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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07 19:54 수정 : 2013.06.08 09:30

(※클릭하면 이미지가 커집니다.) 캄보디아 역사와 특별법정 진행 상황

[토요판] 뉴스분석 왜? 캄보디아 학살 책임자의 사과

▶ 과거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입에서 부활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과거의 실체를 직시할 때 치유받는다. 1975~79년 크메르루주가 국민개조 등을 명분으로 200여만명을 학살한 ‘킬링필드’에 대해, 크메르루주의 2인자, 누온 체아가 “책임을 통감한다”며 유족에게 사과했다. 87살의 누온 체아가 30여년 만에 책임을 인정한 캄보디아 특별법정은 어떤 곳인가? 그는 왜 ‘회심’한 것일까?

10년 전 유엔-캄보디아 정부의
합의에 따라 설립된 국제법정
크메르루주 학살 책임 묻고
정의를 되찾겠다는 취지이나
운영과정에 논란 끊이지 않아

캄보디아 총리 훈 센도
크메르루주 장교 출신으로
법정에 서야 하는 인물
미국이 킬링필드 비난하지만
크메르루주 학살 부추긴 건
1975년 이전 미군의 대량폭격

2011년 11월의 어느 날,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의 법원 앞엔 새벽부터 표를 받으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그들이 늘어선 거리는 1975년 4월17일 크메르루주군을 이끈 폴 포트가 론 놀 총리를 몰아내고 프놈펜에 입성했던 곳이었다. 당시 프놈펜 시민 중엔 뒷배를 봐주는 미국만 믿고 부패를 일삼았던 론 놀이 축출되는 것에 기뻐한 이들이 많았다. 상황은 변했다. 이날 사람들이 보길 원했던 것은 36년 전 의기양양하게 이 길을 행진했던 이들이 법정에 선 모습이었다. 이날은 캄보디아 특별법정에 크메르루주의 핵심 인사였던 누온 체아, 키우 삼판, 이엥 사리가 등장하는 날이었다.

80대의 누온 체아, 뒤늦게 회한 느꼈나

방청권을 얻으려고 길게 늘어선 줄에서 영국 <비비시>(BBC) 기자는 희한한 풍경을 목도했다. 크메르루주 시절 학살에 참여했던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재판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 8명을 잃었다는 홍 후이라는 인물 뒤엔 정권의 허락 없이 연애를 했다는 이유로 남녀 커플을 죽였던 침 판이 앉아 있었다. 침 판은 “만약 정권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으면 죽어야 했을 거다”라고 말하자, 홍 후이는 “나는 침 판과 같은 사람에겐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 진짜 벌받아야 할 사람은 오늘 법정에 서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날 공판에선 캄보디아 검사인 체아 렝이 학살자들의 만행을 세세히 나열했다. 1975~79년 프놈펜 시민들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시골로 쫓겨났는지, 처형당하거나 굶어 죽은 이들의 주검이 뒹굴던 시가지의 풍경은 어떠했는지. 크메르루주군은 살아 있는 사람의 내장을 끄집어냈고, 부모들이 죽은 자식들의 장례식도 지내지 못하게 했다. 굶주린 사람들은 시신의 살을 잘라내 먹어야 했다. 체아 렝은 “마치 세상의 종말이 닥친 것 같았다”는 한 생존자의 증언을 전했다. 폴 포트의 오른팔로 당시 ‘브러더 넘버2’라고 불렸던 누온 체아는 검은 안경 뒤로 표정을 숨기고 있었다. 그 옆엔 국가주석을 지냈던 키우 삼판이 앉아 있었다.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이엥 사리는 등이 아프다며 특별실에서 폐회로티브이(CCTV)로 재판 장면을 지켜봤다.

그로부터 1년6개월이 흘렀다. 2013년 5월30일, “국익을 위해 열심히 일했을 뿐”이라고 주장해온 누온 체아가 드디어 죄를 고백했다. 그는 질의자로 재판에 나온, 1970년대에 부모를 잃은 피해자를 향해 “나는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책임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또 “나는 당시 민주캄푸치아(크메르루주)의 일원으로서 지도자로서 책임을 피하려고 하지 않겠다. 가족을 잃은 당신에게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다”고 말했다. 누온 체아의 뒤를 이어, 폴 포트 정권에서 국가주석을 지냈던 키우 삼판도 조의를 표했다.

물론 이들의 사과를 충분하다고 평가할 순 없다. 누온 체아는 사과에 이어서 “나는 학살을 한 집행 부서엔 있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키우 삼판 역시 “나는 군인들이 그처럼 학살을 저질렀는지 미처 몰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의 발언은 처음으로 법정에서 자신의 책임을 공식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다. 최소한 공소 절차에 진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기대한다.

캄보디아 문서센터 소장인 유크 창은 “아마도 누온 체아는 자신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막판에 회한을 느낀 듯 보인다”고 말했다. 젊음이 넘쳤던 시절 무자비하게 총칼을 휘둘렀던 이들은 이미 80대를 넘겼다. 누온 체아보다 한 살 더 많은 또다른 핵심 전범, 이엥 사리도 곁을 떠났다. 이엥 사리는 88살의 나이로 지난 3월 세상을 떴다. 이엥 사리의 죽음은 누온 체아에게 ‘인생무상’을 깨우쳐줬을 수도 있다.

001호는 투올슬렝 교도소 책임자 두크

캄보디아 특별법정은 2003년 6월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의 합의에 따라 설립된 국제법정이다. 크메르루주 점령 기간에 저질러진 학살과 고문, 추방을 주도한 핵심 전범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고 희생자들에게 정의를 되찾아주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마오주의자’인 폴 포트가 이끈 공산게릴라군인 크메르루주(붉은 크메르라는 뜻)는 1975년 4월부터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타이로 쫓겨간 1979년 1월까지 캄보디아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시장은 물론 화폐도 없는 급진적 사회주의, ‘지식분자’를 처형하는 극단적 민중주의,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은 무분별한 폭력을 정당화시켰고, 당시 캄보디아 국민 800만여명 중 4분의 1을 죽이는 ‘캄보디아판 홀로코스트’가 벌어졌다. 피로 물든 캄보디아 벌판은 영화 제목처럼 ‘킬링필드’였다.

캄보디아 정부가 특별법정에 합의한 것은 과거의 ‘킬링필드’ 이미지를 벗고 국제사회에서의 지위를 확립하면서 역사적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특별법정을 반기는 미국·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은 식민지화, 폭격 등 자신들이 캄보디아에서 행한 폭력의 책임을 슬쩍 내려놓고, ‘크메르루주’에게 모든 비극의 책임을 전가하는 효과도 노렸을 것이다.

1991년 유엔의 중재로 베트남과의 전쟁을 끝낸 캄보디아 정부는 1997년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코피 아난에게 크메르루주 전범 재판을 위한 절차를 함께 진행하자고 서한을 보냈다. 이후 과정은 험난했다. 캄보디아 정부가 법정 설립·운영 비용을 부담하기로 했으나 캄보디아의 재정 상태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캐나다, 인도, 일본 등 다른 나라들이 후원하고 나섰다. 드디어 2006년 캄보디아를 비롯해 폴란드·스리랑카·독일·프랑스 등 외국 법률가 30명이 판사로 임명됐다. 이 법정은 캄보디아 안에서 재판을 수행하지만, 국제 판사와 국내 판사가 함께 일하고 캄보디아 국내법뿐 아니라 국제법·국제규약도 적용하는 국제법정이다.

특별법정에 가장 먼저 선 이는 투올슬렝(뚜얼슬랭) 교도소(S-21)의 책임자였던 두크(본명 캉 켁 이우)였다. 1만여명이 숨진 투올슬렝 교도소에서 저질러진 ‘사람사냥’은 크메르루주의 만행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것으로 꼽힌다. 특별법정은 이 사건을 001호로 명명하고 조사했으며 두크는 2007년 기소돼 2012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를 이어 사건 002호로 누온 체아, 키우 삼판, 이엥 사리와 그의 부인 이엥 티리트가 기소됐다. 폴 포트는 1998년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책임을 묻지 못했다. 티리트는 치매에 걸려 진술이 어렵다며 재판이 중지됐다. 결국 현재 죄를 가리는 작업이 남아 있는 전범은 누온 체아와 키우 삼판 두 사람이다.

수사검사와 수사판사와 대립과 반목

캄보디아 특별법정은 충분히 명분 있는 기구이지만, 운영 과정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캄보디아 정부에 책임이 있다. 독립적으로 운영돼야 할 특별법정에 압력을 행사한다는 비판이다. 캄보디아 국민들은 70%가량이 크메르루주를 단죄하는 특별법정 운영에 긍정적이었지만, 정부의 속내는 다르다. 현재 캄보디아 훈 센 총리는 크메르루주 장교 출신으로, 엄밀히 말한다면 그 역시 법정에 서야 할 인물이다.

캄보디아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은 2010년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훈 센 총리는 프놈펜을 방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사건 002호로 재판을 마무리하고 법정을 닫자고 말했다. 이미 수사에 들어갔던 003호는 투올슬렝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의 체포와 이송을 담당한 크메르루주 군인과 관련한 사건이었다. 이후 ‘사건 003호’로 재판이 이어져야 한다는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의 갈등은 복잡한 국제법정 시스템 안에서 복잡하게 뒤엉켰다.

우선, 판사 임명권을 둘러싼 신경전이 대표적이다. 캄보디아 특별법정의 국제 판사 임용 절차는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 유엔이 지명하고 캄보디아 최고사법위원회(SCM)가 추인하는 것이다. 캄보디아 정부는 2011년 1월 추가 재판을 요구하는 로랑 카스퍼앙세르메 예비 수사판사를 정식 수사판사로 임명할 수 없다고 통보하면서 유엔과 대립했다.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던 캄보디아가 프랑스 법체계를 물려받아 검사 이외에도 판사들이 기소 전 수사를 담당하도록 하는 것도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2011년 6월엔 공동 수사검사인 앤드루 케일리와 수사판사인 지크프리트 블룽크 판사가 대립했다. 케일리는 성명을 내 “공동 수사판사들이 사건 003호를 조기 종결하려 한다”고 비난했고, 블룽크는 케일리를 법정모독죄로 고발할 것이라고 발끈했다.

비용 투입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다는 비판도 많다. 그동안 특별법정엔 1억5000만달러가 들어갔는데 지금까지 형이 확정된 이는 두크 한 사람 말곤 없다. 호화 법정이지만 비효율적이라는 얘기다. 이 때문에 일본·독일·프랑스·미국·영국 등에선 특별법정이 더욱 투명하고 독립적으로 운영될 때까지는 재정 지원을 해주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희생자들의 증언이 무시되는 경우도 많다. 한 피해자는 재판에 증인으로 참여하려고 신청했으나, 판사들은 정신적 문제가 있어서 사실 가능성이 낮다며 반려했다. 또한 ‘직접적 피해자’에 한해 재판에 참여시킨다는 것도 제한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편에선 캄보디아 특별법정은 본래부터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국제분쟁 전문기자인 정문태씨는 1970년대 캄보디아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제대로 규명하려면, 1975년 이전 미군에 의한 무자비한 폭격으로 희생당한 이들에 대한 조사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캄보디아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을 섬멸해야 한다며 1969년부터 수년간 캄보디아에 각종 폭탄을 투하했다. 정씨는 “비밀폭격을 주도한 헨리 키신저 당시 백악관 안보고문도 법정에 세우라”고 주장한다. 크메르루주 점령 시절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는데 이는 미국의 폭격으로 농토가 불모지가 된 탓도 크다.

크메르루주의 교훈을 법에서만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동안 캄보디아 활동가들은 교과서에 크메르루주 집권 시절에 일어난 일들을 실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으며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다. 유크 창 캄보디아 문서센터 소장은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는 것은 캄보디아에서 국민들을 가장 잘 치유하는 수단 중 하나”라고 말했다. 2007년부터 캄보디아 교과서에 등장한 크메르루주의 만행에 대해, 지금은 9~12학년 학생들 100만여명이 배우고 있다. 크메르루주를 다룬 장(챕터)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새로운 세대를 위해 공백으로 남아 있던 시기를 서술한다는 것은 생존자들의 아픔과 상처를 다시 건드리는 위험을 안고 있다. (…) 하지만 우리가 과거를 직시하고 어떤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롯해 타인과 화해하기 힘들 것이고 전진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진정 치유받을 수 있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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