 위해 윤전기를 늘려야 했고, 배달을 위한 지국도 늘려야 했다. 필요한 돈은 은행에서 빌렸고, 빚은 무한정 늘어났다. 1977년 숨진 장기영 회장의 뒤를 이은 첫째 아들 장강재 회장과 넷째 아들 장재국 사장은 공격적인 경영을 멈추지 않았다. 생존 위기가 더해지면서 기자들의 ‘자사 이기주의’도 심화됐다. 1995년 4월15일 중앙일보의 조간화를 앞두고 한국일보는 “삼성의 광고를 잃어도 재벌 언론의 문제점을 비판하겠다”며 3월25일 ‘재벌의 언론파괴’라는 사설을 내보내 전면전을 펼쳤다. “민주화를 제대로 느껴보기도 전에 무한 경쟁 시대가 왔어요. 거기다 1993년 장강재 회장 사후 컨트롤타워도 사라졌고요. 조선일보, 동아일보보다 자본력이 약한 한국일보는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죠.” 김주언 이사가 말했다. 한국일보가 앞장선 출혈 경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한국일보였다. 조선일보, 중앙일보에 밀리기 시작했고 신문사의 재무구조도 악화됐다. 1997년 감사보고서는 ‘그해 179억2800만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고 누적 결손금이 339억1300만원에 달하며…회사가 계속 기업으로 존속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근거를 제기합니다’고 지적했다. 1997년 한 해 지급한 부채 이자액이 297억6000만원으로, 1년 인건비 총액 281억1700만원보다 많았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사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1998년 4300억원이던 부채는 1999년 5590억원으로 늘었다. 엄청난 부채를 짊어진 한국일보는 1999년 부도처리를 유예하고 회생 기회를 주는 ‘사적 화의’로 채권단의 관리를 받기 시작했고, 2002년 9월부터는 워크아웃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한국일보의 무리한 경영이 다른 신문을 자극시키고 위기감을 줘 신문 전체를 무한 경쟁 시대로 몰아갔죠. 그러다 재력 있는 신문사들보다 자본이 약하니까 나중에 뒤집혀서 거꾸로 쫓기게 된 거죠.” 조성호 전 위원장이 말했다. 창업주 5남 중 3명의 회장직 돌려막기 ‘방조선, 김동아, 장한국, 홍중앙, 조국민.’ 족벌언론을 비꼬는 이 말들처럼, 사주가 있는 언론사들은 세습으로 경영권을 유지하면서 회사를 좌지우지해왔다. 한국일보의 사주인 장씨 일가는 경영 잘못으로 회사에 위기가 찾아왔던 1990년대 말, 경영권을 둘러싼 집안싸움에 몰입했다. 1998년 2월 고 장강재 회장의 장남 장중호씨 쪽과 장재구 회장이 연합해 장재국 회장을 탄핵했다. 형제와 조카까지 뛰어든 집안싸움은 한국일보와 자매지인 <일간스포츠> 등의 경영권을 나눠갖기로 하면서 일단락됐다. 전문경영인 체제라는 한국일보의 실험은 같은 해 10월 장재국 회장이 복귀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2002년 초 장재국 회장이 경영난 등을 이유로 해임됐고, 그 자리는 고 장기영 회장의 둘째 아들이자 지금의 한국일보 회장인 장재구씨가 차지했다. 결국 10여년간 이름도 비슷한 2~3살 터울의 5형제 중 3명이 번갈아 한국일보 회장을 맡았던 셈이다. ‘사적 화의’ 상태였던 한국일보는 2002년 워크아웃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장재구 회장이 500억원 증자를 약속하면서 우리은행 등 채권단은 전폭적 지원을 결정한다. 회사 회생의 발목을 잡은 건 또 장씨 일가였다. 채권단의 합의 이행을 위해 열린 주주총회에 한국일보 최대 주주(지분 49.5% 소유)인 장중호 일간스포츠 사장이 불참한 것이다. 사주들의 부정부패도 하나둘씩 드러났다. 소문으로만 돌던 장재국 회장의 카지노 도박은 1999년 7월 사실로 확인됐다. 그는 1996년 2월 미국 라스베이거스 미라지호텔 카지노 도박장에서 사흘 만에 186만달러를 탕진했다. 또 장재국 회장 등 주주 11명은 1991년부터 단기 대여금 명목으로 460여억원의 회사 소유 재산을 빼돌린 혐의도 받았다. 2001년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이들을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회사 위기로 유능한 기자들이 다른 언론사로 떠나면서 ‘기자 사관학교’라는 명예는, 잠시 기자 일을 배우다 떠난다는 의미의 ‘기자 세탁소’로 추락했다. 저임금에 시달리던 한국일보 기자들은 임금을 50% 인상하는 대신 노조를 탈퇴하라는 회사 쪽의 요구를 2000년 5월 수용했다. 한때 800명에 가까운 조합원이 있었던 한국일보 노조는 10여명 남짓의 조합원만이 남아 있었다. 장재구 회장은 약속을 계속 미뤘다. 2002년 8월, 9월 100억원씩 증자를 했지만 나머지 300억원은 2005년 6월30일에야 완납됐다. 그 다음해 8월 채권단은 다시 한국일보 중학동 사옥 매각과 장 회장의 200억원 추가 증자를 요구했다. 장재구 회장은 사옥을 한일건설에 팔면서, 새 건물을 지은 뒤 2000평을 140억원에 우선 살 수 있는 우선매수 청구권을 받는다. 이 청구권을 근거로 2011년 1월1일자 한국일보 1면에 중학동 복귀를 알리는 사고까지 냈다. 그러나 재입주는 이뤄지지 않았다. 장재구 회장이 우선매수 청구권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장 회장이 2006, 2007년에 사재로 내기로 한 추가 증자금 200억원이 사실은 한일건설에서 빌린 돈이고, 이 때문에 새 건물을 매각하기로 한 한일건설의 청구권 포기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노조는 보고 있다. 한국일보 구성원들의 허탈함은 클 수밖에 없었다. 한국일보 편집국은 ‘적극적 중도’를 표방하며 신문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정파성 없이 좌우 비판도 칭찬도 자유롭게 하는 제대로 된 중도지를 만들자는 데 다들 공감해 똘똘 뭉쳐 있었는데…. 무능했지만 편집국은 그냥 뒀었기에 자본금만 가지고 오면, 기자들 인적 구성은 좋으니까 나아질 거란 믿음이 있었어요. 장씨 일가의 경영 실패, 무능, 횡령, 배임 등이 반복되면서 한국일보를 망가뜨렸습니다.” 한때 기자협회장을 맡으며 회사를 비판한 탓에 보복 인사 대상이 된 고재학 한국일보 경제부장이 말했다. 사옥 문제가 불거지면서 한국일보 기자 130여명은 2011년 3월 노조에 재가입했다. 풍전등화의 회사 운명 앞에서 한국일보 구성원들은 2년을 기다렸지만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사옥 이전 뒤 회사가 새 출발 하겠구나, 새 시대가 오겠구나 다들 기대했는데 회장은 끝까지 그 기대를 저버렸어요. 경영파탄으로 기자실비, 기고비도 주지 못해 한국일보의 가치와 철학을 위협하는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죠. 이젠 장재구 회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한국일보의 미래를 구성원들에게 맡겼으면 합니다.” 정상원 노조 비대위원장이 말했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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