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뉴스분석 왜? 우방으로서 조금만 더 유연해질 순 없겠소?
▶ 북한이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또 한국과 미국은 북한에 핵개발 포기를 더욱 압박하고 있다. 모두에게 중국이 지렛대이다. 특히 북-중 관계가 전환기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게 보내는 가상 편지 형식을 통해 두 나라 관계의 역사적 토대와 현재 정세를 살핀다. 친애하는 김정은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귀하. 나는 지금 중국 인민해방군의 군가인 ‘팔로군행진곡’을 들으면서, 님 웨일스의 <아리랑>을 보고 있습니다. 김 위원장님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쓰려 하자, 갑자기 이 노래와 책이 생각났습니다. 팔로군행진곡은 중국 혁명에 복무했던 조선 출신의 정율성 선생이 작곡한 노래입니다.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 중의 한 분이며, ‘중국 현대 3대 음악가’ 중의 한 분인 정 선생의 노래 중에서 나는 개인적으로는 ‘옌안송’을 더 좋아합니다. ‘중국의 아리랑’이라 불리며 중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노래입니다. 선친인 시중쉰 전 부총리와 나의 청춘 시절이 서린 옌안을 노래했죠. 선친이 국공내전 때 이 옌안을 사수해서, 대장정을 했던 홍군이 자리잡고 중국 공산당이 부흥한 곳입니다. 나도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 옌안으로 하방하여,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노동의 고역을 달랬습니다. 옌안송을 들으며 펼쳐든 <아리랑>은 나의 가슴을 또 먹먹하게 했습니다. 중국 혁명에서 산화한 주인공 김산 동지의 헌신과 희생은 당시 중국과 조선 혁명을 공동운명으로 보고 복무했던 두 나라 인민과 공산당들의 연대와 동지애를 새삼 증명합니다. 중국 대륙을 떠돌며 영웅적인 투쟁을 했던 김산 동지는 결국 좌익 맹동주의 종파분자들에 의해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했습니다. <중국의 붉은 별>을 통해 중국 공산당과 중국 혁명의 실상을 세계에 알린 에드거 스노, <아리랑>을 쓴 님 웨일스는 부부입니다. 남편은 중국 혁명의 바깥 부분을 전하고, 부인은 그 속살을 전한 것이죠. 중국과 조선, 그리고 두 나라의 혁명이 부부 관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미국과의 일합, 마오쩌둥 큰아들의 전사 우리 두 나라와 공산당의 관계에 대해 요즘 주변에서 입방아가 심합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도 그런 입방아에 우리의 관계가 현혹되지 말자고 다짐하는 한편 더 발전적 전기를 찾아보자는 의도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과거나 지금이나 우리 두 나라의 상호원조와 전략적 이해관계가 기본적으로 바뀔 것이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문제인 귀국의 핵개발과 경제난이 한쪽이 다른 쪽에게 일방적으로 부담을 던지는 문제가 될 수 없음을 우리 두 사람은 잘 알고 있고, 차차 다시 한번 확인하기로 하죠. 사실 과거에 우리 중국도 조선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때 무정 장군 등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3개 사단이 옌안 등지에서 활약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국공내전 시절 만주에서 국민당군과 싸우던 인민해방군에 대해 조선과 조부이신 김일성 전 주석이 전폭적인 지원을 했습니다. 만주에서 수세에 몰리던 인민해방군은 국경을 넘어 조선으로 퇴각하기도 하고, 또 국민당군을 피해 조선을 통한 병참 지원도 했습니다. 아예 군수시설을 조선으로 옮기기도 했고, 조선도 공장을 가동해 인민해방군의 보급품을 생산했습니다. 일제 시절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의 동북항일연군 부대장으로 활약한 김일성 주석께서 당시 소련 군정의 눈치를 무릅쓰고 이 같은 결단을 했습니다. 소련은 당시 국민당 정부인 중화민국과 중소우호동맹조약을 맺는 등 국공내전에서 소극적 입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우리 두 나라의 관계에 대해주변에서 입방아가 심합니다
양국 관계가 혈맹에서 동맹,
전략적 협력관계로 바뀌며
관계의 밀도가 옅어진다고요 항일전쟁·국공내전·조선전쟁…
안보위협에 함께 맞섰던
조선의 의미는 그대로입니다
다만 엄중한 동북아 상황에
조선이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면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을게요 김 주석께서는 “중국의 사정은 곧 우리의 사정”이라며 성원을 보냈습니다. 다시 기록을 찾아보니, 무엇보다도 만주에 있던 조선족이 대거 공산당을 지원해, 참전한 수가 무려 6만3천여명이라고 하네요. 당시 만주 조선족 인구의 5%에 해당하는 수입니다. 조선의 지원은 수세에 몰리던 우리 공산당에게 전략적 요충지인 만주를 확보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힘이 됐고, 결국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끄는 기반이 됐습니다. 조선전쟁이 발발하자, 우리 중국 인민지원군도 참전했습니다. 우리 쪽 집계로도 무려 15만2천여명이 사망했고, 미군 쪽 집계로는 40만명이 사망했다고 하네요. 마오쩌둥 당시 주석께서는 중국과 조선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의 관계라는 고사성어를 인용하며, “중국 동지는 반드시 조선의 사정을 자기 사정처럼 간주해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마오 주석의 큰아들인 마오안잉 동지도 조선전쟁에서 전사했습니다. 중국의 조선전쟁 출병은 단순히 조선반도에 적대적인 정부가 수립되는 것은 막으려는 눈앞의 안보 목적만은 아니었습니다. 중국은 더글러스 맥아더 당시 연합군 사령관이 중·조 국경까지 병력을 밀고 올라오기에 앞서 이미 조선전쟁 발발 때에 만주에 25만명의 병력으로 동북변방군을 조성해, 출병에 대비했습니다. 국공내전이 끝난 지 1년도 안 된 시점이고, 중국 본토에도 여전히 미해방 지역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주도적으로 외국 출병 태세를 갖춘 것은 상식적으로는 무리한 조처였습니다. 하지만 국공내전 이후 중국 공산당과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을 고사시키려고 봉쇄로 일관하는 미국과의 일합은 우리가 거쳐야 할 혁명의 과정이었습니다. 국공내전 막바지에 공산당이 장강을 넘어 도하하려 하자, 소련 지도자 스탈린은 미군의 개입을 우려해 만류했습니다. 우리 지도부는 그때 “미국이 출병할 것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 출병하면 격퇴할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라고 응수했습니다. 우리로서는 내전 승리 뒤 미국과의 힘겨루기를 피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고, 베트남·대만해협·조선 3군데를 가능성 있는 지역으로 봤습니다. 미국과의 일합이 피할 수 없었다면, 우리의 든든한 혈맹이 있는 조선이 우리로서는 가장 좋은 선택지라 할 수 있겠지요. 우리 의용군들의 구호인 ‘항미원조보가위국’(미국에 맞서 조선을 지원해서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다)은 이를 압축적으로 표현해줍니다. 항미원조전쟁 참전은 사회주의권에서 중국의 위상을 강화하는 한편 미국으로 하여금 중국 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했습니다. 소련과 갈등 빚을 때도 든든한 형제 60년대 이후 우리 중국은 미국의 봉쇄뿐만 아니라 소련의 위협에 시달리는 중소분쟁에 빠져들었습니다. 이 중소분쟁 와중에서 조선은 대체로 우리 중국의 든든한 형제였습니다. 이 시절 조선이 중국과 소련을 상대로 등거리 외교를 하며 실리를 챙겼다고 하고, 60년대 중반 중국에서 문화대혁명 와중에서 좌익모험주의자들의 맹동으로 두 나라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절 크게 보면 조-중 관계는 조-소 관계에 비해 훨씬 밀착됐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두 나라의 관계가 최대 위기에 봉착한 것은 정작 우리의 숙적 소련이 붕괴된 90년대 초입니다. 이에 앞서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미·소·중·일 4대국의 남북한 교차승인 원칙에 따라 중국과 소련이 한국과 수교했으나, 그후 미국과 일본은 조선과의 수교는 고사하고 관계 개선마저 모른 척했습니다. 이때부터 본격화된 조선의 핵개발도 이런 상황에서 나온, 생존을 위한 자구책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후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권 붕괴로 조선이 더욱 고립된 상태에서 우리 중국이 조선에 대한 경제관계를 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한 현금결제방식으로 전환했습니다. 우리 중국으로서는 당시 완전히 시장개방경제로 전환하고 있어서, 그동안 양국 사이에 이뤄지던 국제가격의 절반 이하인 우호가격제와 물물교환인 구상결제방식을 지속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의 이런 사정을 감안해도, 조선이 받았을 타격에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안타깝게도 조부이신 김 주석도 타계하시고, 대홍수까지 겹치면서 조선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생존투쟁을 벌였습니다. 1995년 10월 장쩌민 당시 주석은 조선노동당 창립 50주년 주중 북한대사관 연회에 참석해 “앞으로 국제정세가 어떻게 변해도 중국 공산당과 중국 인민은 변함없이 중-조 우호합작관계를 유지·옹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고 강한 톤으로 강조했습니다. 조선이 핵개발을 놓고 미국과 타협한 제네바협정도 다시 무력화되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두 나라의 관계는 다시 복원됐습니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두 나라의 관계를 50년대까지 ‘혈맹’, 90년대 초까지를 ‘동맹’, 그 후를 ‘전략적 협력관계’라고 규정하기도 하더군요. 우리의 관계 밀도가 옅어진다는 말이지요. 최근에는 두 나라 관계가 이제 ‘정상적 국가관계’라고 떠드는 사람도 중국 내에도 있더군요. 국가의 실리를 냉정하게 챙기는 일반적 외교적 관계일 뿐이라는 의미겠지요. 누가 뭐라고 하든, 우리 중국에게 조선이 갖는 의미는 변하지 않습니다. 조선반도는 임진왜란 이후 중국에게 최대의 안보요충지가 됐습니다.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해양세력들의 발판이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이 대륙에서 명·청 황조 교체의 방아쇠가 됐습니다. 임진왜란 전에 역사적으로 중국의 안보 위협은 서·북쪽의 유라시아 대륙 내부에서 가해졌습니다. 서·북쪽 유목민족들의 흥기가 언제나 중국의 안보 위협이었습니다. 유럽 세력의 서세동점의 시작은 바스쿠 다가마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서 발견한 인도 항로 개척이었습니다. 우리 중국은 이보다 무려 92년 전에 명 시절 정화 제독이 동아프리카까지 가는 대항해를 7차례나 하며, 서쪽으로 가는 항로를 이미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명은 정화의 대항해 기록과 선단들을 갑자기 폐기하고, 정화마저 숙청했습니다. 여러 분석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동남쪽 해안을 통한 해외 진출은 실익이 없는데다, 서북쪽의 안보 위협이 더 급박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북쪽으로 퇴각했던 몽골의 북원 세력이 다시 흥기의 조짐을 보이며, 명의 황제를 포로로 잡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국경 맞댄 나라 중에서 조선이 최고 중국에게 동남 해안 지역은 안보의 무풍지대였으나, 이는 앞서 말한 대로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상황이 급변합니다. 19세기 말부터 중국은 동남쪽으로 진출해 오는 그전과는 전혀 다른 외세와 안보 위협에 봉착해, 반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지금도 남·동중국해는 중국의 전략물자들이 오가는 사활적 해로가 있지만, 미국과 동맹국들이 중국을 봉쇄·압박하는 지대입니다. 일본과의 댜오위다오 제도 분쟁, 동남아 국가와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중국 봉쇄와 압박에 다름 아닙니다. 중국은 안보에 취약한 지정학적 입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도를 봅시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는 나라 중 조선을 제외하고 중국에 우호적인 나라가 있는지. 가장 긴 국경을 맞댄 러시아는 과거에 비해 관계가 개선됐으나, 역사적으로 경쟁자입니다. 서쪽에 있는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은 우리의 신장위구르 지역의 분리독립을 자극하는 이슬람 국가들입니다. 인도는 전쟁까지 한 경쟁국입니다. 베트남과도 1979년 전쟁을 하는 등 역사적으로 구원이 가득합니다. 건국 이래 우리는 안보위협에 대해서는 결연히 맞섰습니다. 항미원조전쟁은 물론이고, 중·인 전쟁, 중·월 전쟁이 그 예입니다. 1979년 우리가 베트남을 침공한 것을 두고 말이 많은데, 이는 사실 소련을 겨냥한 전쟁이었습니다. 소련은 당시 베트남의 캄란만(깜라인만) 기지를 조차하려고 했습니다. 이는 머리 쪽에서 우월한 군사력으로 우리를 위협하던 소련이 우리의 엉덩이를 찔러대려는 의도였습니다. 이 전쟁으로 소련의 캄란만 기지 조차는 유야무야됐습니다. 온통 포위된 형국의 중국에게 조선은 유일한 군사동맹국이자, 국경을 맞댄 유일한 우호맹방입니다. 호사가들이 무어라고 입방아를 해대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나는 지난해 지도자로 내정된 상태에서 미국을 방문해, “서로의 핵심이익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올해 국가주석으로서 미국을 방문해서는 ‘신형 대국관계’를 강조했습니다. 핵심이익이란 우리의 주권·영토·안보를 말하는 것이며, 신형 대국관계란 세계질서를 책임지는 양대국으로서 서로를 대등하게 존중하자는 말입니다. 우리의 핵심이익을 위해 조선이 필수불가결하지만, 신형 대국관계를 위해 미국에 대해 체면을 세워줘야 하는 우리의 책무도 있습니다. 조선은 지금 한국의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파탄난 남북관계로 인한 고립 상황을 탈피하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최룡해 군 총정치국장이 방중해서 나를 만나고 갔는데, 내가 그의 군복 착용을 질책하는 등 냉랭하게 대했다는 소문도 돌더군요. 그를 중개로 한 우리 두 사람의 대화가 마치 한국에서 폭로된 남북정상대화록처럼 떠도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이런 입방아에 신경을 쓸 것은 없지만, 지금 동북아 상황은 엄중합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정부가 극우성향을 날로 노골화하는 상황은 위기이자 기회입니다. 한국의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의 과오를 반성했는지, 우리 중국에 적극적인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조선도 좀더 능동적이고 유연하게 대처한다면, 고립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과 한국이 앞다투어 관계개선을 하려는 입지에 설 수도 있습니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냅니다’(長江後浪推前浪). 장강은 변함없지만, 그 물결은 바뀝니다. 우리 두 나라와 당의 우호관계는 변함없겠지만, 그 내용은 바뀝니다. 새롭게 지도자로 오른 우리 두 사람이 그 일을 해야 하는 숙명에 처해 있습니다. 곧 위원장님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조선 인민과 공화국의 건승을 손모아 빕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겸 중국 공산당 총서기, 중앙군사위 주석 시진핑.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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