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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31 20:16 수정 : 2013.06.02 11:23

[토요판] 뉴스분석 왜? 프로야구 물벼락 논란

▶ 야구를 하나도 모르거나 야구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도 5월 마지막 주 가장 ‘뜨거운’ 인터넷 검색어 가운데 하나였던 ‘임찬규’라는 이름은 들어봤을 겁니다. 류현진처럼 메이저리그 데뷔 첫해에 완봉승을 거둔 것도 아니고, 추신수나 이대호처럼 각각 미국과 일본에서 홈런을 펑펑 터뜨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제 고졸 3년차 신인급 선수는 어떻게 인터넷 세상을 평정했을까요. 참고로 연관 검색어는 ‘물벼락’, 그리고 ‘정인영’입니다.

극적 승리 뒤 인터뷰 도중
정의윤에게 갔어야 할 물벼락이
옆 정인영 아나운서에게
더 많이, 더 세차게 쏠렸다
비판받아 마땅한 짓이었지만…

3일간 기사 700건 쏟아지고
“인성 교육 필요하다”는
특정선수 과도한 인신공격에
고졸 3년차 신입급 투수는
일생일대의 사건을 경험했다

프로야구 엘지(LG) 트윈스 소속 임찬규(21)는 고졸 3년차 ‘신인급’ 투수다. 2011년 서울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임찬규는 그해 잠시 팀의 클로저(마무리 투수)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 이는 당시 엘지의 불펜이 고졸 신인에게 뒷문을 맡겨야 할 만큼 허약했다는 뜻이기도 했고, 그가 마운드 위에서 누구보다 씩씩하게 공을 뿌릴 줄 알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했다. 첫해 성적은 9승6패7세이브(평균자책점 4.46)로 나쁘지 않았다.

‘6·17 사태’ 능가하는 물벼락 사건

임찬규는 강심장을 갖고 태어난 것일까.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나름의 가능성을 보인 2011년에도 그는 또 하나의 기록을 남겼다. 엘지 팬은 이를 ‘6·17 사태’로 부르고 있다.

그해 6월17일 엘지는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1위를 달리던 에스케이(SK) 와이번스와 맞붙었다. 엘지는 당시 4연패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엘지는 그날 5연패만큼은 막겠다며 필승의 각오로 임했다. 타자들은 1회부터 4회까지 착실히 점수를 쌓았고, 9회까지 엘지는 4-1로 앞서고 있었다. 마무리 임찬규는 9회 1사 1루 상황에서 마운드 위에 올라왔다.

임찬규는 첫 타자 박윤을 깔끔하게 삼진 처리하며 9회 2사를 만들어놓았다. 누구도 엘지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은 그때 그는 다음 타자 박진만에게 안타를 허용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괜찮았던 제구력이 한순간에 흐트러졌다. 조동화에게 볼넷을 허용해 만루 위기를 스스로 만들더니, 정근우-박재상-최정에게 3연속 밀어내기 볼넷으로 동점을 허용했다. 스트라이크존을 외면하는 볼 개수가 늘어날수록 임찬규의 표정은 점점 하얗게 질렸고,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는 ‘공은 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것’이라는 듯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급히 교체된 이대환마저 밀어내기 볼넷과 안타를 내줘 엘지는 결국 그날 4-6으로 졌다. <일간스포츠>는 다음날 신문 1면 머리에 큼지막한 글씨로 이렇게 말했다.

“LG 이것도 야구냐”

임찬규는 그 해에 신인왕 후보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겁없이 도전하는 ‘영건’의 패기와,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신인의 나약함을 함께 드러냈다. 야구 선수로서 아직 여물기 전이었다는 이야기다. 올해도, 지금까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래의 에이스가 될 것이라는 기대와, 입단 계약금 3억원의 몸값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의 경계에서 임찬규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약 2년 전 6·17 사태를 빼면 크게 눈에 띌 일을 만들지 않았던 임찬규는 최근 일생일대의 사건을 경험했다. ‘임찬규 물벼락 논란’이었다.

지난 5월26일 오후 잠실 에스케이전이 끝난 뒤 수훈선수 인터뷰를 하던 정의윤(27)에게 물을 끼얹은 행동이 논란의 시작이었다. 오랜만에 만점 활약을 펼친 선배를 향한 짓궂은 ‘세리머니’였다. 문제는 임찬규의 ‘물벼락’이 정의윤보다는 인터뷰를 진행하던 정인영 <케이비에스 엔>(KBS N) 아나운서 쪽으로 더 많이 향했다는 사실이었다. 힘차게 물을 끼얹은 뒤 해맑게 웃으며 도망가는 임찬규와, 흠뻑 젖은 채 당황하지 않고 인터뷰를 마무리한 정 아나운서의 모습은 케이비에스 엔 생중계를 통해 생생히 전해졌다.

임찬규는 ‘죽을죄’를 지은 것일까. 일단 그가 비판받아 마땅한 행동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다. 정의윤에게 향했어야 할 물벼락이 정인영 아나운서에게 더 많이, 그것도 세차게 쏠렸다. 인터뷰도 한동안 중단됐다. 류대환 한국야구위원회(KBO) 홍보지원부장은 30일 “어느 정도 과도한 부분은 있었다. 선수끼리 (물벼락을) 주고받았다면 또 모르겠는데, 인터뷰를 진행하던 아나운서가 더 맞았으니 과한 세리머니였다”고 말했다. 류 부장은 “우리 위원회에서는 2~3년 전부터 각 구단 운영팀장단 회의를 통해 선수들의 축하 세리머니가 너무 과격해지지 않도록 주의해달라고 당부해왔다”고 덧붙였다.

다만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와 문화, 그날 경기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안다. 그는 비판받아 마땅한 행동을 저지른 것일지는 몰라도, 죽을죄를 지은 적은 없다.

과격한 축하 세리머니 악역은 막내들

우선, 그날 두 팀의 경기는 충분히 드라마틱했다. 에스케이와 6위 자리를 놓고 맞붙은 엘지는 경기 내내 고전했다. 에스케이의 에이스 크리스 세든(30)의 완벽에 가까운 호투에 말려 8회까지 단 4안타에 그쳤다. 한점 차 승부에 유독 약한 엘지였기에 9회초 에스케이의 공격이 무득점으로 끝난 상황에서도 승리를 점치기란 여전히 어려웠다.

9회말 0-0 상황에서 에스케이의 마운드는 여전히 좌완 선발 세든이 지키고 있었다. 엘지의 선두 타자 문선재는 용케 안타를 쳐내 무사 1루의 찬스를 만들었고, 타석에는 정의윤이 들어섰다. 세든을 상대로 엘지 타자들이 연속 안타를 쳐내기란 어려울 것처럼 보였다. 정의윤은 당연히 번트 동작을 취했다. 세든이 공을 뿌릴 때 정의윤이 갑자기 배트를 곧추세웠다. 페이크 번트 앤 슬러시(번트 동작을 취하다가 강공으로 전환하는 것)였다. 정의윤의 강한 땅볼 타구는 번트에 대비해 수비 위치를 바짝 끌어당긴 3루수 최정 앞에서 크게 튀어올라 외야까지 흘렀다. 발빠른 1루 주자 문선재는 2루와 3루를 돌아 무서운 속도로 홈까지 질주했다. 그리고 공보다 먼저 홈 플레이트를 찍었다. 1-0, 경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순간 엘지 덕아웃에 있던 모든 선수는 끝내기 2루타의 주인공 정의윤에게 달려갔다. 임찬규의 물벼락 세리머니는 끝내기 안타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나왔다.

프로야구 무대에 요란한 축하 세리머니가 등장한 것은 벌써 몇 해 전의 일이었다. 대개 팀이 연패를 끊거나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을 때, 선수 개인이 완봉승 등 의미있는 기록을 거둬 스포츠 전문 케이블채널 인터뷰에 나섰을 때 어김없이 세리머니가 펼쳐졌다. 이때 선수들이 가장 즐겨 활용한 축하의 방식은 물벼락이나 케이크 바르기였다. 악역은 주로 팀내 막내급 선수들이 맡아왔다.

지난해 9월6일 두산 베어스의 내야수 최준석은 넥센 히어로즈와의 잠실 홈경기를 승리로 이끈 뒤 스포츠 채널 <엑스티엠>(XTM)의 수훈선수 인터뷰 도중 후배 내야수 허경민으로부터 케이크 세례를 받았다. 최준석은 얼굴에 케이크 범벅이 된 채 인터뷰를 마쳤다. 두산은 같은 달 26일 역시 잠실에서 벌어진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를 5-0으로 마친 뒤에도 짓궂은 세리머니를 가졌다. 희생자는 완봉승을 거둔 투수 노경은이었다. 노경은은 방송 인터뷰를 갖던 중 후배 투수 변진수와 허경민으로부터 얼굴에 케이크와 콜라 세례를 받았다. 올시즌에도 지난 4월30일 엔씨(NC) 다이노스와 엘지의 경기에서 수훈선수로 꼽힌 엔씨 이호준이 후배 김태군으로부터 방송 인터뷰 중 케이크를 강하게 맞은 적이 있다.

물벼락 세리머니도 적지 않았다. 지난해 5월10일 넥센과 엘지의 경기에서 시즌 첫승을 거둔 넥센 투수 김영민은 케이비에스 엔과 인터뷰하고 있을 때 뒤에 숨어 있던 동료 장효훈이 쏟아부은 물을 뒤집어쓴 적이 있다. 이 사건은 크게 화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인터뷰를 진행했던 공서영 아나운서(현재 엑스티엠 소속)가 훗날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그때 (나도) 옷 절반이 젖어버렸다”며 물벼락 경험을 밝히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번에 임찬규에게 물벼락을 맞은 정인영 아나운서는 지난해 8월11일에도 물벼락 피해를 입었다. 이날 에스케이를 잠실로 불러들인 두산은 김재호의 역전타에 힘입어 5-2 역전승을 거뒀다. 4연패 뒤 첫승이었다. 경기가 끝난 뒤 김재호를 인터뷰 하던 정 아나운서는 갑자기 다가와 물벼락을 퍼붓는 김현수를 발견하지 못했고, 김재호와 함께 머리와 옷이 흠뻑 젖는 봉변을 당했다.

임찬규의 물벼락 세리머니가 펼쳐진 뒤 인터넷 연예·스포츠 매체는 정인영 아나운서의 ‘섹시함’에 초점을 맞춘 보도를 경쟁적으로 쏟아냈다. 네이버 화면 갈무리
‘섹시 물벼락’ 기사는 본질과 관계있나

프로야구 모든 경기가 스포츠 케이블채널 등을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되는 상황에서 선수들이 인터뷰 상황에서 펼치는 이런 세리머니는 야구의 또다른 재미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정도가 지나칠 경우 시청자의 불쾌감과 아나운서 등 방송사의 피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정인영 아나운서를 흠뻑 젖게 한 임찬규의 5월26일 물벼락 세리머니가 그런 경우였다. 임찬규의 세리머니는 우발적인 실수였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안긴 사실이 명백했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해당 방송사의 항의와 언론의 따끔한 비판은 충분히 가능했고 필요했다.

임찬규의 물벼락 세리머니에 대한 한국 사회, 특히 일부 인터넷 연예·스포츠 매체와 해당 방송사 관계자, 누리꾼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우선 연예·스포츠 매체가 사건을 다루는 방식은 ‘황색 저널리즘’의 전형이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임찬규’와 ‘정인영’을 동시에 포함하는 언론사 기사를 찾아보면 모두 700건 안팎의 뉴스가 쏟아져나온다. 엘지와 에스케이 경기 다음날이었던 지난 5월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의 기사를 검색한 결과다. 이들 매체가 주도한 ‘임찬규 물벼락’ 관련 초기 보도는 정인영 아나운서에게 초점을 맞췄다. 온라인 기사 제목은 △정인영 아나, 인터뷰 도중 물폭탄 맞아 남성팬 ‘젖으니까 섹시해’ 환호 △정인영 물벼락, 인터뷰 중 ‘섹시한 변신’ △정인영 아나, ‘섹시’ 물벼락, 노출논란 연장? 등이었다. 기사의 주요 열쇳말은 ‘정인영’과 함께 ‘섹시’, ‘아슬’ 등이었다. 일부 인터넷 매체는 “정인영 아나보다 미란다 커? 물젖은 모습 ‘아슬’”이라며 세계적 모델 미란다 커와 정 아나운서의 젖은 모습에 관한 비교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실시간 검색어 1~2위를 오르내릴 만큼 최근 남성팬의 큰 인기를 얻고 있던 정 아나운서를 어떻게든 기사의 소재로 활용해야 한다는 강박이 빚어낸 결과였다. 과거 여성 스포츠 아나운서가 물벼락을 맞았을 때에도 이들 매체는 이런 식의 기사를 주로 쏟아냈으니 사실 새로울 것은 없었다.

정 아나운서의 젖은 모습에 대한 ‘남성팬’의 ‘환호’는 케이비에스 엔 소속 관계자의 에스엔에스(SNS) 발언 등이 터져나오며 ‘임찬규 죽이기’로 방향을 틀었다. 케이비에스 엔 소속 한 피디는 27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야구 선수들 인성교육은 진짜 필요하다” 등의 발언을 하며 임찬규 등 야구 선수의 ‘인성’을 문제삼았다. 해당 방송사 스포츠편성제작팀장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자신의 에스엔에스를 통해 “승리해야만 하는 인터뷰이기에 더욱 볼 기회가 적었던 엘지 팬들께는 죄송하지만, 그나마도 케이비에스 엔 스포츠에서는 엘지 선수 인터뷰를 볼 수 없을 것”이라며 해당 구단 및 팬을 조롱하는 듯한 표현을 썼다.

물벼락 논란이 심해지자 엘지는 당사자인 임찬규와 주장 이병규, 그리고 구단 차원에서 정 아나운서와 방송사 쪽에 거듭 사과했다. 그렇지만 인터넷 매체는 경기가 끝난 지 이틀째가 되도록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서 내려오지 않은 임찬규와 정 아나운서를 놓치지 않았다. 여기서 불거진 것은 일부 누리꾼이 제기한 ‘임찬규 거짓말 해명 논란’이었다.

임찬규는 27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정인영 아나운서가 인터뷰하는지 몰랐고, 양동이가 무거워서 조준이 잘 안됐다. 작년에 이어 두 번이나 이런 일이 생겨서 미안하다”고 밝혔다. 임찬규는 지난해 5월에도 선배 이진영과 경기 뒤 인터뷰를 갖던 정 아나운서에게 물벼락 피해를 입힌 일이 있다. 27일 임찬규의 사과는 누가 보더라도 ‘정 아나운서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는 취지였는데도, 일부 매체는 ‘인터뷰 (자체를) 하는지 몰랐다는 임찬규 해명은 거짓말’이라는 식의 무리한 의혹제기를 그대로 받아 보도했다. △임찬규, 인터뷰하는 줄 몰랐다더니… △인터뷰 몰랐다던 임찬규, 가림막 뒤에서…거짓말 논란 △‘물폭탄 테러’ 임찬규…거짓말 논란 일파만파 등이었다. 정 아나운서의 팬과 각 구단 야구팬으로부터 손가락질당하고 있던 임찬규를 겨냥해 ‘테러’라는 표현까지 서슴없이 쓰는 이들 매체의 보도 행태는 ‘하이에나 저널리즘’에 가까웠다.

임찬규 물벼락 논란은 5월30일이 돼서야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까지 나서서 정 아나운서와 케이비에스 엔 쪽에 정중히 사과했고, 케이비에스 엔도 이를 받아들였다. 또 야구인에 대한 일부 케이비에스 엔 관계자의 부적절한 언행에 대해서는 케이비에스 엔이 ‘불필요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도로 입장을 밝혔다. 윤정주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소장은 “이번 논란은 여성 스포츠 아나운서를 전문직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저 한 사람의 ‘여성’으로 바라보는 인터넷 언론과, 누가 어떤 상처를 받든 비판 대상이 되는 사람에 대한 신상털기식 공격을 일종의 놀이로 받아들이는 최근 일부 누리꾼의 행태가 맞물리면서 부작용을 더한 사례”라고 말했다. 윤 소장은 또 “해당 선수의 사과와 해명이 있었는데도, 진정성은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들끼리 제기하는 근거가 약한 의혹을 부풀리는 것이 이들의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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