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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09 19:35 수정 : 2013.08.11 20:29

법원의 추징금을 낼 수 없다는 그가 육사발전기금은 어떻게 냈을까? 그것은 ‘전두환 은닉재산 추적’의 출발점이었다. 2012년 6월8일 서울시 노원구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육사발전기금 200억원 달성 기념행사에 참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가족과 측근들을 대동하고 육사 생도들을 사열하고 있다. 화면 갈무리

[토요판] 뉴스분석 왜?
<2> ‘전두환의 은닉 재산’ 추적기

▶ 검찰은 압박하고 전두환 전 대통령 쪽은 정면으로 맞섰다. 전 전 대통령 쪽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까지 자신들이 결백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언급한다. <한겨레>는 지난 5월 ‘전 전 대통령 재산찾기 크라우드소싱’ 기획을 시작해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은닉재산 의혹을 보도해왔다. <한겨레> 보도가 검찰 수사와 사회적 환기를 선도했다고 자부한다. <한겨레>의 ‘전 전 대통령 은닉재산 특별취재팀’ 고나무 기자로부터 전 전 대통령 취재의 전모를 듣는다.

“전두환(82)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의 패총이다.” 글 쓰는 요리사 박찬일은 전 전 대통령과 그의 시대를 두고 언젠가 이렇게 표현했다. ‘패총’은 조개무덤이다. 앞 세대의 흔적이 쌓인 유적이다. 그러나 파헤치면 현재가 보인다. 이 비유법은 적실하다. 추징금 미납 문제는 한국 사회가 기본적 정의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왔는지 화두를 던진다. 정치인 전두환의 과거는 현재 한국 정치의 과제를 이해하는 계기를 준다. <한겨레>가 현대사의 패총으로 걸어들어간 데는 몇개의 계기가 있었다.

팩트 없는 야당의 비난 성명에 복장이 터져…

2012년 6월8일 오후 태릉 육군사관학교에서 ‘육사발전기금 200억원 달성’ 기념행사가 열렸다. 육사 생도들이 행진한다. 단상에는 기금을 낸 사람들이 있다. 일부는 박수를 치고, 어떤 사람은 거수경례를 한다. 텔레비전 보도를 보면, 전 전 대통령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감개무량할 만하다. 전 전 대통령은 육사 11기다. 최초로 4년제 교육을 이수한 기수로 모집 당시 ‘정규 육사 1기’라 불렸다. 1954년 전 전 대통령은 생도 가운데 한명으로 행진했다. 단상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서 있었다. 그는 그 장면을 기억했으리라.

논란이 거셌다. 야당과 시민단체가 잇달아 비판 성명을 냈다. 내란죄 유죄 판결을 받고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박탈당한 사람이 미래의 한국군 장교를 사열하는 일은 온당치 않다는 취지였다. 그해 4월11일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이겼다. 의외의 승리였다. 정치권에서는 여야 모두 야당이 이기리라 점쳤다. 전 전 대통령은 군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를 만들어 권력을 접수했다. 전 전 대통령의 육사 사열은 쿠데타를 기억하는 시민들에게 ‘상징’처럼 다가왔을 것으로 보인다. 하나회 출신의 육사 출신 강창희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지난해 7월 19대 국회의장에 뽑혔다.

야당과 시민단체는 계속 비판 성명을 냈다. 전 전 대통령은 1997년 내란죄·뇌물죄 유죄 판결에서 2205억원의 추징금을 함께 선고받았다. 1672억원이 남아 있었다. 전 전 대통령은 2004년 ‘금융재산이 29만원’이라고 주장했다. 무슨 돈으로 육사발전기금을 냈느냐는 게 비판 취지였다. 동사와 형용사에는 비난의 정서가 많이 묻어났다. 그것은 아픈 자의 목소리에 가까웠다. 1980년 5월18일의 상처가 여전히 컸을 것이다. 그러나 비난 성명을 아무리 읽어봐도 2004년 전재용씨 조세포탈 사건을 넘어서는 팩트가 없었다. 기자로서 그런 팩트 없는 비난 성명을 반복해 읽는 일은 답답한 노릇이었다. ‘신문은 혁명적이어서 진실한 게 아니라 진실하므로 혁명적’이라는 금언을 기억하는 모든 기자가 그랬을 것이다.

재산이 없다는 그의 항변과
육사발전기금을 낸 현실
정말 남은 재산은 없는가?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으로
은닉재산 취재 시동을 걸다  

이순자씨가 잠시 가등기했다던
관양동 땅 현 소유자가 딸이라는
단독보도를 낼 수 있었지만
나머지 재산은 안개에 가려졌고
다른 방식의 도움이 필요했다

첫 문제의식은 소박했다. 육사발전기금 논란이 추징금 미납 문제로 이어짐에 주목했다. 정황은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재산이 없다는 항변과 육사발전기금을 낸 현실은 맞지 않는다. 지극히 상식적인 세개의 질문을 자문했다. ‘전 전 대통령에게 정말 남은 재산이 있는가?’ ‘전 전 대통령의 은닉재산에 대한 지금까지의 실체 규명은 어디까지 진행됐는가’ ‘전 전 대통령의 주장대로 1997년 판결에 나온 추징금액이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법원을 믿지 말아야 하는가’.

세개의 질문을 염두에 두고 취재했다. 당시 <한겨레21> 편집장과 정치팀장의 전폭적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주간지 기자는 매주 마감한다. 전 전 대통령의 은닉재산을 파헤치는 일은 취재 가치가 있다고 편집장을 설득했다. 이제훈 편집장과 이지은 정치팀장은 3주간 마감에서 ‘해방’시키는 결정을 했다. 저널리즘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인턴 1명과 3주간 공동작업했다. 1988년 5공 청문회 자료에서 시작했다. 1988년 이후 2013년까지 ‘전두환’ ‘재산’으로 검색되는 모든 기사를 출력해 검토했다. 과거 수사, 재판 기록을 모두 참조했다. 단행본 4권 분량이 넘었다. 읽고, 다시 읽었다. 청문회 당시 논란이 됐던 모든 5공 비리 사건의 ‘이후’를 검토했다.

엑셀파일의 과거 논란 재산 목록 번호가 23번을 넘어갔다. 유독 ‘그 사건’이 꽂혔다. 1988년 국민의 5공 비리 비판이 거세졌다. 전 전 대통령은 같은 해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백담사로 향했다. 부동산 4건과 금융자산 23억원이 전재산이라고 주장했다. 거짓말이었다. 1989년 통합민주당 김운환 의원이 경기도 안양시 관양동 토지가 이순자(74)씨 명의로 가등기된 사실을 밝혀냈다. 전 전 대통령 쪽은 ‘이순자씨 동생 이창석(62)씨가 실소유주이고 이순자씨가 잠시 가등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후’가 궁금했다. 관양동 땅의 등기부를 확인했더니 2006년 이창석씨가 전 전 대통령 딸 전효선(51)씨에게 증여한 사실이 드러났다. 직접 가봤다. 대문과 현관까지 진입로가 긴 주택이 있었다. <한겨레21>의 2012년 관양동 땅 단독보도는 그렇게 탄생했다.

시민 제보로 찾은 또다른 은닉 재산들

잠시 화제가 되었던 전 전 대통령 은닉재산 이슈는 2012년 12월 대선에 묻혔다. 12월19일 오후 5시까지 민주통합당 당직자들은 밝게 웃으며 기자들에게 농담을 던졌다. 당연히 이길 거라 말했다. 여당 정치인들도 어려운 선거가 될 거라고 말했다. 2013년 2월25일 취임식 단상에 앉은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취임식을 축하하는 자리에 다시 전 전 대통령이 보였다. 한국 대통령의 취임식이 2월25일이 된 건 전 전 대통령부터다. 1963년과 1969년 대선 뒤 대통령 취임식은 늘 그해 말에 개최됐다. 그리고 얼마 뒤 ‘일베 논쟁’이 벌어졌다. 몇몇 종편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이 투입됐다는 어느 탈북자의 주장을 보도했다. 기자로서의 기본이 안 된 보도는 ‘일베’ 현상과 만났다. 과거 역사가 좀비처럼 2013년 한국 사회를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은닉재산 문제를 다시 제기할 때라고 봤다. 다른 방식으로 문제제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 전 대통령 은닉재산을 취재하는 일은 검은 안개로 뒤덮인 소택지를 오래 걷는 일과 비슷했다. 누구도 직접적으로 그를 옹호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민의 탈세를 추적하는 국세청과 검찰의 평소 활동 기준에 비춰, 그들은 유독 그에게 관대했다. 옹호의 주체는 보이지 않는데 전 전 대통령은 옹호되고, 지지자는 보이지 않는데 전 전 대통령은 지지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동태의 안갯속에서 전 전 대통령은 무탈했다. 2004년 전재용씨 조세포탈 사건에서 73억5500만원의 전 전 대통령 비자금의 실체가 드러났다. 노숙자 명의까지 차명계좌 관리에 동원됐다. 차명계좌를 만들고 관리하는 일을 도운 총책이 있다. ‘유병국 전 국두파이낸스 사장.’ 그는 별건의 금융 사기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판결문에 나온 주소지로 찾아가도 그는 없었다. ‘국두파이낸스’라는 회사는 금융 전문가 대부분 기억하지 못하는 회사였다. 그는 검은 안개 뒤에 숨었다. 막막했다. 도움이 필요했다. 언론이 방대한 로데이터를 인터넷에 공개하면 시민이 이를 내려받아 제보하는 ‘크라우드소싱’ 방식을 도입한 이유가 여기 있다. <한겨레>는 5월21일 전두환 재산찾기 크라우드소싱을 시작했다.

결과물로 이어졌다. ‘금호아시아나 전 전 대통령 특혜 골프’ 단독보도, ‘삼원코리아 등 은닉재산 의혹’ ‘김용진 음악세계 사장 과거 5공 시절 청와대 근무’ 단독보도 등이 전부 시민 제보가 토대가 됐다. 전 전 대통령 쪽의 입장을 직접 듣고 싶었다. 2013년 초 전 전 대통령을 포함해 당시 측근에게 일일이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시절 전 전 대통령과 맞섰던 육사 11기 생존자에게도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쿠데타 진압에 적극 나서지 않은 1979년 당시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전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5공 비리로 유죄 판결 받은 안무혁 전 국세청장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황해도 중앙도민회장이다. 지금도, 잘 산다.

채동욱 검찰총장의 노력은 뒤늦은 감이 있지만 왔어야 할 정의였다. 검찰은 서울중앙지검에 ‘전두환 일가 미납추징금 특별환수팀’(팀장 김형준)을 만들었다. 지난 7월 전재국씨 등 자녀, 친인척, 측근 등을 일제히 압수수색했다. 민정기 전 비서관은 지난 6일 보도자료를 내어 정면으로 맞섰다. 1995년 검찰의 수사에 맞서 쿠데타를 옹호하는 골목성명을 냈던 전 전 대통령 쪽의 호연지기는, 여전했다. 현직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결백의 근거로 언급하는 당당함을 보여줬다. 거짓말을 하는 당당함도 여전했다. 전 전 대통령은 1979년 청와대 금고에서 발견된 괴자금 9억5천만원을 손도 대지 않았다고 지난 6일 주장했다. 거짓말일 것이다. 1979년 전 전 대통령에게 불법 체포당한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은 회고록에서 “당시 합수본부에서 6억원을 박근혜양에게 주고 1억원은 수사비로 쓰고 2억원은 여기 가져왔다”고 기록했다. 회고록을 보면, 전 전 대통령은 괴자금 가운데 5천만원을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에게 무단으로 건넸다. 심지어 그 사실을 상관인 정 전 총장에게 보고하지도 않았다.

수사는 진행중이고 <한겨레>는 검찰 수사와 선의의 경쟁을 할 것이다. 추징금 문제만으로 ‘전두환과 그의 시대’가 준 숙제가 다 풀리지 않는다. 기자이자 동시에 투표권을 가진 시민인 내게 ‘정치인 전두환’ ‘리더 전두환’은 영감을 주는 반면교사다. <전두환 육성증언>(김성익·조선일보사)을 보면, 대통령 재임 시절 전 전 대통령은 청와대 회의에서 “정치란 힘 가진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원리”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진보 성향 트위터리안 일부는 이 발언을 비판했다. 조금 과장하자면, 비판할 게 아니라 진보가 배울 덕목이다. 선거와 민주적 절차를 통해 만들어진 선한 권력을, 원칙대로 관철하는 게 민주주의다. 1997년 김대중 정부는 선거로 잡은 권력을 통해 전 전 대통령을 사면해줬다. 2002년 집권한 노무현 정부 시절의 검찰은 추징금 73억원을 밝혀놓고도 필요한 법적 절차를 밟지 않아 추징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다. 선한 권력이 작동하지 않는 것은, 부작위의 죄다. 그러므로 박근혜 대통령이 전 전 대통령 추징 문제와 관련해 이전 정부의 무능을 지적한 것은 옳다. 대선 뒤 ‘선한 마키아벨리즘’을 줄곧 주장하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주장은 그래서 울림이 있다.

반면교사가 주는 영감, 그리고 김재익

전두환과 그의 시대가 기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5공화국 초기 경제참모였던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이 숙제를 준 장본인이다. 그는 자유주의자였지만 전 전 대통령 밑에서 일했다. 재벌에 대한 금리 특혜를 없애려 했다. 금융실명제 도입도 시도했다.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 ‘한 경제전략가에 대한 회상’(손광식)에 등장하는 김 전 수석의 발언은 2013년의 기자들에게도 화두다. 김 전 수석은 당시 <경향신문> 기자인 손광식씨에게 자문하듯 말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미국이나 일본 같은 경제대국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하나의 모델이 있다면 그건 스웨덴이다”라고 말했다. 교역을 개방하더라도 은행은 외국자본이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도 지적했다. 김 전 수석은 1983년 아웅산 테러로 숨졌다. 아이엠에프를 부른 김영삼노믹스, 카드산업을 촉발시켰던 디제이노믹스, 금융허브 노무현노믹스를 기억하는 나는 자문한다. ‘보수정당을 이기겠다던 이른바 민주정부들의 경제철학은 전두환 경제참모의 비전을 뛰어넘었는가?’ 이 질문을 깊고 넓게 던지고 싶어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북콤마)를 써야 했다.

그러므로 다시, 전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의 패총이다. <한겨레>는 올 10월까지 패총을 뒤적일 것이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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